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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탐구하여 천주교 신앙을 얻으신 선친 덕분에 나는 젖먹이 시절에 아무 수고 없이 '공짜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청년 시절 많은 의문과 고뇌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별다른 기복 없이 평생 동안 착실하고 올곧게 신앙생활을 해왔다.

본당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고루 맡아보았고, 사목회장까지 해보았다. 단 한 평의 땅도 갖지 않고 오로지 부부의 정직하고 빤한 수입으로 겨우 가계를 꾸려가면서도 본당의 새 성전을 짓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을 섰다.

고장에서 천주교 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디를 가든 손에 묵주를 쥐고 다니니 지속적으로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며 사는 셈이다. 또 여러 곳의 성지와 이런저런 교회 기관이나 단체들에 후원회원으로 참여하여 매달 일정 금액을 보내주고 있으니, 그런 쪽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천주교 신자로서 별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과연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기도 하고, 내 신앙생활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심각한 회의에 젖어들기도 한다.

성가를 부르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8월 15일은 가톨릭교회의 '성모승천대축일'과 대한민국의 '광복절'이 겹친 날이다. 이날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저녁 7시 30분 '생명과 평화와 인권'을 위한 '거리미사'가 거행되었다.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열렬하게 노래로 바치는 내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 제37차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의 한 장면 8월 15일은 가톨릭교회의 '성모승천대축일'과 대한민국의 '광복절'이 겹친 날이다. 이날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저녁 7시 30분 '생명과 평화와 인권'을 위한 '거리미사'가 거행되었다.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열렬하게 노래로 바치는 내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 전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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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금요일 저녁의 성가대 연습에 참여하면서 연습 도중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쉰 적이 있다. 내 한숨이 어찌나 컸던지 단원들 모두 놀라기도 하고 나를 돌아보며 웃기도 했다.  

연습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또래의 남성단원 교우 한 분을 그가 사는 변두리 아파트에 내 차로 태워다 주게 되었다. 아내는 내게 아까 연습 도중 크게 한숨을 내쉰 이유를 물었다. 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부산 '한진중공업'의 부당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안에서 180일이 넘게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눈물겨운 투쟁과 그 농성 투쟁의 기가 막힌 배경을 생각하면 내가 편안히 성당에 앉아 미사나 지내고 성가 연습이나 하는 것이 오히려 죄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야.

자본가의 탐욕과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삶이 하느님의 정의와는 너무도 먼 현실 속에서 그저 매양 평온하게만 이어지는 안이한 내 신앙생활은 과연 아무런 문제도 없는가? 이런 내 안락한 신앙생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연 무거운 의문이 가슴을 치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더군. 그래서 그렇게 신음처럼 크게 한숨을 내쉰 거야."

아내의 물음에 답변을 하는 형식이었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성 성가대원을 의식하여 명확한 어조로 자못 열렬하게 설명을 한 것이었다. 동료 성가단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모든 게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가 다행히 의문을 표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흑자 기업인 '한진중공업'의 부당한 대규모 정리 해고, 사업주는 한 해 수백억씩의 이익 배당을 챙겨가면서 노동자들의 권익 투쟁에는 쌍심지를 켜고 정리해고로 맞서는 자본가의 횡포, 그동안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으며 투쟁해온 그 눈물겨운 과정들을 보노라면 정말이지 성당에 가서 편안히 앉아 기도나 하고 있는 내 삶이 오히려 부당하게 느껴지고 죄스럽기만 한 겁니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폐해, 자본과 한 통속인 사이비 언론들, 아무런 철학도 능력도 없고 몰염치하기만 한 정권, 그런 문제 쪽으로는 전혀 눈을 뜨지 못하는 교회를 생각하면 내 신앙생활이 부끄럽게만 느껴지고 신앙 자체에 대해서도 큰 회의를 갖게 되지요. 

성당에 가는 시간에, 지금 당장 부산으로 달려가서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밤을 새우고, 그곳을 에워싸고 있는 게 떼 같은 경찰병력과 용역깡패들과 싸우는 것이 더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내 목소리에는 비분강개 같은 것이 있었고, 분명한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내 말은 그 '교우'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교우에게 그런 사실은 전혀 '현실'이 아니었고, 먼 곳의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그 교우를 그의 아파트 앞에 내려주며 또 한 번 이질감과 단절감 같은 것을 가슴 시리게 안아야 했다.

좋은 목소리로 '솔로'를 맡아 부르고, 타고난 노래솜씨로 모든 신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하는 그 교우에게는 왜 '의분'이 없을까? 왜 정의감으로 뜨겁게 달구어지는 가슴이 그에게는 없을까? 그것도 생각하면 참 모호한 일이었다.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무지와 무관심

언젠가 아내가 구역 소공동체 모임에 갔다 와서 내게 놀라운(?) 사실을 전해 주었다. 진행 순서를 모두 마친 다음 간단히 다과를 나누는 시간에 서울시의 초중고 무상급식 찬반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구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자매를 비롯하여 다수의 자매들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된 논리는 단 한 가지, "왜 이건희 손자에게도 공짜로 밥을 주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공짜로 밥을 주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무상급식에 찬성할 수 없다는 거였다.

서울시민이 아니더라도 '무상급식' 또는 '의무급식' 문제는 전국적인 관심사이므로 충남 태안의 아녀자들이 찬반 의견을 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터였다. 그런데 그 자매들은 "왜 이건희 손자도 공짜로 밥을 먹어야 하느냐"라는 한 가지 논법에만 철저히 매달려서 다른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의 한 부분인 '의무급식'과 관련하여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이야기들이 많건만, 그런 정보들은 접해본 적도 없고, 진지하게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그저 난공불락의 절벽을 대하는 기분이었다며 아내는 한탄을 했다.                      

신자들 다수는 '편안하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안온한 신앙생활이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에게는 4대강 파괴사업도 별 문제가 아니다. 여의도 거리미사도, 두물머리도 보이지 않는다. 제주도 강정마을도, 부산 한진중공업 사태도 시야 밖일 뿐이다. 교회언론들도 교회 안의 환한 하느님만 열심히 보여줄 뿐 교회 밖 저 험난한 광야를 헤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현 정권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는 방송매체가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고, 보수언론들이 기만과 오도와 왜곡을 일삼는 가운데 교회언론들마저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눈을 감으니 신자들은 그저 태평성대를 구가할 뿐이다.

'사랑'과 '정의'의 유리 현상 

8월 8일(월) 저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여의도 '거리미사'를 지내며 '생명과 평화와 인권'을 갈구하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나는 본당공동체 안에서 겪는 어떤 외로움과 슬픔 때문에 여의도 '거리미사'에 더욱 열심히 참례하는지도 모른다. '슬픔은 힘이고 희망'임을 믿기에...
▲ 제36차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의 한 장면 8월 8일(월) 저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여의도 '거리미사'를 지내며 '생명과 평화와 인권'을 갈구하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나는 본당공동체 안에서 겪는 어떤 외로움과 슬픔 때문에 여의도 '거리미사'에 더욱 열심히 참례하는지도 모른다. '슬픔은 힘이고 희망'임을 믿기에...
ⓒ 전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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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은 다분히 '평온함과 안락함의 온상'이다. '사랑'을 수없이 되뇌지만, 그 사랑에는 '정의'라는 것이 거세되어 있다. 사랑과 정의는 동전 하나의 양면 같은 것이지만, 동전 한 쪽에 '정의'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으니 다른 한 쪽의 '사랑'도 온전한 형태일 리 없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정의'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정의'를 외면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정의'를 얘기하면 사랑을 해치고 교회를 거스르는 행위로 간주한다. 사회정의에 관심을 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제들에 대해서 "본당 사목에나 충실할 것이지 성직자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며 자신의 잣대를 서슴없이 들이댄다.

나는 60 평생을 올곧게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사랑은 정의이고, 정의는 사랑이라는 신념을 줄기차게 유지해왔다. '의로운 분노'가 신앙의 한 가지 중요한 핵심임을 굳게 믿어왔다. 의로운 분노에 눈감고 사회정의를 외면하는 자는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한사코 고수한다.

사랑과 정의는 한 몸임을 깊이 인식하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신앙의 참 가치가 발현되고 거기에 각자의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좀 더 외롭고 더욱 고달프다. 교회 안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오로지 열심히 믿어서 현실적인 복도 얻고 천당도 가고자 하는 '충실한' 신자들로 채워져 있는 교회 안에서 나는 오늘도 외롭고 눈물겹다.

본당의 신자 배가 운동에 동참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정의 문제에는 눈감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신자 하나 더 늘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거운 회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 회의는 내 신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 쪽으로 유인을 하는 성싶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뜨겁게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생각, '슬픔이 힘이고 희망이다'라는 믿음으로 버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톨릭교회, #사회정의 , #사랑과 정의 , #교회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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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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