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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교 구내식당의 활기찬 모습.
 한 학교 구내식당의 활기찬 모습.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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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프랑스의 초·중·고등학생들이 모두 학교로 향하였다. 길었던 두 달간의 여름 방학이 앨범 속으로 고스란히 사라졌다.  방학 동안의 여행, 자신들이 한 일 등을 한 끼 밥상을 사이에 두고 웃음과 함께 녹여내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프랑스 학교의 구내식당은 원칙적으로 모든 학생이 이용할 수 있다. 프랑스의 초·중·고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국가에서 관리하지만 각 학교의 재정을 관리하는 기관은 서로 다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재정은 시 등에서, 중학교 재정은 도에서 관리하는 식이다.

프랑스 학교의 구내식당은 무료가 아니다. 재정 담당 기관과 학부모가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한다. 학생이 내는 식비는 부모의 수입과 가족 수에 따라 달라진다. 식비는 8단계로 나뉘는데, 가장 적게 내는 아이는 한 끼에 13상팀(약 200원)을 내고 가장 많이 내는 아이는 한 끼에 5유로(약 7800원)를 낸다. 소득이 높은 가정이 소득이 낮은 가정의 학생 식비를 일부 부담하는 셈이다.

실업자 가정 아이들의 학교 구내식당 이용 제한한 시장

그런데 토농-레-벵(Thonon-les-Bains) 시에 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에서 부모가 모두 실업자이거나, 아빠가 실업자이고 엄마는 전업주부인 아이들은 이번 학기부터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 당하는 처지가 됐다. 토농-레-벵 시가 올해 4월에 만든 학교 구내식당 출입에 관한 새로운 규칙을 이번 학기부터 적용한 것이다. 토농-레-벵은 프랑스-스위스 국경 지대인 레만호수 주변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3만2000명이다.

우파 성향의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 소속인 장 드네(Jean Denais) 시장은 "아이들은 늘어나는데 구내식당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다"며, 이번 학기부터 부모가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구내식당 이용 우선권을 주겠다고 밝혔다.

이전에는 부모의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오는 순서대로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4월에 만들어진 새로운 규칙은 부모가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먼저 구내식당을 이용하게 한 후, 자리가 남으면 실업자 가정의 아이들에게 개방하겠다는 내용이다. 

자리가 남는다고 해서 실업자 가정의 아이들이 구내식당을 아무런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업자 가정의 아이들이 구내식당을 이용하려면 부모가 구직을 위한 인터뷰나 연수를 할 것이라는 증빙 서류를 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구직을 위한 인터뷰나 연수를 하지 않는 실업자 부모들은 시간 여유가 있으므로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점심을 차려줄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장 드네 시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구내식당은 시 차원의 서비스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 이번 결정으로 토농-레-벵 시에 있는 9곳의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서 35명의 학생이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 당하게 됐다.

한 학교 구내식당에서 애피타이저로 야채샐러드를 먹고 있는 학생들.
 한 학교 구내식당에서 애피타이저로 야채샐러드를 먹고 있는 학생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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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결정에 반발해 무료 점심 제공한 식당 주인

토농-레-벵 시는 오래전부터 우파 성향의 시장이 집권한 곳이다. 그만큼 우파 성향 시민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시장의 이번 결정은 많은 시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부 시민들은 이번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행동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반대 행동을 주동한 사람은 식당 주인인 장-루이 갈랑(Jean-Louis Galand)이다. 9월 12일, 장-루이 갈랑은 구내식당 이용이 제한된 실업자 가정의 아이들을 자기 식당에 데려가 공짜로 점심을 먹였다. 이날 메뉴는 야채샐러드, 닭튀김과 감자튀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 등이었다. 9명의 아이들은 구내식당에서보다 한결 나은 식사를 했다.

이날 많은 주민과 상인, 자원봉사자들이 장-루이 갈랑을 도왔다. 한 택시 운전사가 아이들을 학교에서 식당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아이들이 먹은 아이스크림은 마을의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 직접 만들었다. 케이크는 옆 식당 주인이 아몬드 젤리로 만든 과자 위에 인권선언 장식을 덧붙여 손수 만들었다.

장-루이 갈랑은 "시장이 규정을 바꾸어 실업자 아이들을 구내식당에서 (사실상) 배제한 것은 일종의 차별이다. 식당 공간이 한정돼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6년에는 지금보다 학생이 더 많았지만 모두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지금은 셀프서비스가 도입되어 자리 수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나는 50여 명의 아이들에게 공짜로 점심을 먹일 수 있고, 필요하다면 계속 아이들에게 공짜로 점심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기자와 전화 통화를 한 이 식당의 요리사 다비드에 의하면 12일 프랑스의 주요 언론은 물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언론사에 속한 기자들까지 모두 15명이 아이들에게 공짜로 점심을 주는 이들의 모습을 취재하였다고 한다.

9월 12일, 식당 주인인 장-루이 갈랑이 제공한 공짜 점심을 먹고 있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담고 있는 취재진.
 9월 12일, 식당 주인인 장-루이 갈랑이 제공한 공짜 점심을 먹고 있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담고 있는 취재진.
ⓒ <트리뷘 드 즈네브(Tribune de Gen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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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별 항목에 '빈곤' 포함시켜야

토농-레-벵 시 같은 상황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몇 년간 프랑스 각 지역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올해 파리 근교 이블린(Yvelines) 지역의 에폰느(Epone) 마을에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9월 12일자 <뤼마니테>(L'Humanite, 공산당에서 발간하는 신문)는 프랑스의 70여 개 마을·시에서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보르도, 니스, 툴롱 등 시장이 UMP 소속인 곳에서 주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실업자 가정 아이들의 학교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하는 지자체 중에는 토농-레-벵 시보다 더 심한 곳도 있다. 토농-레-벵 시는 부모가 모두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과 부모 중 한 사람만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이 동등하게 학교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와 달리 몇몇 도시에서는 부모가 모두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은 매일 학교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반면, 부모 중 한 사람만 취업한 가정의 아이들은 일주일에 2번만 학교 구내식당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학부모위원회연맹(Federation des Conseils de Parents d'eleves)은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 당한 아이의 부모들이 법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학부모위원회연맹은 12일자 <리베라시옹>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공서비스 앞에서 모든 이는 평등하다. (……) 모든 아이가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부언이 필요 없는 사실이다."

아장(Hazan) 학부모위원회연맹 회장은 토농-레-벵 시장이 이번 결정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학부모위원회연맹은 토농-레-벵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왔다. 그럴 때마다 프랑스 법원은 구내식당 이용을 제한당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려왔다. 1993년 베르사이유 법원, 2010년 리용 법원, 그리고 올해 여름 오를레앙 법원 모두 구내식당 이용 제한 결정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매년 일부 시나 마을에서 토농-레-벵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일이 거듭되는 것은 법에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형법 225조 1항은 사회적 차별 요인으로 국적, 성, 장애, 성적·정치적 성향 등의 18개 조항을 들고 있지만 빈곤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유럽인권협약만이 유일하게 빈곤 조항을 분명하게 포함하고 있고 프랑스에도 이 사항을 적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 형법의 사회적 차별 요인에 빈곤이라는 항목이 들어가지 않는 한 이런 차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학부모위원회연맹은 차후에 한 발 더 나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구내식당 이용 제한 결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자체에서 피해 가족에게 손해배상을 하게끔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손해배상 요구는 구내식당 이용 제한 결정을 내리려는 지자체를 경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태그:#실업자, #구내식당, #급식, #빈곤,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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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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