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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보험에 대한 토론에서 청중이 자신의 의견을 종이로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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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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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푸른 초원과 그림 같은 숲. 야트막한 언덕배기 하나 보기 힘든 핀란드의 전형적인 지형이 펼쳐진다. 핀란드 투르쿠에서 포리로 향하는 길. 한적한 도로임에도 140킬로미터를 곧이곧대로 두 시간 좀 더 넘게 걸려 운행하는 정직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고속버스인데도 승객이 도중에 벨을 누르면 아무리 조그만 시골 간이 정류소에서도 세워주는 소수에 대한 배려와 같은 핀란드 사회의 특징들이 가는 내내 기자의 시선에 들어왔다.

인구 8만 2000명의 작은 해안 도시 포리가 해마다 7월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올해로 46회째를 맞은 포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을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포리 재즈티벌은 그중에서도 인지도와 역사 면에서 최고의 페스티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핀란드인들은 대개 한 달 정도 여름휴가를 보낸다. 바쁜 일상과 도시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소박하게 지어진 께사 모끼(Kesämökki, 여름 한철 지내는 오두막으로 보통 바닷가나 호숫가에 있다)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고 사우나와 수영을 반복하며 지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핀란드인들의 여름 휴가법이다. 그러나 조용한 휴가를 좋아하는 핀란드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축제가 벌어지는 곳을 찾아 때로는 낯선 이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필요한 모양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수오미 아레나(Suomi Areena)라는 사회 대토론 행사이다. 이 행사는 2006년 처음 시작됐고, 6년째를 맞은 올해는 7월 9일부터 15일까지 일주일간 포리 시내 곳곳에서 90개의 토론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정치인, 교수, 기자 등 각계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올해의 토론은 사회 보건 서비스와 연금 같은 사회복지 관련 주제, 고등학교 교육 개혁과 같은 교육 문제, 세금 제도, 이주노동자, 성 평등, 노동조합, EU, 에너지와 환경 문제부터 음악, 문학, 철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휴가와 사회 토론,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동거

7월 한 달은 핀란드의 열두 달 중에서 '천국'이라 불리는 시기다. 대부분의 핀란드인이 이때 4주 정도의 휴가에 들어간다. 휴가 기간에 즐기는 사회 대토론. 언뜻 생각하면 참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어떤 의도로 수오미 아레나를 기획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담당 프로듀서 중 한 명인 헬리 우시마(Heli Uusimaa, MTV3 방송국 소속)는 "7월은 핀란드 사회에 뉴스거리가 별로 없는 시기다. 그래서 우리가 뉴스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또, 언론은 그 사회의 여론 생성을 유지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쿨하게' 대답했다. 순간 뉴스거리는 차고 넘치지만 제도권 언론이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한국 사회를 떠올렸다. 특정 유명 인사들이 사회적·정치적 신념 때문에 방송 출연에서 배제되는 현실도 함께. 그런 점에서 포리 시와 함께 수오미 아레나를 기획한 MTV3는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사회 담론 생성이라는 언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리 우시마는 이어 "사회 대토론과 휴가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휴가 기간은 사람들이 사회 문제를 토론할 시간이 더욱 많은 시기"라며 "저녁에는 재즈를 즐기고 오전에는 1시간 15분 정도(각 토론 프로그램 소요 시간) 다소 심각한 토론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휴가 계획"이라고 답했다. 여름휴가를 한 달씩 보내는 사람들과 휴식의 중요성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대답에서 느껴졌다.

사실 이 기발한 상상력은 스웨덴의 '알메달렌 주간(Almedalen week)'이라는 행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웨덴은 이미 1982년부터 고틀랜드 섬 비즈비 시에 위치한 알메달렌에서 해마다 7월 첫 주에 정치 토론과 세미나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열고 있는데, 이는 정치 분야의 록 페스티벌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정치인, 시민사회단체 종사자,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교류하고 있다. 

헬리 우시마는 "스웨덴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긴 했지만 우리 식대로 (행사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40년 넘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포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밝혔다. 북유럽형 복지 모델을 창안한 스웨덴, 그리고 스웨덴으로부터 현재 핀란드 공교육의 꽃이라 불리는 종합학교 모델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벤치마킹하고 그것을 다듬어 자기 식으로 발전시킨 핀란드는 이웃이자 생산적 라이벌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부터 보수까지 총출동했다. 사회민주당, 참핀란드인당, 중도당, 국가연합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포리에서 열린 수오미 아레나를 찾아 사회 보건 서비스 분야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진보부터 보수까지 총출동했다. 사회민주당, 참핀란드인당, 중도당, 국가연합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포리에서 열린 수오미 아레나를 찾아 사회 보건 서비스 분야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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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국가 핀란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생각은?

통역도, 영어로 제공되는 보도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제일 처음으로 기자의 눈에 들어온 프로그램은 '사회 보건 서비스 분야,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이었다. 한국에서도 복지 담론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복지병 혹은 포퓰리즘이라는 보수층의 비난이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던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노력하여 북유럽형 복지 시스템을 정착시킨 나라의 시민들은 복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밤에는 야외 재즈 공연 장소로 쓰이는 토론 행사장은 나들이 차림의 중장년층 청중으로 이미 꽉 차 있었다. 토론자로 핀란드의 주요 정당을 대표하여 사회민주당, 참핀란드인당(True Finns' party), 중도당, 국가연합당(National coalition party) 출신의 국회의원 두 명과 장관 두 명이 나왔다. 지난 4월에 총선이 치러지고 각 정당들의 정치적 위상이 재편되면서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정책 향방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워 보였다.

핀란드 중부에 위치한 위바스킬라에서 왔다는 50대 남성은 의료계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사회 보건 서비스 분야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이번에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포리에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토론 행사와 관련하여 <헬싱키타임스>는 7월 15일자 신문에서 "앞으로 사회 보건 서비스 분야의 불필요한 관료 체계를 축소해 예산 낭비를 막을 것이지만 현재 수준을 넘어선 더 이상의 사영화(privatization)는 추진되지 않을 전망이다.", "핀란드는 이윤을 위해 의료 보건 서비스를 판매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국가연합당 소속 빠울라 리시꼬(Paula Risikko) 및 사민당 소속 마리아 구제니나 리처드슨(Maria Guzenina-Richardson) 보건사회부 장관의 발언을 보도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법한 젊은 세대에게 사회, 보건 복지 분야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쿠오피오 출신의 아이노 시르야넨(사회복지 분야 대학 연구원)과 라우마에서 온 요한나 바이닐라(유치원 교사)는 평소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s)원으로서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이번 행사를 알게 되어 왔다며 여러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이들은 "공공영역만으로는 사회 복지 서비스를 모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민간 영역과 시민단체 영역도 필요하지만, 핀란드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공공, 민간, 시민단체 영역이 질 좋은 서비스를 유지하도록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 미국 같은 나라들과 다른 점"이라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국가에서 사회, 보건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 '이 모든 복지 제도 운용을 위해 세금을 많이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은 혹시 없느냐'는 질문에 "세금이 많긴 하지만 소득이 많은 자영업자들이나 기업가들에 비해 나는 세금을 적게 내는 편이다. 복지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납세가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낮에는 토론 장소로, 밤에는 재즈 공연장으로 쓰이는 야외무대에서 청중이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낮에는 토론 장소로, 밤에는 재즈 공연장으로 쓰이는 야외무대에서 청중이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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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도 포리에 들러

올해 수오미 아레나는 작년에 비해 내용과 규모 모두 한층 성장한 느낌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토론자로 참석한 가운데 9명의 장관과 50여 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 핀란드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토론회 참석을 위해 7월 15일 포리를 찾았다. 토론은 요르마 올리라(Jorma Ollila) 노키아 이사의 사회로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 시간 반 정도 영어로 진행되었으며 할로넨 대통령과 반 사무총장은 환경, 사회, 경제 분야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이날 토론회는 17일 MTV3 채널을 통해 핀란드 전역에 녹화 방영되었다.

반 총장은 사회 분야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질문에 "각국의 GNP가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절대적 잣대는 아니"라며 "부탄에서는 국가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를 지표로 활용하고 있듯이 다른 나라들도 국민의 행복(well-being) 향상 정도를 보여주는 다양한 지표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또, 반 총장은 앞으로 전 세계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뤄지려면 "하늘의 절반(half the sky)"인 여성의 힘을 극대화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 총장은 자신 또한 사무총장으로서 UN 내에서 의사결정과 관련된 중역에 여성을 대폭 임명하고 있다며 성 평등을 힘주어 말했다. 여성인 할로넨 대통령과 청중은 이에 뜨겁게 호응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 시민들이 행사장 바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보기 드문 광경도 연출되었다. 두 딸을 데리고 온 40대 여성은 "한 달 정도의 휴식은 내 삶에 꼭 필요하다. 지금 휴가 중인데 수오미 아레나와 포리 재즈 페스티벌을 함께 즐기고 있다. 휴가는 직장 업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고, 딸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며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복역 중인 수감자들에게도 교도소를 벗어나 여름 휴가를 즐길 권리를 보장해 주는 핀란드에서 여름철의 충분한 휴식은 누구나 누려야 할 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할로넨 대통령은 16일 반 총장 내외를 대통령 여름 별장에 초대하여 자연과 벗하는 핀란드식 휴가를 함께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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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덜 갖고, 좀 더 느리게

기자도 취재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재즈 공연을 본격적으로 즐겨보기로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핀란드에서도 여름 내내 록부터 클래식까지 수많은 음악 공연들이 열린다. 해가 짧고 추운 겨울이 길게 이어지는 이곳 핀란드에서 여름은 곧 푸름이고 휴식이며 음악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내게 휴식하면 떠오르는 장르는 재즈다.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의 '이파네마의 여인' 같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그늘에 매달린 해먹 하나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큰맘 먹고 찾은 대형 공연에선 재즈의 여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포리 재즈 페스티벌이 명성을 얻으면서 관객을 모으기 위해 너무 쉬운 길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즈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가수의 발성과 동작이 뒤섞이고 장르가 재즈인지 팝인지 헷갈리는 가운데 벌써 술에 취해 무대 바로 밑에서 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도 보였다. 거대한 야외 공연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미리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술과 안주를 부지런히 비워냈다.

야외 재즈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야외 재즈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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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을 빠져나와 길을 걷다 보니 무료 공연이 눈에 띈다. 재즈 보컬의 간드러지는 스캣(재즈에서 목소리로 가사 없이 연주하듯 음을 내는 창법)과 세션맨들의 즉흥연주(improvisation)를 들으니 이제야 재즈 같고 마음엔 자유가 찾아들었다. 담벼락 너머로 야외 테라스 무대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스윙과 달콤한 보사노바는 여름철 휴가지의 게으른 분위기를 한껏 살려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유명한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이 남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If you have to ask what jazz is, you'll never know." (당신이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면, 당신은 절대 모를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는 찾아보기 힘들고 서바이벌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 학생도, 어른도 한 가지 정답만을 강요받는 한국인에게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구절로 느껴졌다.

취재 중 기자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노동만큼이나 휴식의 중요성을 존중해줄 줄 아는 핀란드 사회의 분위기였다. 그렇게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덜 갖거나 공공재로 함께 누리고, 좀 더 느리게 살 줄 아는 사회라야 느긋하게 휴가지에서 정치 토론을 즐겨보겠다는 상상력도 싹틀 테다. 명품 가방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고, 아이 하나 키우는 데 2억 원이 넘게 들고, 인구 1000만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나누어 갖고 더 많이 쉬는 삶은 그저 순진한 꿈일까.

하지만 복지 담론, 행복 담론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도 지금부터 삶의 질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사회를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제주도에 군사기지 대신 야외 공연장을 지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재즈 공연도 즐기고 사회 대토론도 즐길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올해로 46회를 맞은 포리 재즈 페스티벌에서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올해로 46회를 맞은 포리 재즈 페스티벌에서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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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핀란드, #휴가, #토론, #포리 재즈 페스티벌, #수오미 아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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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중입니다. 딸들의 나라, 공교육의 천국이라고 하는 핀란드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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