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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장마가 끝나고 이어지는 불볕 더위속에서도 화알짝 고개를 들고 피어나며 8월이 그들의 시간임을 알리는 멋진 꽃이 있는데 바로 연꽃과 수련이다. 긴 줄기 위로 수면 보다 높게 피어 나는 게 연꽃이고, 잎과 꽃이 수면에 붙어 피어 나는 것이 수련이다. 탁한 늪이나 연못의 진흙 같은 깨끗하지 않은 물속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빛깔과 고결한 자태로 인해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꽃이 되었다.

  

내게는 연꽃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모습이 볼적마다 흥미로운 대상이다. 초록 우산을 떠올리게 하는 하늘하늘 널따란 연잎은 빗물이 떨어질때마다 크고 작은 구슬로 만들어 연잎위에 영롱하게 맺히게 한다. 벌을 유혹하는 연꽃 가운데의 노랑 속살은 내가 노랑색을 제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열매가 알알이 들어찬 샤워기 같기도 하고 마이크 같기도 한 연밥의 생김새는 또 얼마나 이채롭고 재미있는지.  

 

연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과도 맞아서인지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연꽃 관광지가 포진해 있다. 그중 호반의 도시 춘천을 지나 화천의 너른 호숫가에 아름다운 연꽃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정확한 마을 주소와 이름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서오지리의 '건넌들 연꽃마을'이다. 마을 이름도 참 맘에 들고, 연꽃 마을에서 호숫가를 따라 더 들어가면 '신선이 다니는 길'이라는 '선로(仙路)'란 이름이 붙은 호반의 숲길이 있다니 햇살 따가운 여름날이지만 아니 가볼수가 없다.

 

지난 주말, 불화(佛花)를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간다하니 부처님이 도와 주셨는지 날씨가 불볕은 커녕 곧 비라도 내릴듯 몽실몽실한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지난 겨울엔 눈이 그리 내리더니 올 여름 내가 사는 중부지방은 내내 비가 그칠줄을 모른다. 자전거탄 등으로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이 그리울 정도니 원···

 

춘천 호반길에서 마주친 수몰된 마을의 흔적   

 

강원도 화천에 가려면 춘천을 거쳐야 하기에 경춘선 전철에 애마 잔차를 싣고 종점인 춘천역까지 달려간다. 춘천가는 기차가 전철로 바뀌면서 20여분 빠른 속도를 얻었지만, 여정의 즐거움은 고스란히 빼앗긴채 1시간 반 동안 사람들 틈바구니속에서 서서 가자니 자전거 페달을 밟기도 전에 다리힘이 다 빠진 기분이다.

 

종점인 춘천역에 내려 오리배가 평화로이 떠다니는 호수의 소양강 처녀 동상을 바라보는데 왠 청년들이 호수가에 앉아 기타와 북을 치며 요즘 인기있는 가수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I'm yours'를 신나게 부르고 있다. 친구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 중이란다. 내가 사는 서울 한강의 분위기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춘천 호반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낭만이 느껴지나보다.

 

소양2교 다리를 건너면 호숫가를 따라 주민들을 위한 산책로 겸 자전거길이 춘천댐 가까이까지 계속 나있어 호수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달리기 좋다. 고요한 호반길 옆 수목이 우거진 상쾌한 산책로를 지나가다 보면 진한 갈색의 날씬하고 재빠른 뱀이 S자로 횡단을 해 깜짝 놀라서 서기도 하고, 내 키만큼 자라난 수염이 성성한 옥수수들이 담장처럼 서있는 집들과 수영장이 있는 작은 테마파크, 보기에도 귀여운 인형극이 한창 공연중인 춘천 야외 인형극장 옆을 지나가면서 춘천 시민들의 주말을 엿보기도 한다.  

 

화천을 가는 중간 기점인 춘천댐에 다가 갈수록 호반의 경치가 발아래로 그림같이 펼쳐진다. 금방 비라도 내릴 듯 잔뜩 흐린 날씨는 호수 주변 산자락을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띠로 둘러치면서 한폭의 수묵화를 보여준다. 자전거를 멈추고 서서 안개 낀 호반의 경치 감상을 하고 있는데 넓은 호수위로 작은 풀등같은 게 섬처럼 올라와 있는게 아닌가.

 

수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 풀등을 본 순간, 댐을 만들면서 생긴 멋진 물안개가 피어나는 호수는 사실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터가 수장된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춘천댐·의암댐·소양댐 등이 생기면서 저지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을 것이고 저 아름다운 호수속에는 떠나간 사람들의 집과 다니던 길, 마을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겠지 생각하니, 짙고 푸르른 호수가 다시 보인다.

           

강원도의 힘이 느껴지는 춘천호반 도로

 

평탄하고 경치를 즐기며 달렸던 춘천 호반길은 춘천댐을 지나자 이것이 진짜 춘천호반길이라는 걸 보여 주려는듯 오르막 내리막길을 반복하며 자전거 여행자의 체력을 시험하게 한다. 다행히 급경사의 험한 고개들은 아니어서 자전거 라이딩이 지겹지 않고 재미있기도 하다. 특히 앞서 천천히 달리던 네발 스쿠터를 탄 정정한 동네 할머니 덕택에 차밖에 없는 삭막한 호반도로가 덜 힘들게 느껴졌다.   

 

호반 도로의 오르막 위에 가뿐하게 오를때마다 춘천댐에 막힌 풍성한 호숫물이 주변 산들의 초록 그늘에 물들어 어찌나 깊고 푸른지 보는 내 눈까지 초록으로 물들 것 같았다. 자전거 여행은 풍경을 창 밖으로 보는게 아닌 경치의 일부가 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내리면 비에 젖는다. 이래서 자전거 여행자에게 길에서 만나는 유명 관광지들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나 보다.

 

산허리에 구멍을 낸 짧은 터널도 지나고 춘천시 사북면 마을 앞 길에서 큰 솥단지에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직접 삶은 옥수수를 파는 한 아저씨는 길가에 잠시 멈추어서 물통의 물을 벌컥 벌컥 마시는 나를 보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시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신다. 그 표정과 눈속엔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했던 지난날 젊은 시절의 회상으로 가득하다.

 

마을 앞 호숫가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집같은 낚시 좌대들과 알알이 익어가는 어린 벼들을 손주보듯 허리굽혀 살피는 농부님들의 손길, 군부대 앞 정문을 지키는 초병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마주하면서 사북면 지촌리 지촌 초등학교를 지나니 마침내 건넌들 연꽃마을의 들머리 현지사란 절의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듯 절 입구에 약수터가 맞이해준다.

 

빗물을 예쁜 구슬로 만드는 마을, 건넌들

 

'복둥이물'이라고 써있는 절의 약수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저 앞의 화천 건넌들 마을에 들어선다. 이름부터 정감가는 건넌들 마을은 한때 화천에서 가장 넓은 들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그러나 들은 춘천댐이 들어서면서 죄다 수몰이 되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주민들이 지난 2003년부터 호숫가 습지에 연꽃을 심은 것이다. 

 

하늘하늘한 푸른 연잎이 펼쳐진 호숫가 뒤로 서있는 산자락에 연무가 춤을 추는 듯 시시각각 모양새를 바꾸고 있다. 운치 가득한 풍경을 감상하며 연꽃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선들이 지나 다닌다 해서 이름 지은 호수옆 숲길 '선로(仙路)'가 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이런 길에선 걸어가는게 길을 만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푹신한 흙길이다.

 

가을도 아닌데 추적추적 부슬비까지 내리니 더없이 고즈넉하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호숫가의 우중산책 길이기도 하다. 3Km를 더 걸어가면 야생화 정원이 있다는 원평리 동구래 마을 나무 이정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안 비가 하도 자주 내려서 동구래 마을 가는 길이 그만 진흙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온 장년의 부부는 연밥을 하나 땄는지 엄지 손톱만한 열매를 주며 까먹어 보라고 한다. 연꽃도 연밥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먹어보기는 또 처음이다. 아저씨는 별맛 없다고 하고 아주머니는 밤맛이 난다고 하는데 손톱으로 껍질을 밀며 먹어본 연밥의 맛는 아주머니의 말대로 밤맛이 나기도 한다. 건넌들은 가게도 없는 작은 마을이라 배가 고픈 나머지 연꽃에게 고맙다고 속으로 말하며 연밥을 몇 개 더 까먹었다

 

꽃도 꽃이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연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빗물이 떨어져 맺힌 물방울이 예쁜 구슬처럼 빛나 장인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 푸르른 연잎 밑에서는 어릴적 인기 만화에 나오던 개구리 소년 왕눈이와 친구들이 비가 반가운지 내가 반가운건지 개굴개굴 노래를 부른다. 연못을 가득채운 큼지막한 선홍색 빛깔의 수련꽃부터 작은 요정같은 노랑 어리연꽃도 앞다퉈 피어나고 있어 눈이 즐겁기만 하다.      

 

장마가 끝났다는데도 여전한 비소식에 눅눅하고 지루한 기분의 나날이었는데, 춘천 호반길에 이어진 화천으로 떠나는 여정도 즐겁고 수채화 같은 연꽃 마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없이 상쾌해진 하루였다.

 

 


태그:#자전거여행, #춘천호반, #건넌들, #연꽃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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