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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0일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최종병기 활>은 그동안 축적된 사극영화의 노하우를 한껏 뽐내며,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올해 가장 빠른 속도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날아가는 화살만큼 빠른 속도로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는 <최종병기 활>은 역대 사극 중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을 비롯해 올해 한국 영화 개봉작 중 가장 빠른 속도로 300만 관객 돌파, 역대 사극영화 중 최단기간 400만 관객 돌파(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27일자 집계) 등 역대 한국영화의 흥행기록 과녁의 정중앙을 명중시키고 있다.

말 그대로, <최종병기 활>은 단 한 개의 화살(작품)로 올 여름 극장가를 관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든 김한민 감독은 몇몇 영화관련 인터뷰에서 "활은 우리 역사에 있어 수천 년간 단절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아이콘"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소재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고증을 철저하게 할수록 새로움이 보일 거라 생각한다"고 역사물의 고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피력하였다.

전통시대에 사용된 활쏘기 장비의 모습이다. 좌측 상단이 활잡은 손의 소매를 감싸는 습이고. 그 아래는 활을 담는 궁대와 우측의 화살이 담긴 시복의 모습이다. 이러한 활쏘기 장비는 기병과 보병 모두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고구려 때에도 위와 같은 활관련 장비를 사용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조선시대 동개 전통시대에 사용된 활쏘기 장비의 모습이다. 좌측 상단이 활잡은 손의 소매를 감싸는 습이고. 그 아래는 활을 담는 궁대와 우측의 화살이 담긴 시복의 모습이다. 이러한 활쏘기 장비는 기병과 보병 모두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고구려 때에도 위와 같은 활관련 장비를 사용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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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전통무예와 전쟁 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최고 장기인 활을 주제로 한 작품이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어서 그 기쁨이 남다르다.

그런데 역시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처럼 고증을 중요시 했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기에 <최종병기 활>의 인기에 '찬물'이 아닌 앞으로 더 발전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따스한 차' 한 잔을 권하듯 글을 쓴다.

영화 초반 역적의 자식을 거둬주는 부친의 죽마고우 '김무선'(이경영)의 활 쏘는 모습을 어린 조선의 신궁(남이 역, 박해일)이 아버지의 유품인 활을 손에 들고 유심히 살펴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김무선은 소매자락이 긴 학창 형태의 옷을 입고 활을 쏘는데, 이때 전통적인 활쏘기 보조도구인 '습(拾, 일명 활팔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전통 옷들은 주로 소매 깃이 넓어, 활을 쏠 때에는 이 부분이 시위에 걸리지 않도록 활을 잡는 손은 습을 이용해서 단정히했다.

만약 습을 착용하지 않을 경우, 시위가 화살을 밀어주지 못해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지 못한다. 이러한 방식의 활 보조기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요즘의 양궁 경기에도 궁사들이 이와 유사한 장비를 착용하고 경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습은 비록 크기는 작을지언정, 활쏘기를 할 때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이러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청나라 군사는 로빈훗이 아니다

다음으로 짚어 볼 문제는 청나라 군사들이 패용한 활쏘기 장비 중 동개에 관한 것이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활을 담는 궁대(弓袋)와 화살을 담는 시복(矢服)은 기본적인 장비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장비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티베트나 중국, 일본의 사수(射手) 병종에 반드시 지급된 것이었다. 특히 이 영화에선 동개에 대해서 외형적인 고증을 충실히 했으나,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고 패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웠다.

청군의 장수인 쥬신타가 움직이며 활을 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시복을 패용하는 문제로 인하여 두 번째 화살은 빠르게 뽑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장비는 제대로 고증을 했으나, 패용 방식의 문제로 인해 고증과는 약간의 거리가 보인다.
▲ 청나라 장수 쥬신타의 움직이며 쏘는 주사법 청군의 장수인 쥬신타가 움직이며 활을 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시복을 패용하는 문제로 인하여 두 번째 화살은 빠르게 뽑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장비는 제대로 고증을 했으나, 패용 방식의 문제로 인해 고증과는 약간의 거리가 보인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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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을 보면, 시복에 담긴 화살이 등 뒤에 수직의 형태로 매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화살을 패용할 경우 활을 쏘는 궁수는 자신의 어깨너머로 화살을 뽑아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주로 서양의 활쏘기 방식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청나라와 조선의 방식은 이렇게 등 뒤에 패용한 후 어깨 너머로 화살을 뽑는 것이 아니라, 시복을 허리(옆구리 부분)에 비스듬히 착용해서 화살을 허리 뒤에서 뽑는다. 이 방식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화살의 파손 유무를 직접적으로 살필 수 있고 안정적으로 화살을 패용할 수 있어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시복 패용방식의 형태는 비록 시복 없이 허리에 메는 띠의 형태로 변화하여 조선시대 한량의 활쏘기뿐만 아니라 요즘의 현대 국궁장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런대 영화에선 시복의 장점인 허리춤에서 화살을 빠르게 뽑아서 공격하는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겉은 멀쩡한데 내용은 없는 형태가 되버린 것이다.

청나라 기본 갑주와 전투장비인 환도 동개일습의 자료이다. 양측 모두 활살집인 시복에 화살을 비슷듬히 꽂아서 패용하고 있다. 이렇게 사선으로 화살이 위치해야만 빠른 재장전이 가능하다. 그것이 동아시아 동개의 장점이다.
▲ 청나라 군사의 기본 무장 청나라 기본 갑주와 전투장비인 환도 동개일습의 자료이다. 양측 모두 활살집인 시복에 화살을 비슷듬히 꽂아서 패용하고 있다. 이렇게 사선으로 화살이 위치해야만 빠른 재장전이 가능하다. 그것이 동아시아 동개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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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수가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활집과 화살집인 동개다. 활은 손에 들고, 화살 몇 개는 허리춤에 꽂고 이동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위 사진에서도 보듯이 사용한 안장이 전형적인 영국방식의 안장이 고증을 무시하고 사용되고 있다. 마상전투를 위해 조선시대에도 전교가 존재하는 방식의 안장이 청군과 조선군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 남이의 기마장면 궁수가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활집과 화살집인 동개다. 활은 손에 들고, 화살 몇 개는 허리춤에 꽂고 이동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위 사진에서도 보듯이 사용한 안장이 전형적인 영국방식의 안장이 고증을 무시하고 사용되고 있다. 마상전투를 위해 조선시대에도 전교가 존재하는 방식의 안장이 청군과 조선군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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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개와 관련해서는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은 청나라의 활쏘기 장비를 철저하게 고증했다고 했으나, 영화 중간 중간에 간혹 등장하는 조선군의 활쏘기 장비는 제대로 고증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특히 활을 담는 궁대를 등에 메고 그 안에 대충 활과 화살을 함께 넣어 달리는 조선군의 모습에서는 '고증'이란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관의 아들인 주인공인 남이(박해일)의 경우, 커다란 전통(화살통)을 메고, 허리띠에 활과 화살을 꽂아서 움직일 것이 아니라, 동개를 패용하고 움직였다면 청나라 군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조선 활장비의 우수성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오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실제로 조선시대 기병의 경우 동개 중 화살을 담는 시복에는 특수 화살인 편전(片箭, 일명 애기살) 15개, 일반용 화살인 장전(長箭) 20개를 기본적으로 장착할 수 있어 상당히 많은 화살을 전투 중에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 남이가 누이(문채원)를 구출하기 위해 말을 타고 청군을 추적할 때 고삐를 쥔 손에 활을 들고 화살은 허리띠에 꽂고 큰 전통을 등에 멘 모습에서는 결코 고증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동개는 기병들에게 필수적인 장비로 말을 탈 때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널리 사용된 것이다.

화살 깃이 두 개면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화살을 보면 특이하게도 화살의 깃이 두 개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전통시대 화살의 깃은 세 개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 바람과의 마찰 속에서 화살의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화살의 깃은 비행 중 공기저항을 일으켜 화살 뒷부분이 좌우로 요동치는 것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발사체의 자체 회전력을 증강시켜 안정적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이로(Gyro)효과를 일으켜 물체가 더 멀리 날아 갈 수 있게 한다.

본 영화에서 사용된 거의 모든 화살에 깃은 두 개 뿐이다. 고증을 철저히 했다고 하는 활 전문영화에서 화살의 실수는 치명적인 것이다
▲ <최종병기 활>의 활쏘기 장면, 문제는 화살의 깃의 숫자 본 영화에서 사용된 거의 모든 화살에 깃은 두 개 뿐이다. 고증을 철저히 했다고 하는 활 전문영화에서 화살의 실수는 치명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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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렇게 화살의 깃을 두 개로 사용할 경우, 한쪽으로 치우쳐 날아가는 경우가 쉽게 발생한다. 특히 영화에서 주인공 남이가 활을 쏠 때마다 살폈던 '바람'의 문제는 화살의 깃이 두 개일 경우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현재의 국궁이나 양궁 모두 깃이 3개인 형태의 화살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왕 이렇게 화살의 직진성 문제를 이야기했으니, 이 영화의 절묘한 활쏘기 기술인 '곡사' 부분도 함께 살펴보자. 마치 영화 <원티드>(2008,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브)의 고급킬러들이 구사했던 구부러져 날아가는 총알의 환상적인 모습처럼 <최종병기 활>에는 휘어지는 화살이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시위를 당기는 깍지 손을 비틀면서 시위까지 물고가서 화살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위 곡사의 형태로 보내는 기술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깍지손을 비틀어 쏘는 기법은 일명 '쪼는 사법'의 하나로 화살 자체의 회전력을 증강시켜 직진성을 증강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시위를 얼마나 비틀어 쏘느냐와 화살의 곡사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원티드>의 360도를 돌아오는 총알이나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 남이의 곡사는 영화적 상상력일 뿐인 것이다. 물론 간혹 가다가 화살이 곡사의 형태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예 앞촉이 없을 경우 혹은 화살의 깃이 아예 없는 경우로, 쏘는 사람도 어디로 날아갈지 판단이 불가능하다.

조선시대 사극에도 잉글랜드 방식의 안장 사용

필자가 소장 중인 조선시대 안장(큰 사진)과 청대 안장(좌측 하단)이다. 이처럼 안장의 앞과 뒤에 턱이 있어 기마자가 기사를 비롯한 다양한 마상무예를 하더라도 쉽게 낙마하지 않았다
▲ 조선 안장과 청나라 안장 필자가 소장 중인 조선시대 안장(큰 사진)과 청대 안장(좌측 하단)이다. 이처럼 안장의 앞과 뒤에 턱이 있어 기마자가 기사를 비롯한 다양한 마상무예를 하더라도 쉽게 낙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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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인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주력군은 기병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말과 관련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역사물 중에서 제대로 안장 고증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도 영국식의 안장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어 필자가 이전에 몇 차례 지적을 하기도 했다.

현대의 안장과 전통시대 안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안장의 앞뒤에 배치된 안교(안장 앞뒤의 턱)이다. 특히 안장의 앞부분은 전교(혹은 전륜)라고 해서 기마자의 체중이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높은 턱을 만든다. 이렇게 만드는 이유는 말을 타고 창이나 칼 혹은 활 등을 사용할 때 그곳에 하체를 의지해야 낙마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청나라와 조선 모두 안교의 각도가 삼국시대처럼 수직방식이 아니라 상당히 완화된 형태로 변화하였지만, 이러한 전교부분의 특징은 마상무예를 위한 필수적인 장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한 감독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시리즈의 형태로 사극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는데, 다음 영화에서는 이러한 안장의 문제를 반드시 풀어줬으면 한다. 마케팅비에 쏟아 부을 돈을 조금만 이러한 부분에 투자한다면 더 이상 사극에서 영국식 안장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TV의 사극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우리나라 사극 고증의 현실이다.

'발여호미'가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서 쏘라?

화가 김희겸이 그린 그림으로, 조선시대의 무신인 석천 전일상(1700∼1753)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본 그림에서는 매사냥을 위한 매와 환도 거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그림 중 대부분은 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본 그림은 매를 기르는 무신의 모습과 환도가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석천한유도(石泉閒遊圖) 중 일부 화가 김희겸이 그린 그림으로, 조선시대의 무신인 석천 전일상(1700∼1753)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본 그림에서는 매사냥을 위한 매와 환도 거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그림 중 대부분은 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본 그림은 매를 기르는 무신의 모습과 환도가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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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용한 전통적인 칼의 명칭은 환도(環刀)다. 그런데 이 칼의 대표적 특징은 몸에 패용할 때 칼집 고리를 이용하여 허리나 옆구리에 매는 방식이다. 따라서 환도를 패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부분 벽이나 기둥에 고리 부분(일명 띠돈)의 끈을 이용하여 사선으로 걸어 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환도의 거치 형태를 보면 일본도의 거치 방식처럼 좌대에 칼날이 하늘로 가도록 놓아두고 있다.

이는 이미 일본도의 거치방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칼의 보편적인 거치방식으로 새겨져 버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역사 속의 고증은 이러한 부분까지도 섬세하게 살피는 것이 묘미인 것이다.

또 영화에서 등장하는 활에 대한 격언 중 부친의 활에 씌여진 前推泰山 發如虎尾(전추태산 발여호미)에 대한 해석이 석연치 않다. 특히 두 번째 '발여호미'는 주인공 남이가 읊조리듯 "시위는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 쏘라"가 아니고 '쏠 때에는 호랑이 꼬리를 당기듯이 한다'라고 하여 집궁 8원칙 중 하나인 後握虎尾(후악호미)처럼 잡아 당겨서 쏘는 모습을 표현하는 활쏘기의 격언 중 하나이다.

만작의 개념은 화살촉 바로 뒤에 있는 상사지점까지 화살을 끌어당기는 것을 말한다. 현재 사진 속의 형태는 만작의 형태가 아니다. 그렇게 화살을 상사지점까지 밀어내어 정지하는 순간 '전추태산 발여호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 조선의 신궁 남이의 여동생의 활솜씨 만작의 개념은 화살촉 바로 뒤에 있는 상사지점까지 화살을 끌어당기는 것을 말한다. 현재 사진 속의 형태는 만작의 형태가 아니다. 그렇게 화살을 상사지점까지 밀어내어 정지하는 순간 '전추태산 발여호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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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활을 만작(화살을 걸어 최대한 당긴 상태)의 형태로 유지하다가 잠시 숨을 고른 후 발시를 하게 되는데, 이 순간 조금이라도 당기는 뒷손(깍지손)의 힘이 빠지게 되면 화살은 날아가기 전에 이미 만작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러한 격언이 생기된 것이다. 당연히 이 순간 앞손은 전추태산이라고 하여 태산을 밀어내듯이 버티고 있어야 뒷손이 호랑이 꼬리를 당기듯 제대로 당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조화가 깨져 뒷손이 호랑이 꼬리를 잡아 당기듯이 하지 못하면 화살은 일명 '여우짓'(화살이 시위를 떠나기 전 줌통 위에서 촉부분이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빗댐)을 하며 거리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만약 호랑이 꼬리를 너무 과하게 당길 경우는 '월촉'이라고 하여 화살의 촉이 활을 쥔 줌통 위를 가격하는 경우도 생긴다. 따라서 태산과 호미는 대칭 구조로 미는 형태와 당기는 형태를 조화롭게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서 쏜다'라는 기법은 필자 또한 활을 잡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금시초문이다. 이는 해당 격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서 빗어진 오류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적 맥락을 해치지 않는 소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더욱 치밀한 고증이 바탕이 되었더라면, 보다 진솔한 역사적 배경 위에 사실감 넘치는 픽션을 펼쳐낼 수 있지 않았을까.

조선 군사무예의 최고 장기는 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 방식 중 뒤를 돌아보고 쏘는 배사(背射, 일명 파르티안샷) 방식을 보여주는 필자의 사진이다. 이러한 기사(騎射)는 보사(步射)와 함께 조선군의 최대 장기로 인정받았다
▲ 기사법 중 배사(파르티안샷) 방식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 방식 중 뒤를 돌아보고 쏘는 배사(背射, 일명 파르티안샷) 방식을 보여주는 필자의 사진이다. 이러한 기사(騎射)는 보사(步射)와 함께 조선군의 최대 장기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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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사무예 중 최고의 병기로 인정된 것은 활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처럼 '최종병기 활'은 조선군의 궁극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주인공 남이가 구사하는 보사(步射, 서서 쏘는 활)뿐만 아니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나 기추(騎芻)방식도 조선군의 장기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영화에선 청기병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아쉽게도 주인공 남이는 단 한 번도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지 않는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꾸준하게 무과 대표 과목으로 자리매김 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기사장면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말을 타는 주인공은 있었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주인공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 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특히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과 그의 핵심세력에는 실질적인 무력을 통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북인 강경파와 무관들이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이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린 무관으로 묘사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착안된 설정이었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인한 북인 강경파와 무관의 몰락은 인조초반 발생한 이괄의 난. 그로 인한 청나라와 접경지역인 서북면의 전투력 상실이라는 현실과 더해져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굴욕사건을 빚어지게 된 것이다. 그 역사적 공간에 <최종병기 활>이 있다. 부디 앞으로는 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실 또한 투명하게 비춰볼 수 있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역사학 박사이며, 전쟁사와 무예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 http://muye24ki.com



태그:#최종병기 활, #무예사 고증,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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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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