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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집 떠나 열차 타고 가 닿은 곳. 아침 기상나팔 소리와 동시에 "강아지" "송아지" "x팔" 욕나팔 들으며 잠 깨던 곳. 눈 뜨고 제일 먼저 오늘 하루도 제발 맞지 않고 넘어가기를, 허겁지겁 기도하던 곳. 얼굴을 맞으면 꼭 영혼을 맞는 것처럼 절망(絶望)스러워, 다른 곳 다 맞아도 좋으니 얼굴만은 맞지 않기를, 내 영혼의 주인께 절망(切望)하던 곳. 그리고 그 기도는, 태권도 정권에 맞아 바스라진 기왓장처럼, 언제나, 무참히 박살나던 곳.

군대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2년 2개월을 나는 무사히, 건너왔다. 한때 인터넷에서 대단한 격언처럼 유행하던 어떤 말처럼, 그래, 그 또한 지나갔다. 지나왔으니, 지금 이렇게 꿈에 그리던 민간인으로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된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맞지 않기 위해 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기어코 복종과 굴욕에 익숙해진 그때의 시간들을. 그곳은 열정으로 가득했던 20대 초반의 내게, 굴종의 윤리를 문신처럼 아로새긴 곳이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 동생과 함께 빨래를 갤 때의 일이다. 동생이 나를 보고 갑자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내가 옷을 갤 때 자꾸만 씩씩거리며 손을 바들바들 떤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나는 정말로 옷을 접으면서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동작뿐만 아니라 내면도 뭔가에 쫓기듯 굉장히 급하고 불안했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군대에서 익힌 버릇이란 걸 깨달았다. 티셔츠나 바지 등의 옷을 개고 쌓아두는 방식도 군대에서 배운 그대로였던 것이다.

내가 다녀온 부대에는 관물대 정리에 집착하는 특이한 병영문화가 있었다(육군 최정예부대라는 수색대에서 왜 그깟 관물대 정리에 민감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다). 당시 우리 부대의 관물대는 요즘의 철제식 관물대가 아닌 오픈형 나무 서랍장. 사생활 보호 같은 건 소대장에게나 줘버리고 오로지 한쪽에는 전투복․활동복 등의 옷을, 한쪽에는 세면도구 등이 담긴 분홍색 바구니를 수납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이러한 오픈형 관물대는 또 다른 병영 가혹행위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관물대 정리 중 가장 고역인 것은 옷 정리였다. 세면도구 등이야 까만색 세면백에 집어넣은 후 바구니에 담으면 끝이었는데, 전투복·활동복 등의 옷 정리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정확히 센터를 맞춰서 접어야 했고, 줄과 각에 신경 써야 했다.

한날은 당시 이등병이던 내 관물대 정리 상태 때문에 중대원 50여 명이 전원집합을 당하고 원산폭격 기합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의 일은? 나의 바로 윗고참은 그 윗고참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수차례 구타당했다. 나는 그 장면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해야 했고. 내 윗고참은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그래서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대신 내 관물대 안의 사생활(?)들을 온통 바깥으로 쏟아 부은 후 (콰당탕탕!) 다시 정리시켰다.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중대원 50여 명이 혀를 끌끌 차거나 이죽거리는 중에, 나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바들바들 떨면서 옷을 갰다. 그렇지만 도대체 합격의 기준은 무엇인지, 다른 고참들 관물대 상태에 비해 외려 상당히 괜찮은 내 관물대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취침 소등 이후에도 윗고참의 플래시 불빛 아래서 정리는 또 다시 이루어졌다. 10여 차례의 이 같은 난리 이후 나는 겨우 합격점을 받고 잠들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어디 고참들에게 맞던 이유가 관물대 정리 문제뿐이었겠는가. 나는 사실 제대한지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군대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생각 안 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아마도 내 내면의 방어기제 덕분인 듯싶다. 그거 기억해서 뭐해, 아프기만 한데. 그래 좋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섬뜩해지는 것은 마음껏 맥주를 들이켜고, 닥치는 대로 불온서적(?)들을 탐독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때의 윤리가 몸 깊숙이 배어 작동하고 있을 거란 걱정 때문이다. 맞지 않기 위해 익힌 그때의 처세가, 맞을까봐 떨던 그때의 불안이, 내가 취하는 표정, 동작, 움직임 하나하나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살아 움직이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하니, 아찔해진다.

사실 대학 1학년 때부터,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은 분명 어딘가 달라 보였다.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봤자, 겨우 두세 살 차이였지만 뭔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 저들과 우린 뭔진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게끔 결론짓게 했다. 뭔가 흉하게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고 뭔가 굉장히 제 자신을 속이고 있는 듯보였다.

그들이 그저 주는 거 없이 미워서, 입대를 미루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지만, 또 제대 후에도 인권과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관련 책들을 열심히 훑었지만, 나라고 다른 제대자들과 크게 다를까 싶다. 몸은 보수 머리는 진보. 이 무한 도돌이 되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병역을 필한 내 이야기고 많은 군필자들의 현실이라면 과장일까.

글쎄, 매번 제 욕망 포기 않고 악질 고참들이나 병영악습과 열심히 맞서 싸웠다면, 그래서 영창 수십 번 끌려가고 했다면야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군복무 기간이 다소 줄었다고 하지만, 가장 혈기왕성한 시절 보내는 2년가량의 기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인격이나 가치관 형성에 가장 적합한 시기이고 가장 적당한 기간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보수적 사회를 '위험하게 할(?)' 책들을 읽으며 가장 뜨겁게 토론하고 행동하는 시기에 한국의 젊은 사내들은 군대에 끌려가 맞지 않으려면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따라야 함을 익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해 각자 몸으로 체득한 그곳의 윤리를 복창한다.

요즘 나는 옷을 부러 군대에서 배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갠다. 그러면서도 손을 떨지 않으려고 흡사 명상하듯 굉장히 의식을 집중하고 되도록 천천히 옷을 접는다. 그래야 손을 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애써 고치고 도려내고 박멸해야 할 습(習)들이 내 안에, 내 자취방의 바퀴벌레들처럼 너무 많단 걸 잘 안다. 문제는 녀석들이 진짜 바퀴벌레들처럼 존재는 하되 인식은 잘 되지 않는단 거다. 여기저기 병균만 옮기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글입니다.



태그:#병영 구타의 추억, #군대 폭력, #군대 가혹행위, #몸은 기억하고 있다, #관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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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반려견 '라떼'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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