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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좋은 날 오후, 집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입술에 거품을 잔뜩 묻히며 마셔야 하는 카푸치노 대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도 충분하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거나, 친구를 만나 소소한 수다를 나누는 한적함. 매장 안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적절한 선곡의 음악과,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곁눈질 따위는 즐거운 여유를 더해 준다.

사르트르는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만큼 카페란 매력적인 공간이다. 헤밍웨이, 보부아르, 피카소 볼드윈, 카뮈…….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파리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모여서 토론을 하곤 했다.

21세기의 서울에서도 카페는 재미있는 곳이다.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2층 카페의 창가도 괜찮고, 사장님과 농담 따먹기 할 수 있는 분위기의 작은 카페도 좋다. 나는 매일 카페에 간다. 다른 손님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남들 사는 모양을 엿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된다. 사람들은 카페에 와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고, 공부도 하면서 한가한 초여름의 시간을 소요한다.

단연, 오늘날 카페와 그 카페 안에서 형성되는 문화는 대한민국의 골목골목 파고들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언제부터 카페가 이렇게 대중화됐을까? 카페가 없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사람을 만났던가? 무엇보다, 데이트는 어디서 했을까? 빵집?

스타벅스 대신 '다방'에서 소개팅을 하다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림다방에서는 테이블이나 창가 등이 모두 옛날 것 그대로다.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림다방에서는 테이블이나 창가 등이 모두 옛날 것 그대로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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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번쩍번쩍 프랜차이즈 카페들을 다 놔두고 오래된 '다방'에서 소개팅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다. 대학로에 위치한 '학림다방'이었다. 즐비한 프랜차이즈 카페와 레스토랑, 요란하게 판촉하는 공연들, 거리 곳곳에서 시끄럽게 재생되는 최신가요들 사이로 학림다방은 1956년 이래 한결같이 대학로를 지켜 왔다.

간판은 특별히 예쁠 것도 아무럴 것도 없다. 단출하게 '학림'이라는 두 글자가 정갈히 박혔다. 투박한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스테인드글라스 무늬로 장식된 무거운 유리문을 삐거덕 밀면,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 된다.

두꺼운 나무로 된 테이블 위에는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쌓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낡아서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레코드판들이다. 나무틀에 끼워진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는 분주한 도시 거리의 풍경이 퍽이나 비현실적으로 페이드아웃(Fade Out)된다.

커피도 팔지만, 다방에 온 이상 왠지 차를 시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메리카노나 캐러멜 마키아토 대신 한방냉차와 유자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앞 테이블에서는 한 커플이 우쿨렐레를 뚱땅거리며 웃었고, 가게 안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소개팅에서 정치 얘기해보셨나요

다방에서 소개팅을 하게 된 사연이 좀 별났다. 만남은 한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셜 데이팅이 한창 유행하기 시작할 때, 궁금한 마음에 가입한 사이트였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잘 알려진 업체다. 개중에는 별로 만남에 의지가 없지만 상대방 프로필을 구경하는(!) 재미로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내 경우는 일종의 실험적 목적으로 가입만 해두었지 만나자는 쪽지가 와도 확인조차 안 하는 편이었다. 일반적인 선입관에 의하면 나 같은 사람이 소셜 데이팅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원체 연애보다는 정치에, 가십보다는 뉴스에, 여성성보다는 인간성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이트의 프로필에도 '정치적 올바름 지향' '인문사회' 등의, 말랑말랑한 연애질과는 좀 거리가 먼 키워드들을 잔뜩 적어놓기도 했다. 이러한 내 관심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만나 봐야 시간 낭비일 것이 자명하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 키워드에 끌려서 내게 쪽지를 보낸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던 오후, 쪽지를 확인하라는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마침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중이었기에 지루함도 이길 겸 사이트에 접속했다. 쪽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 사이트 몇 달째 들락거리면서 구경만 했는데 쪽지 보내는 건 처음이네요. 여기 프로필에다 '정치적 올바름 지향'이라고 쓰신 분 처음 봐요. 대개 그런 쪽 관심 있는 분들은 거의 다 좋은 사람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만나보고 싶어요."

나 역시 그런 키워드를 언급하며 만남을 요청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대개는 단지 내가 '여자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프로필을 제대로 읽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쪽지를 보내왔다. 당연히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 역시 관심이 동했다.

그렇게 해서, 소셜 데이팅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여대생은 철학과 남학생을 만나게 된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큼지막한 간판들이 판을 치는 대학로 한켠에 무심한 듯 시크한 학림다방에서.

21세기가 잃어버린 감성, 다방에서 찾자

만남은 꽤나 화기애애했다. 우리는 TV 프로그램, 연예인, 카푸치노가 어떻고 라테가 어떻고 하는 얘기 대신 노무현, 교육 문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에도 그런 대화가 특별히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스타벅스 아닌 다방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세월 대학로에서 최루탄 냄새 맡고, 학생들이 외치는 독재 타도의 구호 소리를 듣고, 역사의 현장들을 목격한 학림다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된장남녀' 대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된 기분이었달까.

누구나 스마트폰을 쓰는 세상. 정보는 삽시간에 퍼져 나가고, 과학기술은 최첨단을 달린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 우리의 감성도 그처럼 진보하고 있을까? 학림다방과 같은 소중한 문화공간이 없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대학로의 젊은 연극인들은 공연을 올릴 무대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홍대 앞에서는 소규모 클럽들이 임대료 인상을 못 견디고 도산하기 일쑤다.

누구나 문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감성 마케팅은 판을 친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감성의 가면을 쓴 상업주의인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의 지갑을 연 뒤에는 본색을 드러낼 다른 얼굴일 뿐이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인 사랑조차 이제는 돈 없으면 못 하는 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나 무슨 무슨 데이는 낭만을 가장한 커플들의 지갑 털기 대목이다.

21세기가 잃어버린 진짜 문화, 진짜 감성은 어디에 있을까? 배터리 나가고 나면 끝장인 헛똑똑이 '스마트'에서는 찾기 힘들 것 같다. 효율과 합리의 극치를 달리는 현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방이다. 스타벅스나 커피빈보다는, 한 골목에 오래 자리 잡은 동네 다방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문화를 만들어내는 건 돈이 아니라 '잉여로움'이다. 앞뒤 살피지 않는 무한질주를 잠시 멈추고, 한 템포 쉬어갈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도서 : <파리 카페>, 노엘 라일라 피치, 북노마드



태그:#소개팅, #학림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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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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