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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松井) 오장(伍長)'을 아십니까?

친일시인 미당 서정주의 '송정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로 세간에 알려진 '마쓰이(松井) 오장(伍長)'. 그는 일제 말기 조선인 가미카제 청년의 일본식 이름입니다. 그의 계급 '오장(伍長)'은 우리말로 하면 '줄반장'입니다. 과거에 학급에서는 분단장, 군에서는 하사를 이렇게 불렀습니다(일제 때 중사는 '군조(軍曹)', 상사는 '조장(曹長)'이라고 불렀죠).

'마쓰이 오장'의 본명은 인재웅(印在雄),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입니다. 1924년 개성에서 출생한 그는 당시 서울 서대문구 수색동에 있던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비행사가 되기 위해 소년비행병 제13기로 입대하였습니다.

마쓰이 오장(본명 인재웅)
 마쓰이 오장(본명 인재웅)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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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특공대원으로 선발돼 야스쿠니(靖國)부대 소속 오장(하사관)으로 복무 중, 1944년 11월 29일 필리핀 네그로스섬 시라이 기지에서 출격하여 레이테만(灣)에서 미국 군함에 돌진한 후 전사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꽃다운 20세였으며, 전사 후 그는 2계급 특진하여 일본군의 소위가 되었습니다.

'마쓰이 오장'은 조선인 출신 특공돌격대원(가미카제) 가운데 첫 전사자였습니다. 그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매일신보> 등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비롯해 친일잡지들은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며 그의 애국충혼을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첫 주자는 대표적 여류 친일시인 노천명. 노천명은 그해 12월호 <매일신보 사진판>에 '군신송(軍神頌)'이라는 시를 통해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했습니다. 이에 앞서 <매일신보> 12월 6일자에 실린 '신익(神翼)-송정오장 영전에'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靑磁(청자)빛 하늘가에
보이지 않는 神翼(신익) 소리를 들으며
이천만 동포의 피가 沸騰(비등)한다

우리 지금 물끓 듯 감격함은
松井伍長(송정오장)의 壯(장)하고 嚴(엄)한 죽음이어라
11월 29일!
우리 松井伍長(송정오장)이
거룩한 죽음을 □□한 이날
해와 달이 무심했으랴

레이테灣(만)의 □□海(해)□를 □며
魚雷(어뢰)를 안고
몸소 艦艇(함정)에 부딪쳐
그대 □□처럼 떨어지다
오― □□□□□□여
그 용감한 □魂(혼)에 □□에
조선의 청소년들아 뒤를 잇자...

가미카제로 불려야 했던 조선인 청년, 그를 찬양한 미당

소위 '가미카제(神風)'으로 불린 이들은 일제가 미국의 군함에 육탄 돌격으로 맞선 '자살공격부대'를 일컫습니다. 일설에는 출격하는 그들에게 귀환용 휘발유를 아예 공급하지 않아 백이면 백 모두 죽음을 강요당했다고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마쓰이 오장'처럼 일본식 이름을 단 조선인 청년들도 더러 포함돼 있었는데, 그들은 출격에 앞서 마지막으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한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단순히 폭력과 차별만이 아닙니다. 앞날이 창창한 청춘들이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전장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아니면 '마쓰이 오장'처럼 이역만리 바다에 수장돼 고혼(孤魂)으로 떠돌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노천명은 마치 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불사른 충혼이라도 되는 양 '물끓 듯 감격' '壯(장)하고 嚴(엄)한 죽음' 운운하고 있습니다. 민족혼을 상실한 친일시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노천명의 시가 실린 지 3일 뒤인 12월 9일자 <매일신보>는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찬양시를 실었습니다. 제목은 '송정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 먼저 미당의 시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미당 서정주
 미당 서정주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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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 천 길의 바다런가...

마쓰이 오장은 '우리의 자랑'이요, 그의 죽음은 '장하다'고 노래했군요.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깨뜨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의 땅은 '향기로운 삼천리 강산'이 되었으며, 조선의 하늘은 '한결 더 짙푸르른 하늘'이 되었다며 그 감격을 주체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노천명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아 보입니다. 생전에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린 서정주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에 대한 문학사적,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때론 극단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의 토속적 서정성을 가장 잘 승화시킨 천재시인이라는 극찬이 그 하나라면, 일제 하에서는 친일, 독재 권력자 앞에서는 교언영색으로 일관한 대세 순응주의자라는 혹평도 없지 않습니다. 이같은 극단적 평가는 전부 그의 삶에서 비롯한 것으로, 후자와 같은 혹평도 그가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면 결코 과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쓰오 오장이 죽지 않고 생환했다?

일전에 해방 직후의 <서울신문> 기사를 하나 확인하기 위해 <서울신문> 자료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리더기에 마이크로필름을 걸어 기사를 검색하던 중 저는 뜻밖에 놀라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옛날 신문을 보다가 더러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이 기사는 너무도 놀랍고 충격적이어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을 앞세우면 노천명과 서정주가 '군신'으로 추앙하며 온갖 요설을 늘어놨던 그 '마쓰이 오장'이 죽지 않고 해방 후에 살아서 귀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쓰이 오장'의 생환 소식을 보도한 <서울신문> 기사(1946. 1. 10)
▲ "마쓰이(송정) 오장 생환" '마쓰이 오장'의 생환 소식을 보도한 <서울신문> 기사(1946. 1. 10)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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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기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10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송정오장(松井伍長) 생환(生還)"이라는 2단짜리 기사였는데, 기사에는 '마쓰이 오장'의 사진과 그의 부모 인터뷰도 실려 있었습니다. 차마 믿기 어려운 이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재작년/필자) 11월 24일(29일/필자) 소위 특별공격대원으로서 전사하였다는 송정오장(松井伍長=본명 印任雄, 23) ('印任雄'은 '印在雄'의 오기임/필자)이 생존하여 방금 인천 월미도에 머무르고 있는데 금 10일 아침 미국 포로수송선으로 수송되어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허위보도 하여 세인의 이목을 속인 것만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천박한 선전정책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동 군의 양친은 반가운 아들을 만나고자 방금 인천 율목동 34번지에 체류하고 있는데 부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사하였다는 통지가 와서 장례까지 지냈는데 일본 육군성에서 채권으로 3천5백 원을 보내고 기타 향전(부의금/필자)으로 약 2만 원이 모여서 정말 죽은 줄 알았더니 '하와이'에서 포로가 되어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에 입항한다는 소식이 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진은 송정오장)"  

레이테만에서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몸뚱이로 내리쳐 깨뜨리'고는 장렬하게 전사했다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마쓰이 오장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미군의 포로가 됐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고향땅으로 살아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실지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인데, 세상에는 그런 일이 더러 있기도 하지요. 전쟁터에 끌려가 죽은 줄 알았던 아들(혹은 남편)이 몇 년 뒤에 살아서 돌아왔다는 설화(說話) 같은 얘기 말입니다. 그런데 마쓰이 오장은 설화가 아닌 실화(實話)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적함에 부딪혀 '전사'한 마쓰이 오장은 며칠 뒤 '전사통지서'와 함께 유품이나 유골도 없는 빈 상자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시국상황으로 볼 때 대놓고는 못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서 함께 오열했을 것입니다. 갓 스물의 아들이 시신조차 찾을 길 없이 이역의 망망대해에서 고기밥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나라고 뭐고 할 것 없이 눈물과 통곡이 먼저 터져 나왔을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죽음은 비단 마쓰이 오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친일잡지 <신시대> 1944년 12월호에 실린 '마쓰이 오장' 찬양글들
 친일잡지 <신시대> 1944년 12월호에 실린 '마쓰이 오장' 찬양글들
ⓒ 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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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이 찬양한 신화에서 거짓의 역사로

그러나 일제 군국주의 세력과 이에 빌붙은 친일세력들은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당시 발행된 친일잡지 <신시대> 12월호에 따르면, 개성이 있던 마쓰이 오장 집 근처에는 '신취송정가(神鷲松井家) 남쪽 50미터' '신취송정가(神鷲松井家) 입구' 등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는 얘깁니다. 또 앞의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 때 일본 육군성에서 채권으로 3500원을 보내고 또 부의금으로 2만 원이 모였다고 하니 당시로선 대단한 장례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쓰이 오장의 전사는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전사가 일제의 조작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조차도 그가 귀환할 때까지는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적어도 세 사람(* 춘원 이광수도 <신시대> 12월호에 '신병(神兵) 송정오장(松井伍長)을 노래함'이라는 시를 실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습니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하고, 또 '신익(神翼)' '거룩한 죽음' 운운하며 온갖 요설(妖說)을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쓰이 오장 '신화'에는 이제 거짓의 역사까지 보태져야 할 것입니다.


태그:#마쓰이 오장 , #인재웅, #서정주 , #노천명, #가미카제 돌격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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