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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성장은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 과정이고 여자의 그것은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 과정인 경향이 있다.'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옮겨 적은 글이다. '폭력적 사회화'의 대표적인 예가 남자들의 군생활이다. 군대 갔다 오면 효자가 되고, 어른이 되고, 책임감이 생긴다는 말은 우리가 적응하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자신의 내면보다는 남의 시선에 민감하고 본능적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며, 함부로 앞에 나서지 않고 필요하다면 부당한 명령에도 기꺼이 무릎 꿇고 엎드려뻗쳐를 할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8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94년 3월 철원의 한 포병부대로 보내졌다. 함께 간 동기들 4명은 바로 보직을 받았지만 나는 한동안 포대 행정반에 대기했다. 본부포대 인사과에 제대가 임박한 병사 후임으로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부대 행정검열기간이라 잠시 같은 울타리를 쓰는 알파포대에 보내진 상태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당시엔 알파포대에도 전역이 얼마 안 남은 병기계가 있었는데, 알파포대장은 애당초 나를 본부 인사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결국 나는 알파포대에서 병기계로 제대했다.

다른 동기들이 주특기 교육도 받고 선임병들의 '신원조사'와 군기잡기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행정반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에서 같이 킥킥거린 동기들은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달라져갔다. 얼굴은 항상 붉게 상기된 상태였고 나와 눈을 자연스럽게 마주치지 못했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갑자기 정서불안의 소심한 바보들이 되었던 거다. 누군가는 바뀐 환경에 일시적으로 부적응한 모습이라고 하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게 바로 바람직한 이등병의 모습이라는 것을.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여유 있고 당당한 이등병을 고참들은 불쾌해하고 싫어한다.   

본부 인사과로 올라갈 팔자 핀 신병이었던 나는, 점차 알파포대 병기계 후임이 될 것이 확실해지면서 주특기 교육도 받았고 본격적으로 고참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다만, 내 동기들이 연병장의 후미진 포상이나 수송반 공구창고에서 끊임없이 선임병들의 사랑과 관심을 견디는 동안 나는 장교나 하사관이 있는 행정반에서 일을 배웠고 가끔씩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병기창고나 탄약고에 숨어 들어가 한숨을 돌렸다.

어느 날 저녁, 포반 병장들이 나를 찾았다. 기분 나쁜 미소로 나를 맞은 고참들은 이것저것 개인적인 질문들을 하다가 자기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시켰다. 20대 초반의 수컷들은 콧물이나 눈물에 정액이 섞여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동물들이지만 고참들 앞에서 그게 제대로 될 리는 없고, 그냥 몇 번 성기를 주물럭거렸다.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저항하길 기대한 고참들은 무심히 바지를 내리는 모습에 흥미를 잃은 듯, 됐다며 가보라고 했다.      

이등병의 군기는 나라와 가족을 지킨다는 자부심이나 사명감, 엄격한 규율과 훈련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짓궂은 고참들의 희롱이나 욕설 섞인 협박, 구타로 만들어진다. 순진하고 무능력한 간부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눈치 빠르고 유능한 간부들은 사고 나지 않는 차원에서 이런 상황을 방조하며 관리한다. 

힘든 시간이지만, 부대 울타리를 넘어 도망갈 정도로 용감하거나 무책임하지 않은 대부분의 이등병들은 결국은 참아낸다. 그러면서 뭔가를 배우고 또 잃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길은 아직 멀다.

일병 때의 집합과 구타는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등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이유와 바쁘고 힘든 훈련이나 부대정비 과정에서 생긴 고참들의 짜증 때문이다. 막사에서 연병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화장실에서, 막사 뒤편의 수돗가에서, 점호가 끝난 뒤 불 꺼진 내무반에서 말이다. 주로 일병 몇 호봉, 혹은 몇 월 군번 모여, 하는 식으로 전달되지만 일병들 전체가 호출되는 경우도 있다.

무섭고 불편한 집합이지만 어느덧 적응하기 마련인데, 1번 포상으로 모이라는 호출은 좀 부담스러웠다. 막사에서 가장 멀고 어두운, 1번 포차가 있고 쇳덩어리 공구들도 즐비한 곳에서는 좀 길고 심한 물리적 충격을 이겨내야 하니까.

지금도 참 이해하기 힘든 모습 중의 하나는 유독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시기에 집합이나 구타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군대에서도 그런 날은 즐거운 날이고 쉬는 날이어야 한다. 체육행사도 하고, 부대 자체적으로 특식이 나오거나 회식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날, 항상 해가 지면 호출을 하고 집합이 걸렸다. 아마 고참들이 외롭고 짜증이 나서였을 거다. 회식 때 마신 술 때문일 수도 있고.

상병이 되면 후임병도 많이 생겨서 그만큼 권력도 생기지만 책임도 커진다. 집합 당하는 거 못지않게 집합을 시킬 일도 많아지고 요령 있게 맞는 법 못지않게 효과적으로 때리는 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신뢰와 희생정신 위의 엄격한 규율과 자발적인 복종 대신에 구타와 욕설이 들어선 관계에서는 때려야 부대가 돌아가고 맞지 않은 후임병들은 나태해진다.

가끔씩 감출 수 없는 구타사고가 일어나지만 민주화된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더 이상 구타나 폭력은 없다. 군대에 적응 못하는 약하고 나태한 후임병과 폭력적인 선임병이 간간이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씩씩한 사람들은 여전히 구타(혹은 사랑의 매)는 필요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선생님들처럼.

병장이 되면 해방이다. 선임병장이 후임병장을 때리거나 집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있어도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일 뿐이다. 깐깐한 간부들이 병장들을 닦달하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후임병들만 피곤해진다. 제대가 임박한 병장들은 무책임해지고 어리광만 는다. 사소한 불이익이나 번거로움에 심하게 짜증내고 잠만 자고 술만 먹으려고 한다.

다행히, 나는 군대 선후배들과 잘 지내며 몸 건강히 제대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할 기회였다. 조금 어른스러워졌고 자식으로서 책임감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세상 물정도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떠들 술자리 무용담도 제법 생겼고 제대 무렵엔 자주포와 각종 화기들을 이용한 추억용 사진도 수 백장 넘게 남겼다. 병장 때는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제법 읽었다. 하지만 술자리 무용담에도 좀처럼 올리지 않고 추억용 사진으로 절대 담을 수 없는 일도 많았다. 그런 얘기들을 해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핑계 대고 숨을 행정반이 있었고 병기창고와 탄약고가 있었다. 동기도 네 명이나 있어서 서로 의지하고 도울 수 있었다. 제대할 때까지 후임병들 몸에 손을 안대고 욕을 안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성품이 착해서가 아니라 다른 동기들이 대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지할 동기들도 없고 숨어서 한숨 돌릴 공간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사고를 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사회도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의 수준을 군대가 반영한 것인지, 군부독재 시절의 병영문화가 사회를 오염시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군대에서, 사회에서 목숨을 잃거나 낙오하는 이들이 있다.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다. 나도 군생활 해봐서 알고, 요 모양인 사회에서 그럭저럭 살아남은 자로서 하는 말인데, 그건 당신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절대로.

덧붙이는 글 | 병영구타의 추억 기사 응모



태그:#군대, #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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