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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씨의 토익책들
 J씨의 토익책들
ⓒ 이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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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P의 이야기 "영어에 나름 눈 떴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700~800점 정도였는데, 석 달 동안 밤낮없이 공부해서 960점 만들었어."

국어교사인 친구 P는 토익점수가 960점이다. 그가 준비했던 임용고시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고 타 과목에 비해 적은 국어과 선발인원은 P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P는 혹시 모르는 불합격에 대비해 다른 직업도 함께 준비하고자 토익 공부에 매달렸고, 960점이라는 '꿈의 점수'를 얻었다.

원하던 국어선생님이 된 후 그는 그동안 한 토익공부가 아까워 회화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외국인 강사에게 레벨테스트를 받은 뒤 충격을 받았다. P의 말하기와 듣기 능력에 대해 외국인 강사가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영어에 나름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외국인이 앞에 있으니까 입이 굳어져 말을 못했어. 여태까지 내가 공부한 토익에 대해 회의가 들더라…"

[사례2] K의 이야기 "외국인하고 대화 가능한데, 내가 700점?"

졸업반인 K는 미국 뉴저지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외국인을 만나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다. 하지만 K의 토익점수는 700점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영어실력이 줄지는 않았단다. 그동안 꾸준히 회화 스터디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K의 토익 점수가 700점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 회화를 할 때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쓰지는 않잖아. 하지만 토익의 어휘는 실생활과 무관할 정도로 비즈니스 위주이고 그래서 내가 가진 영어실력과 점수가 꼭 비례하진 않는 것 같아."

K는 토익을 위해 따로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토익 900점이 넘어도 말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이 시험이) 영어실력과는 상관이 멀다는 것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토익 점수는 '영어능력의 공식지표'로 통한다. 2011년 7월 기준 17만 명 가량의 응시자가 토익시험을 봤다. 단순 계산하면 일 년에 약 200만 명이 토익을 보는 셈이다. 토익 말고도 IELTS(아이엘츠), TEPS(텝스) 등 다른 대체제도 존재한다. 하지만 규모면에서 토익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이엘츠와 토플은 한 해를 통틀어 각각 2만 5000명과 12만 5000명이 시험에 응시한다(2008년 기준). 토익 응시자 수가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응시자가 토익시험을 2회 이상 중복해서 치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면 사설시험이 아니라 '국가고시'라 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이처럼 토익에 매달리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토익에 대한 응시자들의 불만은 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과연 토익이 영어실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취업 영어의 절대 기준인 '토익 900점'을 넘겨도 외국인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반대로 영어권 국가로 어학연수를 다녀와도 토익 600~700점 사이에서 '허덕이는' 경우도 흔하다. 비단 이것이 내 주변의 문제일까?

"토익, 영어실력보다는 취업 스펙을 위한 테크닉 공부죠"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는 J씨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고 있는 J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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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학년 때 토익 준비할 때는 영어실력향상을 위한 목적이 있었죠. 그런데 토익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영어실력 향상보다는 시험을 위한 테크닉 공부 같아요."

서울 종로에 위치한 S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J(26)씨는 토익 공부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토익 공부를 영어실력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기업들이 스펙보다 지원자들의 경험을 많이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 상반기 인턴을 지원하며 느낀 건 스펙으로서 '토익의 벽'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제가 (토익점수) 800점 초반일 때의 합격률과 800점 후반일 때의 합격률은 확연히 달랐어요."

J씨 옆에 있던 선배 C(27)씨는 토익 점수가 890점이라고 했다. 900에 가까운 점수를 얻는 그에게 토익 주관사인 ETS에서 정의한 토익 점수별 영어능력에 공감하는지 물었다.

- 900점 가까운 점수를 가지고 계시네요. ETS 자료에 따르면, 900점이면 '당신이 상대 기관의 원어민과 당신의 기관을 대표해 합의와 계약을 진행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나와요. 동의하시나요?
"아니오, 전혀요. 독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신있지만, 쓰기나 말하기는 단어를 가지고 겨우 이어가는 정도예요."

올해 들어 토익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나로서도 그들의 여러 대답에 대부분 공감이 갔다. 내가 들은 토익 강의의 대부분은 '빈칸 채우기'였다. 영어를 배운다기보다는 공식에 영단어를 끼워 맞추는 기분이었다.

"여기 '( ) ideas'에서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야 하죠?"
"'creative'요."

토익강의를 알아보려 인터넷을 뒤지자 500점을 두세 달 만에 800점 혹은 900점으로 만들었다는 '기적의 수강후기'가 넘쳐났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자작 홍보 글이었지만 속는 셈 치고 400점을 올려 준다는 강사를 선택했다. 그래도 처음엔 영어실력이 조금이라도 늘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강의는 '찍기강의'가 전부였다. 매일 진도를 나가며 주제는 바뀌었지만, 강의 방식은 한결같았다. 두 달 과정을 모두 끝내고 나서도 내 영어실력이 나아졌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토익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당장 입사지원을 위한 토익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서도 찝찝하고, 안 하자니 더 찝찝한 '계륵 토익'

400점이 올랐다며 학원 벽에 걸려있는 수강후기들
 400점이 올랐다며 학원 벽에 걸려있는 수강후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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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토익을 안 보는 곳에 지원하면 될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긴 어렵다. 자신이 어디에 취직될지 몰라 불안한 취업준비생들은 단 한 곳이라도 합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각 기관에서 제시한 모든 자격조건을 갖추려 노력한다.

올해 채용계획에서도 토익의 강세는 계속 될 전망이기에 취준생(취업준비생의 줄임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토익학원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토익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결과 입사시 토익점수 제출이 필수인 기업은 무려 170여 개사에 이르렀다. 또한 한 취업포털의 9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60%에 달하는 공기업이 외국어 능력시험으로 자격제한을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격제한이 되는 평균 기준은 토익 700점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지원을 위한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실제 합격점수는 그 이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지난 시험에서 운이 좋아 910점이 나왔다는 J씨는 앞으로도 토익시험을 계속 볼 것이라고 했다.

"제가 지원하려고 하는 기업이 920점부터 가산점을 주거든요. 10점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면 억울하잖아요, 어쩔 수 없이 계속 해야죠."

월 평균 20만 원 가량의 학원수강료, 한 권에 2만 원에 가까운 교재비(교재는 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강교재에 기본서, 모의고사 문제집까지), 거기에 더해 매달 4만 원 가량의 토익시험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취준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점수를 얻을 때까지 토익에 올인한다.

수업 후 학원을 나오고 있는 학생들
 수업 후 학원을 나오고 있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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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인턴으로 근무한 회사에서도 토익 점수가 곧 영어실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900점이 넘어도 실제로 시켜보면 아무 말도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수많은 지원자 중에 걸러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토익점수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취준생들이 이렇게 애써서 얻는 점수이지만 쓰임은 입사할 때 그 뿐이다. C씨는 자신이 인턴으로 일했던 기업에서도 토익 점수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하나의 '필수 취업 스펙'이 된 토익 점수가 학생들에게 학업스트레스와 고액의 교육비라는 이중고를 안겨주지만 기업 실무능력에는 반영할 수 없는 엉터리 지표가 되고 있는 상황. 우리 사회에 부는 '토익 광풍'이 과연 올바른 흐름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따라붙는 이유다. 하자니 꺼림칙하고, 안 하자니 더 꺼림칙한 토익, 언제까지 필요악으로 계속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토익 만능주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 덧붙이는 말 : 아이엘츠와 토플의 최신 응시자수 정보는 구할 수 없어 2008년 자료를 사용했다. 토플은 미국 ETS본사로 직접 연락하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아이엘츠를 주관하는 영국 문화원은 ARS만 나올 뿐 직원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텝스는 응시인원이 비공개 자료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덧붙이는 글 | 이형섭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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