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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인권 운동의 현장이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고립된 엄마의 삶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기에 여의도 정치를 해바라기하기보단 내 삶이 있는 동네를 들여다보며 인권을 고민 중이다.

 

다시 길을 떠나다

 

휴가차 제주도에 갔다. 만 3년 만의 여행인데다 첫돌을 넘긴 아이와 함께하는 첫 여행이기에 설레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개운치 않은 마음을 읽었는지 신랑은 집에 있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여행을 나섰던 건 휴가라는 명분을 빌려서라도 가 보고 싶은 곳, 보고픈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엔 비바람이 불더니 강정마을은 땡볕이다. 만 3년 전 여행지도 이곳이었다. 해군 기지 건설이 결정됐다는 소식에 들렸는데 외부인의 눈에 마을은 그저 평화롭고 한가롭게만 보였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마을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을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과 구럼비 가는 길에 즐비한 텐트, 그리고 상주하는 경찰과 공사 현장에 세워진 펜스는 마을이 처한 상황을 실감나게 대변하고 있었다. 조용하게 사라질 것 같았던 해군 기지 반대의 목소리는 주민들의 외롭고도 끈질긴 투쟁 덕에 섬사람은 물론 육지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었고, 제주도의 작은 어촌 마을은 우리 시대 평화의 상징이 됐다.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 문정현 신부도 이곳에 있었다. 신부는 지난 7월 이곳의 주민이 되었다. 평택 대추리가, 용산 남일당이 매번 마지막 소명이길 바라던 신부는 강정마을 사람들의 절규와 시대의 사명을 외면하지 못해 "'구럼비'와 함께 묻힐 수 있기를" 소원하며 이곳에 내려왔다. 용산 참사 장례식 직전에 뵌 게 마지막이니 꼬박 1년 반 만의 만남이다.

 

"잘 왔다." 신부는 손을 꼭 잡으며 웃어 주었지만, 한눈에도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은 더 검게 그을려 있었고, 수염은 바람에 뒤엉켜 있었다. 신부가 노구를 이끌고 현장을 지킬 동안 나는 아이를 낳고 키웠다. 10년 넘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해 주었던 인권 운동의 현장이 뉴스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소식이 되어 가는 과정은 내가 평범한 애 엄마가 되어 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가 꼬물꼬물 성장해 제 발로 세상을 딛게 된 기쁨을 맛보는 동안 신부는 더욱 나빠져 가는 현장을 지키며 늙어 갔다. 용산 참사 장례식이 끝나자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스스로 '영업소'가 된 교회가 낮은 자의 편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며 서각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2010년 겨울을 온전히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보냈다. 신부의 소식을 접할 때면 나는 따듯한 방 안에서 배불리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신부는 내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자신의 몸으로 알려 주는 그런 존재였다.

 

도대체 언제 신부가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서 있는 곳에 항상 있었다. 매향리의 철조망 앞에 그가 있었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던 농성장에도 그가 있었으며, 대추리 황새울에도, 용산의 남일당에도 그가 있었다. 나는 하루의 일정을, 그 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떠났지만 그는 그곳이 제자리인 양 그곳을 지켰다.

 

길이 보이지 않아 절망할 때면 그는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이 가장 짙다고 말해 주곤 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사제가 주는 권위도, 남성이 주는 믿음도, 연륜이 주는 존경도 아닌 늘 현장에 있는 든든한 벗으로서, 수고로움과 고단함을 마다치 않는 선배로서 나는 그를 믿었다. 내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신부였지만 나는 그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를 통해 읽는 '이름 없는 자'들의 삶

 

<다시 길을 떠나다 - 길 위의 신부 문정현>(낮은산)은 그런 신부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씨가 지난해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신부의 삶을 다시 한 번 다듬고 보완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에는 5대에 걸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사제가 된 평범한 신부였던 문정현이 '운동권 신부'가 되어 길 위에 서게 된 지난 45년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신부의 활동 영역이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기에 신부를 인권 운동 영역에만 가둘 수는 없지만, 제대로 된 한국 인권 운동사가 없는 현실에서 신부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그 길을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신부의 삶을 엿보았다. 청년 신부와 만나기도 했으며, 교회에서 배척받는 사제의 슬픔을 듣기도 했다. 나도 한자리를 지켰던 사건들을 읽을 때면 그때의 기억과 생각들이 떠올라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한 사람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예수에 대한 신심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 되었으니, 우리도 그를 닮아 가야 한다는 교훈을 책이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벗으로서, 낮은 자로서 문정현은 사라지고 위인과 영웅으로 재탄생된 문정현을 보는 것 같아 불편했다.

 

이런 불편함은 책의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사그라졌다. 책은 문정현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지만 동시에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그와 동행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박복실은 1981년부터 꼬박 10여 년 간 전북 지역 노동 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다. 그는 태창메리야쓰 민주노조 지부장이기도 했는데, "태창에서 해고된 뒤, 광전자·원일택시·군산경성고무 등지에 입사했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무려 일곱 차례나 해고되었다."

 

이후 그는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일하면서 노동 운동을 이어갔는데, 궁핍한 생활로 인해 얻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다. 매향리 폭격장 폐쇄를 이끌어 낸 전만규는 평범한 농민이었다. 그는 매향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바로 자신이 매향리 사격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매향리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주민들과 함께 폭격장 폐쇄 투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다치고 감옥에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외롭지만 끈질긴 그와 주민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매향리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결국 매향리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두희는 그 왕성한 활동에 비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활동가다. 신부를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이끈 오두희는 전북 지역 노동 운동은 물론 군산 미군 기지 싸움,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운동, 반전 평화 운동, 대추리, 용산 남일당, 그리고 지금 강정마을에 이르기까지 고단한 여정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책은 또한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을 기록한다. 미군이 설치한 고압선에 감전사한 전동록 씨는 세상이 기억하지 못하는 미군 폭력의 피해자다. 미군 캠프 내에 설치된 고압선의 감전 위험이 매우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안전 설비를 갖추지 않았고, 전 씨는 공사 도중 감전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미군은 사과는커녕 단돈 60만 원을 위로금으로 건네며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 일은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서야 세간에 알려졌는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전 씨는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 계획이 발표된 뒤 대추리에서는 줄초상이 났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세 번이나 땅을 빼앗긴 노인들은 그 두려움과 좌절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추리의 싸움이 패배로 막을 내린 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4년 가까이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다 지난 2010년 11월에야 비로소 새 정착지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상비가 적은 사람들은 빚까지 졌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이들은 공공 근로에 매달리거나 일용 노동자로 전락했다."

 

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시선을 붙잡고, 마음을 붙잡은 사람은 신부가 아니었다. 세상이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신부를 길 위에 서게 해 준 사람, 신부를 길 위에서 붙잡아 준 사람, 그리고 지금 그 길 위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박복실, 전만규, 서로벨또, 박순희, 오두희, 조성옥, 김지태가 나를 붙잡아 흔들었으며,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다가 화상을 입고도 "병원에 가지 않고 상처에서 구더기가 나올 때까지 미련스럽게 견뎠"던 어린 노동자들이, 양심수 가족들에게조차 환대받지 못한 인혁당 유족들이 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래서 책은 '낮은 이들을 기록해 온' 작가 김중미를 닮았다. 또한 책은 '낮은 이들과 함께 살아온' 신부 문정현을 닮았다. 누군가 문정현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하는 길은 시대의 신부로서 문정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문정현의 삶 속에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읽는 것일 게다.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을 통해 문정현 신부와 김중미 씨가 말하고 싶은 것이기도 할 테다.

 

서울 중심의 운동사를 넘어서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큰 미덕은 서울 중심의 운동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운동사는 서울을 중심을 기록돼 왔으며, 지역의 운동사는 잘 소개되지 않거나 천대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책은 서울 중심의 서사에 익숙한 우리에게 지역의 농민사를, 노동사를, 평화 운동사를 소개한다.

 

일례로 1979년 발생한 '오원춘 사건'은 경북 영양군청이 농민들에게 권장한 불량한 감자 씨앗이 발단이 돼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파종을 했던 농민들은 폐농의 책임을 물은 끝에 군청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아 냈는데, 이러한 보상 사례가 전국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은 위 내용이 담긴 잡지를 몰래 빼돌렸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 있던 오원춘을 납치해 회유했다. 결국 사건은 법원으로까지 갔지만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1987년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이 "1988, 1989년 전노협 건설의 불길로 이어지며 전국으로 퍼져 갔"을 때 "전북에서 가장 먼저 투쟁을 시작한 곳은 택시 노조였다." 이러한 여세를 제조업이 이어 가면서 전북 지역의 민주노조 운동은 점화되었다. 이 중 기아특수강은 비타협적이고 강고한 투쟁을 벌인 전북의 대표적인 사업장이다. 1997년 부도가 나자 사측은 정리 해고를 실시하면서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103명의 정리 해고자 중 끝내 10명이 복직되지 못한 채로 남았지만 이들은 "줄기차게 투쟁"했고, 13년 후인 2009년 모두 복직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 운동사는 문정현이라는 매개를 통해 천주교와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도 하니, 덤으로 천주교 운동사를 읽어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이러한 서술이 불편할 수도 있고, 문정현을 천주교 사제라는 직분에 너무 한계 지운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정현을 다룬 첫 저작에서 문정현의 가장 큰 정체성인 신부라는 직분과 신앙을 들어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길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과분한 욕심일 수도 있다. 또한 암울한 군부 독재 정권하에서 천주교가 담당해 온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로서의 역할도 분명 존재하기에 천주교를 중심으로 시대를 읽는 건 시대를 아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의 순례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한다

 

이렇게 보니 다시 문정현이 보인다. 그 역시 비틀거리며 이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처음 사회에 대해 가졌던 분노는 정의나 옮음, 혹은 낮은 자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경찰이 감히 천주교 신부를 연행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는 국법을 지킨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나기도 했고, 3.1구국선언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장기수들과 첫 대면을 하면서 스스로도 반공 이데올로기에 갇혀 그들에게 무서움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고백하듯 "1966년 12월 16일 서품 이후 황태자로 살"아 왔기에, 세 끼 밥, 청소, 빨래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발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손녀뻘의 한 활동가는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건, 그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할 지를 알고 그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다시 강정마을로 떠납니다. 정부와 해군에 대한 분노보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보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강정 주민들의 절규가 내 가슴을 치고 내 몸뚱이를 제주로 향하게 합니다. 내가 그곳에 있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지 강정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주민들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빚진 듯 무거운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마도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고통받는 땅, 제주의 강정마을로 다시 떠납니다, <한겨레>, 2011년 7월 8일자)

 

그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세상을, 아직도 억압받고 빼앗기고 쫓겨나는 이들이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현장에 선다. 신부라는 이유로 늘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에, 그는 그런 자신의 특권을 지키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권을 인권으로 바꾸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전히 신부가 동부서 유치장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부는 우리가 만난 바로 다음 날인 8월 25일, 경찰이 강정마을 사람들을 연행한 것에 항의하다 체포됐다. 하지만 신부는 자신의 구명 운동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강정마을 주민들의 석방이었고, 사람들이 강정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후 검찰은 연행자들은 구속했지만 철저한 '외부 세력'이며 운동권 신부인 그는 불구속 조치하고 석방했다. 사제이기에 또 면한 최악이다. 해서 그는 풀려나자마자 다시 구럼비로 갔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섰다. "신부님은 최루탄, 지랄탄이 쏟아져도 도망가지 말고 그냥 눕자 그래. 난 차 앞에 드러눕는 건 겁 안 나는데 지랄탄은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도 신부님은 거기 그냥 계시는 거야. 그러면 도망 나왔던 우리도 할 수 없이 또 기어 들어갔지." 노동 운동가 박순희 선생의 말이다.

 

나는 현장에서 그처럼 우직하게 투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명망가가 초심을 잃고, 운동이 입신의 길이 되는 시대에, 그는 스스로 낮아져 광대가 되어 웃음을 주고, 억압받는 자와 고통을 나누며, 낮은 자와 함께 길 위에 선다. 그리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길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그는 시대의 존경을 받을 만한 신부다. 그가 있어 지난 나의 길 역시 두렵기보단 행복했다. 걷고 또 걷고 싶다. 그와 함께라면.

 

덧붙이는 글 | 유해정 기자는 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교육공동체 벗에서 펴내는 <오늘의 교육> 9, 10월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문정현, #문정현신부, #대추리, #강정마을,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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