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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한국에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모두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이었다. 달려오던 차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건널목을 지난다 해도 차가 밀려 빨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사람이 건너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내 체격으로 보아, 곰 한 마리가 길을 건너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경우 오히려 차를 세웠을 것 같다).

자동차가 보행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 수 있다.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보행신호나, 켜지기 무섭게 깜박이며 걸음을 재촉하는 신호등은 강자만을 배려하는 한국의 법과 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한국사회의 준법정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하다 못해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버려진 쓰레기, 선진시민의식이 아쉽다'라는 말은 한국인들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말이 아닌가. 문제는 한국의 도덕이 쓰레기에서 시작해 쓰레기에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게 기껏 길거리 휴지일까? 왜 한국 정부와 언론은 초등학교 수준의 도덕만 강조해 온 것일까? 사회가 지켜야 할 정말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사람을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토대다.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8일 오전 고려대 정문에서 동료 여핵생을 성추행한 고대 의대생 3명의 ‘출교’ 조치를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가 벌어졌다.
 8일 오전 고려대 정문에서 동료 여핵생을 성추행한 고대 의대생 3명의 ‘출교’ 조치를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가 벌어졌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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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은 약자를 수단 삼아 '발전'해 온 야만적인 사회다.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무시하고, 건강한 이가 약한 이를 경멸하고, 남자가 여자를 착취할 때, 법과 제도는 이를 보호할 뿐 아니라 권장하기까지 한다.

최근 고대 의대생들의 성추행 사건을 보라. 남자 세 명이 의식을 잃은 동료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추행하고 이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범죄에 분노하고 있지만, 이것은 흔하다 못해 정형화된 '한국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의식을 잃은 여성은 도움과 배려의 대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육욕을 채울 호기가 된다. 범행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피해자를 협박하는 것은 기본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기록해놓고 오히려 피해자를 협박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사회가 한국이다.

충격 받을 필요 없다. 모두 합심해서 뿌린 씨앗의 결과니 말이다. 2004년, 밀양에서는 남자 고등학생 40여 명이 여중생 자매를 1년 넘게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번 고대 사건과 마찬가지로, 당시 가해자들은 범죄현장을 촬영했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으면 동영상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며 성폭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가해자 중 5명이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을 뿐, 아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며 '피해자가 평온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재판부 결정의 근거였다. 가해자들은 학교에서도 '교내 봉사활동' 등의 가벼운 조치 이외에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범죄가 드러난 이후에도 고통은 오직 피해자의 몫이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밀양의 물을 다 흐려 놨다'고 불평했고, 심지어 '내 딸이 너희처럼 될까 겁난다'는 폭언도 했다. 자매는 학교를 옮기려고 했으나, 다른 학교들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이유로 전학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렵게 전학을 했으나, 가해자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처벌 완화 탄원서에 서명하라고 행패를 부렸다.

피해자는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늘 그렇듯, 분노는 가라앉고 사건은 잊혔다. 고대 성추행 사건도 같은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온하게 지낼 것이다.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모성은 숭고하지 않다

남자 대 여자, 부자 대 가난한 자. 한국 사회에서 결론은 이미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밀양 성폭행 가해자 부모 대다수는 지역 유지들이었다. 이들은 '앞길이 창창한 우리 아들' 걱정을 하며,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딸자식 잘 키워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는 어머니도 있었다.

당시 가해자들이 부모 소원대로 자랐다면, 지금쯤 좋은 학교에 입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이번 고대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들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가해자 부모와 학교는 '앞길이 창창한' 이들이 '아무 문제 없이' 의사가 되길 바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 없이'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졸업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가해자들이 처벌 없이, 혹은 미약한 처벌만 받고 의사가 된다고 할 때, 이들은 과오를 뉘우치며 평생을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히포크라테스가 될까? 성범죄의 재범률은 50% 이상으로 매우 높다. 게다가 의사들은 성범죄 전과가 있어도 합법적으로 진료를 계속할 수 있다.

한국의 법은 언제나 강자 편이었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성범죄로 실형을 선고받은 의사조차 면허를 박탈할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의사들의 성범죄는 계속 늘고 있다.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으로 입건된 의사의 수는 2006년 35명, 2007년 40명, 2008년 48명으로 매년 가파르게 늘고 있다. 드러나지 않았거나 신고되지 않은 수를 고려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2007년에는 의사가 마취에서 막 깨어난 환자를 다시 마취시켜 놓고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모성이 숭고하다고들 하지만, 동물도 제 자식 챙길 줄은 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성(또는 부성)인가다. 제 자식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든 일신만 지켜준다면, 그것은 자식을 괴물로 키우는 것이다. 남의 삶을 파괴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괴물. 가치 있는 모성은 자식을 이런 괴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감옥에 보내더라도, 의사면허를 포기하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고대 사건의 가해자들은 밀양 사건 가해자들 또래다. 그들은 2004년 당시 고등학생으로 밀양 성폭행 사건의 판결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국의 '창창한' 아들들이 이번 고대사건의 결말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번 성추행에 대한 법원과 학교의 대응은 가해자 당사자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에 보내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경쟁교육이 만든 괴물

한국식 교육은 괴물 양산에 적합하다. 교실에서는 남을 밟고 서도록 가르치고, 집에서는 '기 안 죽게' 교육한다. 남은 존재하지 않거나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이 한국 교육의 이상인 셈이다.

이렇게 자라난 청소년들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이웃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올해 3월 발표된 국제교육협의회 연구를 보면, 한국 학생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지표'는 0.31점으로 35개 조사국 가운데 꼴찌다. 관계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의 점수는 아예 0점이었다.

이렇게 자란 청소년들이 행복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하위다. 당연하다. 행복은 남들과 맺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학교와 가정이 길러내는 것은 남을 파괴하고, 자신도 불행한 인간이다. 고대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들이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식 경쟁을 '성공적으로' 체화한 사람들일수록 약자를 배려하기는 더 어렵다.

사람들을 수단화하는 못된 습성으로는 한국 정부만한 게 없지만(이들은 국민을 '자원'이라 부른다), 경쟁교육은 국가적으로도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미래 지식산업이 위키피디아나 앱스토어처럼 등 협력과 나눔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살인적 경쟁교육이 출산율을 낮추고 자살률을 높여 사회붕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전 글에서 '한국사회에 다가올 재앙'을 경고한 바 있다. 국가를 대신해 복지기능을 담당했던 가족이 무너지고, 사회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강력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이야기였다. 빈곤율 증가와 복지 부재만으로도 범죄 증가는 불가피하지만, 한국에는 더 우려스러운 요소가 있다. 낮은 사회적 신뢰와 도덕의 부재다.

한국인들의 신뢰도는 198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 1980년대만 해도,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 '남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40% 가까이가 긍정적으로 답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 신뢰도는 20%대로 떨어졌다.

관련 연구는 한국사회의 신뢰도 하락이 '경쟁' 및 '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가 남의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신뢰도는 낮아진다. 이 사실은 한국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우리에게 도덕은 있는가

2009년 4월 27일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열린 '2009 미스코리아 대전·충남 선발대회' 예심 심사 모습.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준규 검찰총장.
 2009년 4월 27일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열린 '2009 미스코리아 대전·충남 선발대회' 예심 심사 모습.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준규 검찰총장.
ⓒ '2009 미스코리아 대전·충남 선발대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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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사회에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체면'이라는 게 있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만 작동할 뿐이다. 종교가 도덕적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종교는 복을 빌고 사회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한 대학이 도덕과 가치라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

도덕도, 남에 대한 배려도 배우지 못한 우리 사회에 남은 건 '힘'이라는 정글의 법칙뿐이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10년 세계 성불평등 조사에서 한국은 134개국 가운데 104위를 했다. 최저 수준의 성평등지수는 한국 여성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국이 곧잘 무시하는 캄보디아, 세네갈, 수리남도 한국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런 나라에서 '얼굴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는 여성관을 지닌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남자 검사는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애가 아프면 일을 포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검찰의 수장으로 '검찰개혁'을 이끄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그는 업무시간에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남자검사는 집안일도 안 하면서 업무까지 포기하는 모양이다).

고대 성추행 사건 결과는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갈지를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이다. 기다리고, 침묵하고, 잊는다면 이 사회는 늘 그랬듯 힘 있는 자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태그:#도덕, #성폭력, #밀양, #고려대, #의사,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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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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