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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에는 힘없는 서민들이 한 탁배기에 시름을 달래는 곳이지만 관직 떨어진 퇴물들과 도성에서 힘깨나 쓴다는 왈패들도 모여 들었다. 또한 세도가 집에서 도성에 떠도는 소문을 수집하기 위하여 하인을 풀어 놓기도 했다.

피맛골
▲ 피마 피맛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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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명나라 데리고 간 신숙주가 수양대군의 장자방이 된다며?"
"서장관으로 같이 갔지만 학처럼 고고한 집현전 학자가 아무렴 장자방 노릇할려고?"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냄새가 나긴 나."
"냄새나면 안 먹으면 되지."
"뭘?"
"숙주나물."
"하하하."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것보다도 개성에 있던 칠삭둥이가 수양대군 장자방 된다는 소문이 있어."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칠삭둥이야."
"걸 내가 어떻게 알어?"
"모르긴 해도 먼저 나오느라고 머리도 안 여물었을텐데."
"어디서?"
"예끼, 이 사람아!"
"크크크."

장자방(張子房)
중국 한나라의 건국 공신(?~B.C.168) 장양(張良)의 호와 이름을 함께 이르는 말. 한나라 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소하ㆍ한신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진다.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책사로 짜하게 알려졌지만 한명회는 아직 노출되지 않았다. "내가 한명회다" 하고 뛰쳐나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소인배들하고 드잡이하면 똑같이 소인배가 된다. 꾹 참았다. 이때였다. 안으로 들어오던 조번이 한명회를 발견했다.

"어이, 송도에 있어야 할 한지기가 여긴 웬 일인가?"

조번이 반가움을 표시했다. 경덕궁 궁지기로 있어야 할 한명회가 한양에는 웬일이냐는 것이다. 한명회는 조번이 이 집을 자주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바다를 보고 있어야 할 조지기는?"

태종 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의 동생 조종생의 아들 조번은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떠돌다 안평의 수하가 되어 소릉(昭陵)직을 얻었다. 비록 능지기라 하나 과거에 붙어야 나아갈 수 있는 종9품 벼슬이다. 안평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나간 조번은 안평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수족이 되었다.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는 세조에 의해 파헤쳐져 흩뿌려졌다 중종8년(1513) 복위되어 지아비 곁에 잠들어 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다
▲ 현릉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는 세조에 의해 파헤쳐져 흩뿌려졌다 중종8년(1513) 복위되어 지아비 곁에 잠들어 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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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은 문종의 정비 현덕왕후의 능침으로 안산에 있다. 현 임금의 어머니 묘다. 사모의 정에 사무친 임금이 찾아가면 지근거리에서 모실 수 있는 자리다. 한명회 역시 과거에 연거푸 낙방하다 음보(蔭補)로 겨우 경덕궁 궁지기에 나갔다. 능지기와 궁지기. 두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꿈을 펼쳐보지 못한 한 서린 동지애가 있었다.

"시골뜨기가 여기 오면 안 되나?"
"안 될 거야 없지만 복색도 초라한 몰골에 도성을 헤매다간 코 베어 간다네."
"귀까지 베어 가라지."

조번과 한명회가 마주보며 웃었다.

"그대는 안평대군의 사람됨을 아는가?"

조번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안평이 누군데?"

한명회가 시치미를 뗐다.

"좋은 관직을 잡으려면 줄을 잘 서야 해. 줄. 아직도 안평대군을 모르고 있었나?"

조번이 눈을 크게 떴다.

"그야 세종대왕의 셋째 아드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줄 서는 것은 난 모르네. 꿈을 접었지 않은가"
"에끼 이 사람아. 청춘이 구만리 같은데 벌써 꿈을 접어?"
"꿈 접은 지 오래일세."

한명회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낼 일이 아니라 내, 좋은 술 한번 맛보여줌세."
"무슨 술."
"안평대군 하사주,"

조번이 한명회의 소매를 끌었다.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피맛골을 나섰다. 모퉁이를 돌아 조금 가니 개천이 앞길을 막아섰다.

광화문과 흘례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향하면 영제교가 나온다. 인위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했다. 궁궐을 드나드는 신하들이 이 다리를 건널때 깨끗이 마음을 씻고(洗心)들어오라는 의미다
▲ 영제교 광화문과 흘례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향하면 영제교가 나온다. 인위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했다. 궁궐을 드나드는 신하들이 이 다리를 건널때 깨끗이 마음을 씻고(洗心)들어오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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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에서 발원한 실개천이 옥류동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과 만나 몸집을 불리더니만 장통방에서 본류는 남쪽으로 보내고 경복궁 담장 밑으로 스며들어 경회루에서 유희를 즐기다 영제교를 통과하여 동십자각에서 삼청계곡에서 흘러오는 계류와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중학천이다. 하류로 내려가면 혜정교가 있고 상류로 올라가면 중학교가 있지만 징검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노자께서는 상선약수라 했는데 난, 선(善)이 지고지선인지 의문이 들어?"

징검다리를 건너던 조번이 뜬금없는 질문을 날렸다. 한명회의 속내를 떠보기 위한 탐색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謙遜). 장애물을 만나면 싸우지 않고 돌아가는 부쟁(不爭.). 높은 것은 깎아내리고 낮은 곳은 메꿔주는 평등(平等). 이러다가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정의(正義). 이것이 물의 본질이요 그것이 곧 선의 으뜸이라고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빌어 설파했다.

흐르던 물이 바위를 만나 그 바위와 싸우지 않고 돌아간 증거다.
▲ 한반도지형 흐르던 물이 바위를 만나 그 바위와 싸우지 않고 돌아간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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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투지 않고 묵묵히 흐르는 물은 선한 것이지."
"내려가면서 지류와 만나면 점점 탁해지지 않은가?"
"그래도 선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네."
"우리 인간도 만남이 확장되면 물처럼 탁해질까?"
"물은 물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여러 지류와 만나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깨끗해지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더러워진다는 얘기지."

짧은 대화였지만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는 날카로 얘기였다. 개천을 건넌 조번과 한명회는 이조(吏曹) 뒷담을 돌아 인달방 조번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조번은 하사주는 내놓지도 않고 안평 얘기에 열을 올렸다.

"안평대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풍모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대 인자한 큰 도량은 가히 성인군자라네."
"그렇게 그릇이 큰가?"
"덕은 또 어떻구. 여러 사람에게 몸을 낮추어 마음을 얻으니 어찌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겠는가?"
"남의 밑에 있지 않으면?"

한명회가 조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곧 지엄한 자리에 오를걸세."

겁 없는 소리다. 대군이 오를 지엄한 자리가 어디란 말인가? 그 자리가 옥좌라면 혀가 뽑히고 목이 달아날 소리다.

"자, 자, 우리끼리 너무 심각한 얘기 그만하구. 내가 좋은 것을 보여줄 게 있네."

조번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하긴 피맛골에 있는 한명회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목적이기도 했다. 조번은 안평대군이 준 선물을 보여주었다. 중국 유명 서예가의 글씨와 그림과 안평대군의 절친 안견의 그림도 있었다. 한명회가 놀란 척하자 조번이 신바람 났다.

"이건 안견의 그림인데 이 귀한 그림을 대군나리께서 날 주셨다네."

조번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좋겠네 자네는. 건 그렇고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가?"
"삼정승은 말 할 것도 없고 육조 판서들이 모두 가담하고 있다네. 나는 한성부 판사와 함께 무기고의 병장기를 맡았네. 내 휘하에 별군(別軍)이 수백이요 장정들도 수백 명이라네."

조번이 침을 튀겼다.

"능지기가 장군 되었군."
"부러우면 진다네."

한명회를 향하여 조소를 날리던 조번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도 나리를 한 번 뵈면 이러한 일을 맡길 줄 누가 아나? 이명민에게도 역부(役夫) 1천명을 맡겼다네."

이명민은 창덕궁 중수공사를 맡고 있는 선공부정이다.

"나도 좀 끼어줄 수 있겠나?"

한명회가 은근짜를 놓았다.

"여부 있겠나."
"판사는 누구인가?"
"윤처공이네."
"대신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공(三公)과 우참찬, 이조판서, 병조판서가 모두 안평대군과 친하게 지내어 정이 골육(骨肉)과 같아 생사를 같이 할 것이라 들었네."
"큰일을 치러도 남음이 있겠군."
"며칠 지나지 않아 큰 일이 터질 것이네. 그때 그대는 실컷 구경이나 하시게."

조번이 의기양양하게 '큰일'이라는 것에 힘주어 말했다.

"여보게 조지기! 술고파 술청에서 술 마시던 사람 데려 와가지고 술도 안 주면서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난 가야겠네."

한명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대군 하사주 맛보여준다고 해놓구선 내 정신 좀 봐."

조번이 호들갑을 떨었다.

"난 가겠네."

한명회가 두 손을 털었다. 조번이 대군 하사주를 맛보이려고 데려온 것도 아니고 한명회 역시, 술이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니었다. 미련 없이 헤어졌다. 바로 그 시각. 이현로가 명례궁을 찾아왔다.

"네가 웬일이냐? 안평이 염탐이라도 보내던가?"

수양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요. 소인이 개인적으로 나리께 문후 여쭈러 왔습니다."

이현로가 두 손을 비볐다.

"일없다."

수양이 한마디로 잘랐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너의 인사는 받고 싶지 않다. 포박하여 헌부에 보내기 전에 냉큼 나가거라."

수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하인을 불러 사헌부로 묶어 보낼 기세다.


태그:#수양대군, #한명회, #상선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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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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