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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계백>.
 MBC 드라마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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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시니카, 즉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꿈꾼 수나라 양제(수양제). 무리한 대운하 건설로도 유명한 수양제의 세계정복 야망을 무참하게 수장시킨 것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었다.

서기 612년, 수양제는 위풍도 당당하게 113만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을 향한 진격에 나섰다. 수나라 군대의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맨 앞과 맨 뒤의 거리가 거의 1천 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황제를 따라나선 관료들의 행렬도 맨 앞과 맨 끝이 80리 거리였다.

이런 수나라 군대의 기세를 꺾고 그들에게 참패의 추억을 안긴 것이 살수 즉 청천강에서의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살수대첩에서 기가 꺾인 수나라는 뒤이은 몇 차례의 전쟁에서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니, 살수대첩은 세계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숨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인물이 있었다. MBC 드라마 <계백>에 나오는 백제 무왕(최종환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는 수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했다. 상국은 일종의 패권국 같은 개념이었다. 신하국은 상국의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로 인한 위신의 손실은 무역흑자로 보충했다.

일반적인 경우, 신하국이 조공을 하면 상국은 훨씬 더 많은 회사(回賜, 답례)를 지급했기 때문에, 신하국은 무역흑자를 챙길 목적으로 상국에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조공은 본질적으로 무역흑자를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도 대부분 다 그러했다. 별다른 이익도 없이 남의에 나라에 고개를 숙일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물었다.

백제 무왕과 백제 백성들이 살수대첩의 숨은 공로자?

이처럼 국제관계는 냉정한 것인데도, 조공국의 의도를 간과하고 그저 기분에 들떠 나라를 망친 통치자들이 있다.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조공국의 아첨성 발언을 곧이곧대로 듣다가 나라를 망친 군주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수양제였다.

612년 고구려 침공 당시 수양제가 위풍당당한 기세를 연출한 데는 나름대로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113만 대군도 듬직했겠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의지처가 있었다. 그것은 백제 무왕의 협공 약속이었다.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 권81 '동이 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 무왕(최종환 분).
 백제 무왕(최종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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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업 7년(611), 황제가 직접 고려(고구려)를 치려 하자, 부여장(무왕의 이름)은 신하 국지모를 시켜 출병 기일을 묻도록 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회사(답례)를 두둑이 한 뒤,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 함께 주관하도록 했다."

수양제의 군사계획을 확인한 무왕은 사신을 파견해서 출병 기일을 확인했다. 이것은 협공을 해주겠다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감동한 수양제는 백제에 2가지 이익을 제공했다. 하나는 조공에 대한 답례를 여느 경우보다 훨씬 더 두둑이 해준 것이다. 백제에 더 많은 무역흑자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군사기밀의 공유였다. 수나라 사신이 백제에 가서 출병 문제를 함께 주관하도록 한 조치는, 군사기밀을 공유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 해인 612년, 수양제는 무왕의 약속을 철석처럼 믿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를 움직였다. 그런데 믿었던 백제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이 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해에 (수나라의) 6개 군단이 요수를 건너자, 부여장도 국경에 군대를 배치했다. 말로는 (수나라) 군대를 돕겠다고 외치면서도, 실은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무왕은 수양제의 침공과 때를 맞춰 백제-고구려 국경지대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했지만, 그는 그냥 그것으로 끝냈다. 수양제의 기대와 달리, 그는 백제 군대에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출병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점령의 환상에 빠진 수양제의 심리를 이용해서 무역흑자도 늘리고 군사정보도 빼낼 욕심에서 그저 거짓으로 아첨을 했던 것이다.

무왕이 같은 부여족인 고구려를 돕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백제의 중립정책 덕분에 수나라와의 전쟁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백제가 동시에 협공했다면, 고구려는 훨씬 더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더라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과연 가능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그것이 가능했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 백성들과 백제 무왕도 살수대첩의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왕들의 기본 관심은 무역흑자와 안보뿐

 살수대첩 상상도. 출처는 중학교 <국사>.
 살수대첩 상상도. 출처는 중학교 <국사>.
ⓒ 교육과학기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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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역시 암묵적으로 고구려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따르면 무왕이 수나라를 돕겠다고 나선 시점에 신라 진평왕도 동일한 방법으로 수나라에 접근했다. 이는 신라 역시 수나라를 도울 것처럼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뺐다.

김춘추의 사대외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신라는 언제나 동족을 배신하고 외세를 지원한 것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신라는 외세로부터 실리만 챙겼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김춘추의 사대외교를 빌미로 오늘날의 대미 사대외교를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춘추는 신라 역사의 한 부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신라왕들의 기본 관심은 무역흑자와 안보뿐이었다. <수서>에 나타난 백제 무왕의 태도는 신라왕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 <계백>에서, 백제 귀족세력은 무왕이 중국에 끌려 다닌다고 비판하면서 그를 사대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수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왕은 한편으로는 중국을 돕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역흑자를 늘리고 군사정보를 빼내는 실리정책을 추구했다.

중국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좀더 당당하게 살 수 없었느냐고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백제의 경제사정이나 대외관계를 볼 때 그것은 지나친 요구다. 무왕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무왕을 포함한 백제·신라의 왕들이 일부 역사소설이나 사극에서 사대주의자로 묘사되는 것은, 작가들이 사료에 나오는 조공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물물교환이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료에 나오는 조공 기록만 보고 곧바로 사대주의를 떠올리는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던 조공, 관계 전제로 한 '물물교환'

중국 사료에서는 외국이 자국에 물건을 보내주는 측면만 부각시켰지, 자국이 외국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답례품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잘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료만 놓고 볼 경우에는, 이 세상에 중국만큼 위대한 나라는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한국 사료인 <삼국사기>마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중국 사료를 그대로 베낀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의 중국인들은 로마교황청도 중국에 조공을 하고 대영제국도 중국에 조공을 한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대가관계를 전제로 한 물물교환이었다. 그런 이익이 없었다면, 저 멀리 사는 영국인들이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그처럼 열심히 중국을 들락거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중국 간의 조공도 실은 그런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조공 기록에 담긴 중국적 세계관을 배제하고 좀더 객관적으로 역사를 관찰할 경우, 우리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라도 중국에 대해 실리 위주의 정책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양제를 돕는 척하면서 실은 무역흑자와 군사정보만 '달랑' 챙기는 동시에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음으로 지원한 무왕의 전략도 그 같은 실리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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