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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케말은 터키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공화제를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 말 탄 케말 파샤의 초상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케말은 터키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공화제를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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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에서 이름이 사람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성명학(姓名學)이라고 한다.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로 통하는 케말 파샤(Kemal Paşa) 혹은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 1881~1938)의 사례는 이름이 사람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오스만제국 시절에 현재의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케말의 본명은 흔한 이름인 무스타파(Mustafa)다. 이스탄불의 군사대학에 입교한 무스파타는 군사학뿐만 아니라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수학교사로부터 완벽함을 뜻하는 '케말'이라는 별명을 얻어, 10대 때부터 이를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했다.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 격퇴해 '파샤' 칭호

케말은 오스만제국의 전제왕정인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민족주의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추진한 급진적 청년장교들의 정치결사체인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한 전력 때문에 주로 변방에서 근무해야 했다.

케말은 30대 중반에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격퇴하는 반격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둬 장군 특진과 함께 제1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령관이나 고급관료에게 붙이는 ‘파샤’(Pa?a)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 민족독립전쟁의 영웅 케말은 30대 중반에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격퇴하는 반격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둬 장군 특진과 함께 제1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령관이나 고급관료에게 붙이는 ‘파샤’(Pa?a)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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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은 1915년 대령 시절인 30대 중반에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격퇴하는 반격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둬 장군 특진과 함께 제1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령관이나 고급관료에게 붙이는 '파샤'(Paşa)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케말은 터키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공화제를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 아래 정교분리와 정당정치 확립, 이슬람 전통복장 폐지, 남녀평등권 도입 등 신생 터키공화국의 근대화-민주화에 헌신했다.

1934년 의회가 '아타튀르크'(터키인의 아버지)라는 경칭 헌정

그는 그 공로로 50대인 1934년 터키 국회로부터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경칭을 헌정 받아 이를 자신의 성(姓)으로 사용했다(터키인들은 아랍인의 관습대로 성을 사용하지 않다가 1934년 국회가 '성 사용법'을 통과시키면서 성을 쓰기 시작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4년 뒤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름이 바뀔 때마다, 오스만제국 변방의 소년에서 혁명을 꿈꾼 청년장교로, 제국의 전쟁영웅으로, 그리고 새로운 공화국의 건설자로 변해갔다. 그의 이름 속에는 자신의 운명과 함께한 터키 민족의 현대사가 반영돼 있는 셈이다.

신생 터키공화국을 15년 동안 통치한 케말이 맨 먼저 단행한 개혁은 술탄제의 폐지와 정교분리 원칙의 확립이었다. 터키는 지금도 7천만 국민의 99%가 이슬람교도이지만 헌법상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되어 '세속주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이슬람국가 중의 하나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의 합헌성 검토, 법 적용 분쟁시의 법률해석, 헌법수정 문제의 검토, 정당 폐쇄권 등의 권한을 가진 터키 사법부의 최고위 조직인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는 지난 96년에 이어 2001년에도 '세속주의를 일탈했다'는 이유로 집권당을 폐쇄한 바 있다.

세속주의 국가 터키에서 케말은 '알라의 현신'

지난 5월 8일 터키의 고위 군인들이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에 헌화하고 있다.
▲ 끊임없는 참배 행렬 지난 5월 8일 터키의 고위 군인들이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에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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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속주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터키에서 케말은 이슬람의 유일신 '알라의 현신'이나 다름없다. 케말의 초상화는 모든 관공서와 공공건물 및 학교 교실은 물론 기업 사무실이나 심지어 가정집 거실에까지 걸려 있다. 또 앙카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그의 묘소와 박물관은 전국에서 온 참배객들과 터키를 방문한 외국 사절단의 행렬이 그치지 않는다.

이같은 존경의 염(念)이 젊은 시절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졌다가 42세에 라티페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곧 이혼해 독신으로 산 케말의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와 강렬한 눈빛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태키인들에게 케말은 중국 사람들에게 쑨원(孫文)과 마오쩌둥(毛澤東)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 '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베트남의 국부이자 민족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찌민(1890~1969)의 묘소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 2005년 4월 1957년 국교 수교 이후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에 헌화하고 있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의 헌화 지난 2005년 4월 1957년 국교 수교 이후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에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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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간 터키에선 여전히 1평도 안 되는 박물관 관리소장의 사무실에도, 1923년 전 세계에 선포한 터키공화국 탄생 100주년(2023년)을 향해 가는 앙카라와 이스탄불 시내 곳곳에서도 그의 초상화는 건재했다. 이처럼 동네 구멍가게에까지 붙은 초상화와 묘소의 참배 행렬을 보노라면, 그가 남북한 지도자(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김일성의 우상화) 모두에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터키를 다녀온 한국인들이라면 대체로 왜 우리한테는 케말 아타튀르크 같은 영웅이 없는지를 자문하곤 한다. 그는 신생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했다. 터키에서는 지금도 '아타튀르크 보호법'에 따라 언론이 정치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아타튀르크를 모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케말이 신생 터키공화국 근대화를 위해 쏜 '여섯 개의 화살'

케말 아타튀르크의 초상화는 모든 관공서와 공공건물 및 학교 교실은 물론 기업 사무실이나 심지어 가정집 거실에까지 걸려 있다.
▲ 독립영웅의 초상화 케말 아타튀르크의 초상화는 모든 관공서와 공공건물 및 학교 교실은 물론 기업 사무실이나 심지어 가정집 거실에까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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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 아래 신생 터키 공화국을 서구식 법치와 민주적 정치제도로 현대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터키의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는 케말리즘(케말사상)의 요체는 흔히 '여섯 개의 화살'로 요약된다.

첫 번째 화살은 정교의 분리였다. 투르크의 술탄은 예로부터 최고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하며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으나 케말은 칼리프제는 유지하되 정치적 지배자인 술탄은 폐지하는 개혁안을 1922년 10월에 통과시켰다. 두 번째 화살은 민족주의로, 케말은 터키민족사와 터키민족문화를 국가적 규모로 연구시켜 널리 보급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성을 갖도록 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살은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근대적, 서구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법률의 국교 조항 폐지,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의 차별 금지, 여성에 대한 교육과 남녀 차별 금지 등의 조처가 잇따랐다. 다섯 번째 화살은 낙후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국가가 경제를 선도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화살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감안해 이 모든 과정을 "혁명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소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면, 아타튀르크는 분명 독재자였다.

대통령 재임 시절의 모습이다.
▲ 케말 아타르튀르크의 흉상 대통령 재임 시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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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케말 파샤의 군부 후예들이 5·27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 헌정을 중단시킨 지 1년 뒤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에선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8기생 주도세력이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의 중앙청과 남산 KBS 방송국을 점령했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전권을 장악하고 공교롭게도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케말 파샤와 5·27 쿠데타가 5·16 군사쿠데타의 '롤 모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의 '혁명공약'과 지켜지지 않은 여섯 번째 공약

당시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가운데)을 중심으로 '좌지철'(차지철) 대위와 '우종규'(박종규) 소령의 경호를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나중에 박정희 대톹령의 경호실장을 지냈다.
▲ 5.16 쿠데타의 주역들 당시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가운데)을 중심으로 '좌지철'(차지철) 대위와 '우종규'(박종규) 소령의 경호를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나중에 박정희 대톹령의 경호실장을 지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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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6개 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60년 5·27 쿠데타를 일으킨 터키 군부는 정권을 이내 민정에 이양했지만, 한국의 5·16 쿠데타 세력은 여섯 번째 공약을 지키지 않고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케말은 "혁명적으로" 신생국 터키를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강압적 수단과 공포 정치를 동원했다. 그는 옛 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술탄과 칼리프들을 끊임없이 감시했고, 언론을 검열해 반정부적 언론사는 가차 없이 폐간시켰다. 그는 소수민족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반란 지도자'들을 공개 처형했다.

그러나 대다수 터키인들이 보기에, 그에게는 다른 나라 '국부'들의 사후에 드러난 부정부패와 친인척 문제, 정적 암살과 민간인 학살, 개인의 신격화 같은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해외의 시각에서도, 그는 군인 출신의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으나 집권 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이웃 나라들과 평화적 선린관계를 지향했다. 그것이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독재와는 물론, 남한의 민간독재 및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이승만-박정희와 다른 점이 아닐까 싶다.


태그:#터키,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 #박정희,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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