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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밤늦게 혼자서 택시를 타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누군가 뒤에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뛰어야 했습니다. 어두운 밤 귀갓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저에게 위해를 가할 것만 같아 공포에 질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하철, 버스가 혼잡한 시간에는 혹시나 성추행을 당하지 않을까 잔뜩 몸을 움츠립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최근에 고려대 의대생 3명이 같은 반 친구를 집단 성추행했고, 학교 측의 비정상적인 늑장대응이 알려지면서 누리꾼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지금 가해자들이 유명 변호사들을 선임하며 책임회피를 꾀하는 가운데, 학교 앞에서 가해자들의 출교를 요구하는 '1인 슬럿(Slut) 릴레이 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성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성폭력을 당한 노래방 도우미 출신 여성이 판사의 모욕적인 질문에 수치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트윗을 중심으로 한 젊은 여성이 '슬럿워크(잡년행진) 코리아를' 제안하자 트위터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폭력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여성의 '옷차림'이나 '행동'에 있다며, 책임을 전가해온 오랜 가부장적 편견을 조롱하는 이번 '슬럿워크'는 다양한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속이 후련하다', '재밌고 신선하다' 등과 그것 역시 여성의 '성 상품화'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로 엇갈리는 상황입니다.

세계적인 시위문화 '슬럿워크(잡년행진)',  이번 주 토요일 한국상륙

슬럿(Slut)이란 '매춘부', '헤픈여자'라는 뜻으로, 여성들이 일부러 '야한' 옷차림을 하고 도심을 행진하며 시위하는 '반 성폭력' 운동입니다.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여성은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옷차림을 조심해야 한다'는 발언에 분노한 캐나다 여성들이 먼저 시작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북미 20여 개 국과 인도, 멕시코 등 세계 각국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열렸고, 이제 오는 16일 한국에서도 '슬럿워크(잡년행진)'가 열릴 예정입니다. 16일 오후2시 6호선 안암역2번 출구에 모입니다. 이번 '슬럿워크(잡년행진)'는 고려대학교 당국에게 '가해자 출교'를 요구하며 고려대학교 캠퍼스도 행진할 예정입니다.

7월 16일(토) 잡년행진의 자세한 경로와 프로그램, 공연 출연진
▲ 잡년행진 웹자보 7월 16일(토) 잡년행진의 자세한 경로와 프로그램, 공연 출연진
ⓒ 슬럿워크 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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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 자기검열과 스트레스, 극에 달해 더는 못 참는다

남성은 여성이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에 따라 결코 참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고야 마는 그런 '하등동물'이 아닙니다. '남성은 성욕을 참을 수 없는 존재다'라는 오랜 통념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입니다. 대다수 남성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기본적인 밤거리 (낮을 비롯하여) 안전과 자유는 잘 보장되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엄청난 검열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에 여성들은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가해자들이, 그리고 판사가 여성들의 옷차림까지 일일이 시비를 걸며 처벌을 무마하려고 할 것인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여기저기서 희생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폭력 생존자에게는 엄청난 '2차 가해'입니다.

잡년행진 포스터
▲ 잡년행진 포스터 잡년행진 포스터
ⓒ 잡년행진 운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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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여성잠언>을 공연중인 배우 강김수현(레드걸)
▲ 연극배우 강김수현(레드걸) 공연장면 연극 <여성잠언>을 공연중인 배우 강김수현(레드걸)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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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가 즐기는 프로그램과 다양한 문화공연 풍성

행진의 코스는 고대-광화문-홍대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입니다. 저는 광화문에서 오프닝 퍼포먼스를 펼칩니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싶습니다. 

이 행사를 지지해 주시며 후원해 주신 돈은 행사 진행비를 제외하고 '고려대학교 성폭행 사건 대책위'와 '현대 성희롱 대책위'에 전달될 예정입니다. 이 파격적인 행진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비칠지는 당일날 가봐야 알겠지요.

'실험정신'에는 '실패'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확신하는 것은 이 저항이 한국사회에 다양한 논쟁을 제공하며, 한국사회의 여성문제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거라는 점입니다.

그동안 우울해 하셨던 여성분들, 그리고 남성분들이여! 이 행진에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미 동참하시는 분들은 그리 적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게재했습니다.



태그:#잡년행진, #슬럿워크, #레드걸, #강김수현,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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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아티스트. 배우. 작가. 무대쟁이이자 글쟁이. 연극(예술)치료사. 읽고 쓰기, 여행, 연극, 전위예술. 아방가르드, 맥주를 좋아한다. 현,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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