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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부산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에 누군가 붉은 페인트를 뿌려 볼썽사나운 광경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최근 KBS의 '이승만 특집' 추진 및 일각에서의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와중에 발생한 것이어서 주목됩니다.

이승만은 일제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건국에 기여한 공로가 있음에도 대통령 재임시절의 독재로 인해 4.19혁명 후 민중들에게 권좌에서 쫓겨난 장본인입니다. 이번 페인트 투척사태를 계기로 이승만 동상의 잇따른 수난사, 1955년 그의 80회 생일 맞아 벌어진 갖가지 찬양 행사, 그리고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승만 대통령 동상에 뿌려진 붉은 페인트

최근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논란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역사 인물은 두 전직 대통령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 모두 여러 차례 대통령을 지내면서 10년 이상 장기집권을 했으며, 말로는 모두 비참했습니다.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후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 박정희는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삶을 마감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역사에서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들어 두 사람이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5.16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일부 보수언론들은 마치 낡은 레코드판을 틀 듯 '박정희 살리기'를 외쳤습니다. 이승만도 마찬가집니다. 공영방송 KBS는 '이승만 특집'을 현재 제작중이며, 그의 양자 이인수씨는 4.19혁명 51주년을 맞아 수유리 4.19묘지 참배 및 유족들과의 화해를 돌연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3일 오전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정부 기념관 앞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붉은색 페인트로 훼손돼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 부산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페인트 훼손 3일 오전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정부 기념관 앞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붉은색 페인트로 훼손돼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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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비참한 말로가 모두 무리한 정권 연장 획책에서 비롯했듯이 이들에 대한 무리한 우상화 역시 무리수를 낳았습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독재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세운 동상이 수난을 당한 사례는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박정희는 물론 이승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3일 오전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거리'의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습니다. 이 동상(입상)은 부산 서구청이 4.19혁명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난 4월초에 세운 것입니다. 3일 누군가 이 동상에 뿌린 붉은색 페인트는 황금색 동상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려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인 후 왼쪽 가슴을 타고 흘러 내렸는데, 마치 머리를 크게 다쳐 피를 흘리고 선 모습처럼 보기에 흉측합니다. 급기야 서구청에서 동상을 비닐로 감싸고 이를 노끈으로 다시 묶었는데 흉측하기는 매한가지더군요.

이승만 동상의 수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60년 4.19혁명으로 쫓겨나기까지 12년간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아부꾼들은 그를 '국부(國父)', '국보적 존재' 운운하며 곳곳에 그의 동상 건립은 물론 각종 기념행사 등 우상화 작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모두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종로 탑골공원과 남산에 있던 동상 철거입니다. 그러면 이 두 동상은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세웠으며 현재는 어떤 상황일까요?

4.19 혁명 후 탑골공원 동상, 거리에 끌려 다녀

먼저 탑골공원 동상.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을 전개하는 이순우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동상은 1956년 3월 31일 준공되었으며, 2m40cm 높이에 기단까지 합쳐 6m에 달하는 크기였고, 대한소년화랑단이 건립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경향신문> 1956. 4. 2) 4.19혁명으로 이승만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민중들은 그가 하야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이 동상을 끌어내려 쇠줄에 묶어 종로 거리에 끌고 다녔습니다.

4.19혁명 일주일 뒤인 4월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 철거된 탑골공원 이승만 동상 4.19혁명 일주일 뒤인 4월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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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동상은 한동안 길거리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해 8월 17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용산경찰서에서는 이 동상의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급기야 상급기관인 서울시경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용산경찰서는 4.19 당시 군중들이 끌고 다니다가 길바닥에 내던져 둔 동상을 발견해 이를 용산경찰서 뒷마당에 보관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재자의 동상을 계속해서 보관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함부로 부서버릴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나 봅니다.

남산동상을 바로 철거하지 못한 이유, '너무 컸기 때문에'

다음은 남산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탄신(1955. 3. 26)을 맞아 구성된 '이승만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동상의 준공식은 1956년 8월 15일이었는데, 이날은 제3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틀 뒤인 8월 17일자에서 <경향신문>은 준공식 당일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 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 개월에 걸쳐 7만여 명의 인원과 총 공사비 2억 600만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

높이 25미터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라는 주장이 나온 남산 중턱의 이승만 동상
▲ 철거된 남산의 이승만 동상 높이 25미터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라는 주장이 나온 남산 중턱의 이승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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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이 서 있던 자리는 남산중턱의 현재 분수대 자리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조선신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서울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정상과 함께 남산의 상징과도 같은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상의 크기(높이)는 본체 7m, 기단부를 합치면 25m에 달하는 초대형으로, 당시로선 세계 최대 규모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오른손을 들고 서 있는 형상은 그가 중앙청 마당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선서문을 낭독할 당시의 모습을 조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탑골공원 동상이 하야 발표 당일 철거된 것과 달리 이 동상은 그해 8월 말에야 철거됐는데 이는 순전히 큰 덩치 때문이었습니다. 공사비 2억여 원을 들여 연인원 7만여 명이 10여 개월에 걸쳐 만든 것인 만큼 철거에도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해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동상 철거가 결정됐습니다. 그 다음날 <동아일보>는 '권세와 아부로 남산에 세운 이박사 동상도 하야하기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굳이 세워 본인에게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민중의 뜻에 의하여 그의 우상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이승만의 동상은 건립된 지 4년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남산 분수대 자리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기중기에 의해 철거되는 광경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남산 분수대 자리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기중기에 의해 철거되는 광경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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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당국은 13일 내무부로부터 동상 철거 지시를 받고서 8월 19일부터 철거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 날짜 <경향신문>은 "23일까지 철거작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며,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졸도들이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세운 이 동상의 무게는 10톤"이라고 밝혔습니다. 철거반은 기중기 등 중장비를 동원해 동상 해체작업에 들어가 그달 30일 철거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동상 철거에 소요된 비용은 170만환이었습니다. 독재자 이승만 동상이 섰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들어섰습니다.

철거된 두 동상, 현재 서울시내 민가에 방치

한편, 이 두 동상들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요? 결론을 앞세우면 천덕꾸러기로 떠돌다가 현재도 서울시내 한 민가에 방치된 상태입니다. 그 사연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19 혁명 후 철거된 이들 두 동상은 역사 속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고철 덩어리 자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이 동상들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5년 7월 19일 그가 하와이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 직후였습니다. <경향신문>은 이틀 뒤인 7월 21일자 기사에서 이 두 동상들의 행방에 대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방직 간부로 근무하고 있던 홍윤후씨는 1963년 6월 어느날 지인에게서 이승만 동상이 영영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둘러 서울 종암동에 있던 서울시 창고로 달려갔더니 철거된 이승만 동상이 전기톱으로 분해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홍씨는 모 기관으로부터 이 동상들을 불하받아 해체작업을 벌이고 있던 그 사람을 설득하여 50만 원을 주고 이를 인수하여 명륜동 자택 정원에 보관하였습니다. 홍씨는 '불온한' 이 동상들 때문에 한동안 불안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단독주택에 방치된 2개의 이승만 동상. 4.19 혁명 때 시민들이 서울 탑골공원과 남산에서 끌어내린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을 유족이 인수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단독주택에 방치된 2개의 이승만 동상. 4.19 혁명 때 시민들이 서울 탑골공원과 남산에서 끌어내린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을 유족이 인수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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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동상들 얘기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70년 <코리아 라이프>라는 한 잡지를 통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홍씨에 이어 자유당 시절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지낸 김주홍(金周洪)씨가 이 집으로 이사와 이 동상들을 관리해 왔으나 그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다시 방치됐습니다.

2010년 4월 18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유족 측이 이 동상들을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으나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으나 이 동상들을 챙기는 사람은 여태 없나 보군요.

이승만 연고지에 하나둘씩 동상 세워져

4.19혁명 후 이승만의 우상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한동안 이승만 동상은 화제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얘기가 나온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인데요, 모두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4.19 이후 제일 먼저 이승만 동상을 세운 곳은 인하대였습니다. '인하'대라는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에서 따온 것인데, 하와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노동자 중 90%는 인천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 기숙학교를 설립했는데, 그때 이승만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해방 후 이들이 낸 성금으로 1954년 인하대의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하게 된 것입니다. 인하대는 1979년 2월 24일 이승만 동상을 세웠는데, 1983년 10월 일부 학생들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간 학교측은 동상을 보관해오다가 작년 9월 동상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곳은 배재고등학교입니다. 이승만은 배재고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졸업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배재고는 1984년 2월 28일 교정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해방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을 맞아 하와이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2년 뒤 87년 2월에는 대전에 있는 배재대, 그 이듬해인 88년에는 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인하대-배재고-하와이-배재대-이화장 순으로 그와의 연고를 기반으로 해서 그의 동상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6월 5일 배재대학교 재직 교수 및 재학생, 졸업생들이 이승만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8년 6월 5일 배재대학교 재직 교수 및 재학생, 졸업생들이 이승만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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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뜻하지 않게 배재대에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동상을 세우던 87년 그해 '6월항쟁'을 계기로 학생들이 교내에 있던 그의 동상을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학교 측이 동상을 다시 세우자 학생들이 계란과 페인트를 끼얹는 등 철거시위를 벌여 1997년 또 다시 철거됐습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8년 학교측은 교수,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 번째로 이승만 동상을 다시 학교에 세웠습니다. 동상 건립에 반대해 온 교수 및 재학생, 졸업동문들은 이날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독재자 이승만 동상 건립 웬말이냐?"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광화문에 세우려거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게 먼저 물어보라

이승만과의 인연을 앞세워 교육기관에서 앞다퉈 그의 동상을 세우고 있고 심지어는 과거에 철거된 동상마저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로 남산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이 4.19 민중혁명 후에 철거된 것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추종자들은 광화문 네거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반열에 올리고 싶은가 봅니다(어쩌면 그 다음 순서로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분들에게 고(告)합니다. 꼭 그곳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고 한다면 사전에 그곳의 터줏대감격인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승만 동상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중간이나 아니면 이순신 장군 앞에 세워도 좋겠느냐구요. 그래서 그분들이 흔쾌히 동의할 경우 그땐 세우십시오. 그땐 저도 이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서울의 중심부 광화문 네거리에는 성웅 이순신 장군과 성군 세종대왕의 동상이 앞뒤로 서 있다.
 서울의 중심부 광화문 네거리에는 성웅 이순신 장군과 성군 세종대왕의 동상이 앞뒤로 서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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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승만 우상화, #동상 수난사 , #남산 동상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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