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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왼쪽 높은 봉우리가 인왕산 정상이다.
▲ 일몰 인왕산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왼쪽 높은 봉우리가 인왕산 정상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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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아직 꼬리를 감추지 않은 시각.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서로 연통도 없고 약조도 없었지만 땅거미가 내려앉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모여 들었다. 그곳에 가면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아는 사람이 있었다. 피맛골이다.

"물렀거라."

운종가에 높은 사람들의 말과 가마가 뜨면 백성들은 머리를 땅에 박았다. 벼슬아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자가 지나가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했다. 육조거리가 가까운 이곳은 바람 잘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백성들은 운종가를 활보하는 벼슬아치와 말을 피해 뒷골목으로 잦아들었다. 피마(避馬)다.

참하관들의 시건방... '정말 눈꼴 사나워'

임금의 어가(御駕)나 왕비의 가교(駕轎)가 지나가면 백성들은 길 한 켠에 물러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승판서의 교자(轎子)까지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허나, 성공한 반역은 혁명이라고 공신이나 그 후손들이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세도가에게 바리바리 갖다 바치고 벼슬을 딴 자 일 경우 배알이 꼴렸다.

또한 당하관 주제에 지가 무슨 정승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지나가는 꼴이란 눈뜨고 못 보아줄 광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참하관(參下官)들의 견마잡이가 백성들을 향하여 눈알을 부라리거나 채찍을 날릴 때는 눈이 튀어나왔다. 그들을 보기 싫어서라도 피맛골은 백성들로 메워졌다. 피맛골은 반골(反骨)골이었다.

피맛골
▲ 피맛골 피맛골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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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한 방 먹었다며?"
"누구한테?"
"누긴 누구야, 안평대군이지."
"안평대군이 어떻게?"
"형이 오라는데 가지 않았대."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잖아."
"낙마는 무슨 얼어 죽을 낙마. 기집하고 그 짓 과하게 하면 허리 부러지는 거 자네는 모르나?"
"소향이란 그 기생 거기가 명물이라며?"
"명물?"
"명긴(名器)지 명품인지 안 써봐서 모르겠지만 좋긴 좋나 보더라고."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어?"
"멀쩡하던 안평대군 허리를 잡았잖아."
"잡아? 잡을 게 따로 있지."
"하하하."

피맛골, 그곳은 정보의 샘이었고 소문의 바다였다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일단의 무리가 입방아를 찧어댔다. 피맛골에는 고만고만한 '먹자'집이 즐비했다. 운종가 헛집(假家)뒤로 어깨를 부딪치며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쩍 벌어진 색주가나 기방은 아니었다. 객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봉놋방이 있는 주막도 아니었다. 널빤지로 만들어진 긴 탁자에 중노미 하나둘 있는 술청이었다.

이름도 각양각색이었다. 곰보집과 쌍과부집이 있는가하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다하여 감나무집이 있었고 문밖에 은행나무가 있다하며 은행나무집도 있었다. 주인 택호(宅號)를 따 남포집과 진주집이 있는가 하면 안성집과 원주집이 있었다. 이 모든 이름은 술청을 운영하는 주모나 주파(酒婆)가 지은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손님들이 부르다 보면 이름이 되었다.

먹거리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국밥집이 있는가 하면 육포와 어포 를 내는 마른안주 집이 있었고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과 전을 내는 진안주집이 있었다. 또한, 꿩고기만을 내놓는 꿩집이 있는가 하면 토끼집도 있었고 참새집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안주의 으뜸은 올라갈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먹지는 못하지만 씹을수록 맛있기 때문이다. 국초에는 이성계가 단골이었고 두문동 72현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이방원과 이숙번이 도마에 올랐다. 세종 때는 사내들이 실종되고 여인들이 등장했다. 감동(甘同)과 세자빈이다. 궁녀를 침전으로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낸 순빈봉씨의 동성애 사건도 장안의 화재였지만 39명의 사내를 후린 감동이 단연 최고의 주인공이었다.

당시대의 여인으로 분한 여자. 경희궁에서
▲ 감동 당시대의 여인으로 분한 여자. 경희궁에서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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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은 사대부집 딸이며 평강현감 최중기의 부인이다. 무안현감을 명받은 최중기를 따라 현지에 내려간 그는 지병 때문에 홀로 한양에 올라왔다. 비접(避病)하러 가는 밤길. 그를 가로막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감동의 운명을 바꾼 사내 김여달이다.

조사할 것이 있다 속인 그는 감동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공포에 떨고 있던 감동은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감전된 김여달은 자기가 변강쇠인 줄 착각했다. 그 후, 김여달은 감동 혼자 있는 최중기의 집까지 쳐들어가 거리낌 없이 욕심을 채우다 마침내 감동을 데리고 도망쳤다.

복수에 나선 감동, 닥치는 대로 사내들을 후렸다

사건이 드러나 시집에서 쫓겨난 감동은 참담했다. 밤길 걸어간 죄밖에 없었는데 지아비로부터 부정(不淨)한 여자라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감동은 스스로 창기라 칭하며 세상과 사내들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이 때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김여달이 떠올랐다.

'바로 그거야.' 사내들은 청각에 취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감동은 날이면 날마다 사내를 갈아치우며 소리로 '척'했다. 감동이 '척'하면 사내들은 더 '척'해 주려 안달이 났다. 공조판서와 사헌부 장령 등 조정의 고위관리가 걸려들었다. '척'으로 월척(越尺)을 낚은 셈이다.

'척'에 자신감을 얻은 감동은 계속 낚시를 드리웠다. 상호군 이효랑, 해주판관 오안로, 호군 황치신, 도사 이곡, 총제 정효문, 군자감주부 전수생, 절제사 박종지, 행사직 주진자, 판관 유승유, 내자판관 김유진, 찰방 최심, 길주판관 이수동, 진해현감 김이정, 부사직 설석, 행수 이견수, 별시위 송복리가 덥석 물었다.

감동의 낚시행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흙으로 자기를 빚어내고 돌로 보석을 만들고 쇠로 보검을 만드는 장인들의 손길은 어떨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짜 '손맛'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낚시꾼이 어종을 바꾸려면 자리를 옮겨야 한다. 감동이 활동무대를 사옹원 근처로 옮기자 수정장(水精匠) 장지, 은장(銀匠) 이성, 안자장(鞍子匠) 최문수가 걸려들었다. 모두가 왕실에서 인정하는 궁정 장인들이었다.

섬세한 장인의 손을 타서 그럴까? 사내들과 '척'하며 뜨거운 밤을 보내던 감동이 '척'의 참맛을 터득하기 시작하더니만 마침내 '척' 꼬리표를 뗐다. 그러자 사내들이 더 달라붙었다. 내친걸음 멈출 수 없는 감동은 시정잡배들까지 끌어들여 불같은 밤을 보냈으나 그녀가 줄기차게 노리는 것은 사(士)였다. 뒷짐 지고 헛기침하며 먹고도 안 먹은 척, 하고도 안 한척, 인륜을 파괴하고도 안 그런척, 이렇게 '척'하는 사대부들의 위선을 박살내고 싶었던 것이다.

손수 작성한 진술서, 그것은 세상을 향한 고발장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했던가? 밟히기 위해 꼬리를 늘어뜨렸나? 감동이 사헌부에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게 된 감동은 상대한 남자들 개개인의 느낌과 체위를 설명하며 초사(招辭)를 손수 썼다. 보통의 죄인은 신문(訊問)관이 작성한 초사에 서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감동은 직접 작성했다. 한 획도 수정할 수 없다는 무언의 항거였다. 이것은 진술서라기보다도 세상에 대한 고발장이었다. 당황한 것은 문초를 담당한 위관이었다. 초사 그대로 보고 하자니 민망하고 축소하자니 난감했다.

간추린 계본(啓本)을 받아든 세종의 첫마디는 "세족인가?"였다. 좌대언 김자로부터 "사족 유귀수의 딸이며 현감 최중기의 부인."이라는 보고를 받은 세종은 망연자실했다. 엄중하게 다스리자니 많은 신하를 잃게 되고 가벼이 처결하자니 백성들의 눈이 무서웠다. 당시 율법으로는 사대부의 부인과 간통한 자는 최고 사형에 처하는 중형으로 다스렸다. 풍속은 통치철학 강상(綱常)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관심은 '누가 어떤 처벌을 받느냐?'에 쏠려 있었다. 결국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고 감동은 엉덩이 몇 대 맞고 극변에 내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주모! 여기 탁배기 하나 주시오."

한명회가 나지막하게 주문했다. 술청에는 탁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방주문(方文酒)도 있다. 하지만 서민들의 술. 탁배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안 팔아주어도 괞찮아요."

주모가 눈웃음을 날렸다. 구부정한 모습에 혼자 와서 앉아 있는 모습이 없어 보였나 보다. 피맛골에는 팔도의 소문들이 모여들고 확대 재생산되어 퍼져나갔다. 피맛골은 정보의 샘이었고 소문의 바다였다. 한명회는 수양이 명나라로 떠난 직후부터 거의 매일 피맛골을 찾았다. 중국으로 떠난 수양의 소식을 서찰보다 먼저 알 수 있었고 도성에 떠도는 소문을 수집할 수 있어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역사소설 수양대군은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태그:#수양대군, #감동, #성폭행, #주막, #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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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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