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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생활사 중심의 종합전시장이 될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하 역사박물관)이 10월 초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하여 지난 12일(금)에는 공사가 끝난 일부 전시실과 체험관을 돌아보았다.

 

 

군산시 장미동(군산세관 앞)에 들어서는 역사박물관은 부지면적 8347㎡(2530평), 연면적 4248㎡(1287평),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182억 원 투자)로 두 곳의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 한 곳, 어린이박물관 한 곳 등을 갖추게 된다. 

 

유물을 기증해준 시민이 생각보다 많단다. 박물관 관계자는 2011년 8월 초 현재 전시에 필요한 확보 유물은 4300여 점으로, 청소년회관향토자료실 물품은 1921점, 시민 기증 물품은 1820점(개인 26명/ 단체 2개소)이고 매입 물품은 139점(5개 업체)이라고 전했다.

 

대표 유물로는 제주 고씨 요여(영여), 토지 소송서류, 대한제국 시위대 칙령장, 조선은행 출근부 등으로 유물의 성격에 맞춰 이영춘 가옥, 구 조선은행 등 각 전시관에 전시될 계획이라고. 개관 전 목표량은 5000천 점으로 1회 전시에 300점 정도가 필요하단다.

 

역사박물관은 설계 당시 주변 근대건축물(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등)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연색상(금강하구, 바닷가, 하늘 등)으로 디자인 콘셉트를 잡고 최대한 인위적인 색을 지양, 재료 본연의 색상을 살렸다고 말했다.  

 

역사박물관 1층은 조운, 조창, 객주 및 해양문화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해양물류역사관(509㎡)과 어린이박물관(126㎡)이, 2층은 근대자료 규장각(82,5㎡), 3층은 근대기 영동상가와 내항 등을 재현한 근대생활관(617㎡)과 기획전시실(231㎡), 교육 세미나실(72,6㎡) 등이 꾸며져 있었다.

 

김중규(46) 군산시 학예연구사는 "1층 해양물류 역사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군산의 역사 개요를 전시하게 된다"며 "공주·부여 관문으로 백제 시대부터 시작된 군산의 물류유통 과정을 어린이 취향에 맞도록 꾸밀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 박물관은 "지역 특징을 최대한 살려 서해안 갯벌 생물과 어류 등을 설치스크린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서 "전시실에 설치된 현대조선소 크레인으로 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외지 학생들도 단체 체험이 가능하단다.

 

조선시대 군산창은 해양유통의 원조

 

 

1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1/3 크기로 재현해놓았다는 조운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주위에는 구석기·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돌칼, 돌도끼, 토기병, 항아리 등 다양한 토기류와 철기류, 골각기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군산시 성산면 여방리 고분군, 도암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군산 지역이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후 백제의 대내외 관문으로 발전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산성과 봉수대들은 당시 군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설명하는 듯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여덟 개의 봉수대와 열다섯 개의 성곽이 남아 있는 군산은 '산성의 도시'라며 조선 시대에는 중요한 수군 기지였다"고 부연했다. 이어 "백제 고이왕(272년~313년) 때 변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역사에 등장한 군산은, 백제의 수문역할을 했으며 조선 시대 군산창은 해양유통의 원조"라고 강조했다.

 

개항 이후 조선 빈민이 살았다는 '토막집'

 

일제강점기 조선의 빈민들이 산등성이에 짓고 살았다는 '토막집'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땅에 기둥을 세워 볏단으로 씌운 모습이었는데 김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에는 군산의 산비탈마다 이러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고 귀띔했다.

 

"개항 이후 군산 시내는 일인들 차지였고요. 조선인들은 산비탈에 '토막'이라는 움막을 짓고 살면서 남자는 부두와 거리의 노동자로, 여자는 일본 집 식모살이나 미선공으로 생활을 근근이 이어나갔습니다. 채만식의 <탁류>에도 나오지만, 이들은 한 푼이나 벌어보려고 콩나물을 길러서 팔았지요."   

 

김 학예연구사는 "언덕 비탈을 의지하여 오막살이들이 생선비늘 같이 들어선 개복동, 그중 꼭대기의 토담집,(생략) 명님이네가 도통 5원에 집을 빌려 건넌방은 먹곰보네에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는 대목을 인용하며 실감나게 설명했다. 노동력까지 착취당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삶을 추측하게 해준다는 것. 

 

1940년 9월 5일 해질녘 군산 시내 모습

 

일제강점기인 1940년 9월 5일 해질녘 시간에 시점을 맞춰 당시 군산 시내에 있던 건물 11채를 재현해 놓은 3층 근대생활관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직 마무리 공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전 군산으로 날아가 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영동상가 입구에 있던 홍풍행, 하나야 인력거 차방, 형제고무신 가게, 미두장, 내항 창고, 군산극장, 영명학교, 임피역, 군산역, 야마구찌 술 도매상 등의 입구를 재현해놓았는데 홍풍행, 내항 창고 등 몇몇 건물은 어렸을 때 봤던 실제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군산역 건물도 향수를 자아내게 했다. 1912년 3월 6일 호남선의 지선으로 군산선이 개통될 때 세워진 군산역은 그 모습이 외부에서는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1층과 2층이 트여 높고 넓은 대합실을 갖춘 큰 역이었다 한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북한의 평양역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는 것. 재래식 오일장이 서던 군산역 광장에는 군용 초소 모양의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고, 구형 수동식 전화기가 한 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 통화에 2전으로 통화시간은 제한이 없었단다.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박물관 건립은 원도심 지역의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는 사업으로 주변의 세관, 구 조선은행, 구 일본 장기 18은행 등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예술창작벨트 사업과 연계되어 그동안 소외되었던 원도심권이 근대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관을 달포 가량 앞두고 있는 군산근대문화전시관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를 기약하는 역사적 공간이며 노인과 어린이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지는 오락관이자 교육의 장이어서 가족동반으로 관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군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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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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