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는 대통령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짧지만 굴곡이 많았던 한국 사회의 역사는 역대 대통령들의 궤적을 따라가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여러 대통령들이 내세운 정치논리 속에 격동의 세월을 보냈지만, 이 기간은 한 사람의 생애 속에 모두 담길 만큼 짧다. 영화 <박하사탕>은 스무살부터 마흔에 이른 한 남자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단편을 통찰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갑작스럽다. 1999년 오늘, 주인공이 기찻길 위에서 삶을 포기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기차가 달려온 길을 뒤돌아가면서 주인공의 인생을 시간의 역순으로 되짚어본다. 들꽃을 좋아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하던 한 남자가 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을 거스르며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군 복무 시절 5·18 광주에 동원되고, 간악한 경찰이 되어 사람을 고문하고, 아내의 외도에 자신도 불륜을 저지르면서 점점 파괴되어 간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해준 것은 순수했던 첫사랑 순임이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순임을 보자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주인공의 인생을 조금씩 되돌아가보면 그 끝에는 순수했던 시절의 영호와 순임이 함께하고 있다. 영화는 제목의 '박하사탕'으로 상징되는 순수성을 영화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주인공의 인생을 역순으로 배열하는 서사적 기법이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순수성을 파괴시킨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군과 경찰의 폭압적인 모습에서 영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군 복무 중이던 영호는 광주에서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절게 되고,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정신마저 삐뚤어진다. 그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게 된 계기는 결국 '5월 광주'로부터였다. 영호가 죽기 직전 외쳤던 말처럼, 그는 사회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이 영화의 주제 못지않게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구성한 스토리텔링의 줄기가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김영호라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삶을 집요하게 쫒아간다. 주인공 영호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 없을 정도다. 그를 영화의 한 가운데 놓음으로써 관객에게 또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호의 삶에는 꾸밈이 없다. 그래서 줄거리에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다.

 

이것은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는 이유다. 뚜렷한 플롯과 보편적인 스토리는 오히려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또한 영화는 5·18 민주화 운동 등 굵직한 역사가 등장할 때도 샛길로 빠지지 않고 중심을 잡는다. 영화는 현대사의 이야기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이것이 영화 <박하사탕>의 힘이다.

 

영화 <박하사탕>은 실화를 극화한 것이 아니지만 마치 실화인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굴곡진 현대사를 겪으면서 수많은 김영호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일까. 잔인했던 지난날의 역사, 폭력으로 얼룩졌던 공포의 세월들은 한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했다. 영화는 그러한 현대사의 아픔을 한 인간을 통해서 해석하고 있다.

 

다시 5월이다. 영화 <박하사탕>이 아직도 대중과 호흡하고 다시 읽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영화가 던지는 물음이 지나간 과거로 추억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영호와 순임이 꿈꿨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www.moonilyo.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05.18 18:01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블로그(www.moonilyo.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하사탕 순수 죽음 5.18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