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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의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NHS를 사랑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한 영국 여성. 대부분 외국인들이 NHS에 비판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인들은 NHS를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NHS를 사랑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한 영국 여성. 대부분 외국인들이 NHS에 비판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인들은 NHS를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EPA /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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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떠나 지구 반대편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인 2008년. 슬슬 타향 생활에 적응해 나갈 때쯤,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귀에 심한 통증과 함께 쉬~ 하는 소리가 들리고, 청력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외로운 유학생 처지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때의 그 불안감이란.

2주일 만에 얻은 항생제, 한달 만에 만난 전문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고 불리는 영국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워낙 좋지 않은 얘기를 많이 들었던 바, 병원에는 가볼 생각도 안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민간요법에 따라 자가 치료(?)를 시도해 봤지만, 병세는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영국의 의료 시스템을 '참여관찰'해 보자는 엉뚱한 생각에, GP(General Practitioner)의 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GP란 모든 영국 국민에게 배정되어 있는 주치의다).

GP의 방에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조그마한 방이었다. 밝은 웃음으로 나를 맞이한 그는 꽤 오랜 시간 걸쳐 이것저것 문진을 하고, 귀이경으로 귓속을 진찰했다.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뿔싸, 의학서적을 꺼내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의사가 환자 앞에서 책을 꺼내 읽어 보다니... 정말이지 난생 처음 보는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는 나의 이런 당혹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중이염인데 심하지는 않고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경우도 많으니까, 일단 푹 쉬시고, 일주일 후에도 나아지지 않으면 다시 찾아오세요."

아무리 무상의료라고는 하지만, 집에 가서 쉬라니... 그래도 참여관찰을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연구자의 자세가 아니기에,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갔다.

"아파 죽겠으니 빨리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며 나를 안심 시킨 후 귀에 넣는 물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차도가 없었고, 일주일 후 다시 찾아가서야 비로소 '항생제'를 처방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이비인후과에서는 항생제를 2~3주간 충분히 복용하도록 하는 게 중이염 치료의 기본이지만, 영국에서는 2주일 만에 항생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결국 다시 GP를 찾아갔다. 그제야 그는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소견서를 써주었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기로 마음먹고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한 달! 서울에서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면 즉시 만날 수 있는 바로 그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만나는 데 걸린 시간이 말이다. '영국에서는 환자가 대기하다 죽어간다'는 얘기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신속한 한국 의료 서비스, 과연 좋을까

그 후 잠시 한국에 들를 일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이비인후과로 달려갔다. 영국에서 가져온 진료 기록부터 보여주었다. 의사는 "영국은 '의료후진국'이니까 그냥 무시하세요"라고 하더니,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의학서적 따위는 펼쳐 보지도 않은 채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말에서 신뢰가 느껴졌다. 비급여 항목 때문에 검사 비용이 50만 원쯤 든다고 했지만, 나는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빨리 검사를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밀 검사 후 단순 중이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고 정밀 검사까지 마친 후,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시간. 검사비가 좀 많이 들긴 했지만, 영국에서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첨단 의료 시스템에 감동을 받고 뿌듯한 마음으로 영국 생활에 복귀했다. 그런데 이후에 영국에서 병원에 몇 차례 더 다녀온 후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무엇보다 의료 서비스를 단순히 '속도'로만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의료 서비스가 빠르다고 해서 과연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환자가 전문의를 쉽게 만날 수 없다면 그 자체로 문제일 수 있지만,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처럼 전문의 진료를 받는 데 한 달씩 걸리기도 하지만, 1주일 또는 심지어 바로 다음 날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GP는 병의 경중에 따라 적절하게 2차 진료기관으로 환자를 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컨대, 당장 치료해도 별 차도가 없는 가벼운 '감기', '복통' 따위는 GP 스스로 기본적인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지켜본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소견서를 써준다.

하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또는 수일 내로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까 나의 중이염은 GP가 판단할 때, 촌각을 다투는 응급 질환이 아니었고, 경과를 지켜 본 후 천천히 2차 진료기관에 보내도 무방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악명높은 대기 시간, 이유 있었네

NHS 예산이 삭감되면 환자들이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영국의 공공노조 UNISON 노동자들.
 NHS 예산이 삭감되면 환자들이 더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영국의 공공노조 UNISON 노동자들.
ⓒ EPA /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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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명 높은 영국 의료의 '대기 시간'에는 이유가 있었다. 의료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분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국은 2차 진료기관에의 접근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시스템이지만, 대신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GP가 2차 진료기관 접근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에 과잉진료는 상상할 수도 없다. 대기 시간이 문제라고 하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한 사람까지 무조건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을 통제하는 GP의 의학적 판단이 엉터리가 아니라면, 꽤 효율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은 의료비 지출이 적은 편인데도 국민건강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그러니까 비용 대비 효율이 무척 좋다는 얘긴데, 어쩌면 그 비결이 '대기 시간'에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가 잘 안 들려 하루 하루가 불안한데, 이비인후과 전문의 한 번 만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하지만 그 '대기 시간'이 의사의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것이고, 그 덕분에 전 국민이 무상의료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 때 그 GP의 의학적 판단을 신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태연하게 의학서적을 펼쳐 놓던 그 GP는 꽤나 성심성의껏 나를 대해줬던 것 같다. 이비인후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 골치 아픈 환자를 달래면서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차분히 설득하던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덧붙이는 글 | 홍성수님은 현재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입니다.



태그:#NHS, #유러피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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