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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촌의 삶은 물 먹인 한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늘 위태롭고 불안정했다. 존재가 처한 상이한 조건. 찢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내딛어보지만, 왼발이 한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힘의 진행방향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국가가 삼촌을 공식적으로 감시하지 않게 된 것은, 그나마 나아진 점이다.

정기적으로 걸려왔던 형사의 전화도 중단되었고, 주변을 탐문하며 동태를 확인하는 일도 사라졌다. 주거지에서 벗어날 때마다 보고해야 할 의무도 없어졌고, 부당한 취급을 당해도 빨갱이나 불순분자로 몰릴까봐 무조건 참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 폭도들끼리 만나고 어울리느냐는 추궁을 당하지 않았고,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북한공작금으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을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에 삼촌은 너무 오래 격리되어 있었다. 취직을 할 나이도 지났고,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리기에도 사회 흐름에 부적응했다. 차려주는 밥 먹고 텔레비전 보거나 만화를 빌려다 시간을 죽이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한 번 무너진 삶은 여간해서는 다시 추슬러지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할머니는 훨씬 늙어버렸다. 햇살 쨍쨍하게 맵고 아삭한 김치를 담그던 손가락들도 뭉툭하게 곱아버렸고, 국물 한 방울로 시고 달고 맵고 짜고 쓴 맛을 단번에 알아채던 미뢰들도 절여진 부추처럼 힘을 잃었다. 근육과 뼈도 세월의 무게에 삭아서 약한 쪽으로 기울어졌고, 경륜과 인내로 빛나던 눈빛도 생기를 잃어버렸다.

그것이 삼촌의 봄눈처럼 짧은 결혼생활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마음 아팠다.

사건의 시말은 내가 군에 있을 때 벌어졌다.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탈영이라도 해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건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벌써 늦둥이를 장가보내 손자손녀들 재롱에 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끝냈어야 했다.

그 일만 없었어도 번듯한 직장 얻고 결혼해 지금쯤 자식이 주렁주렁 할 텐데. 아들이 폭도였던 전력을 개의치 않고 데리고 살겠다니. 칠순을 막 넘긴 노모에게 그것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먹고 사는데 지장 없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했고, 양가상견례 자리에 참석한 아버지도 확인해주었다. 음식솜씨가 있다고 하니 식당을 열어주거나, 슈퍼마켓이라도 차려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여자마음이 바뀌기 전에 일사천리로 결혼식까지 이어졌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보낸 후 할머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안도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넘기지 않아 친구들을 만난다며 외출이 잦았던 것이나 간혹 술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모든 불안은 결혼 반 년 만의 임신으로 덮여졌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업고 동네 돌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늙은 어미의 안도감에 반비례하여 삼촌 부부는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입덧이 심해 그런 모양이라고, 할머니는 당신 스스로 불안감을 달랬다. 몇 달 만에 다시 부엌일을 감당했다. 입덧에는 매실이 좋다며, 차로 달여 먹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며느리의 일방적인 신경질 소리가 들린 후였다. 삼촌이 베개를 들고 할머니 방으로 넘어왔다. 그 순간 늙은 어미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자식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일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혼여행을 갈 때부터 문제가 터졌다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호흡곤란 증세로 난리를 치렀고, 간질발작처럼 경직증세까지 나타났다. 제주공항에 내린 후에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어지러움과 구토로 도저히 몸을 추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단체신혼여행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럴 것이라며, 가이드가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일생 중 가장 도도하고 행복했어야 할 신혼 첫날이었다. 오로지 신부만을 위해 존재해야 할 신랑이 보여준 발작적 행동들을 그녀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신혼의 단꿈은 꾸어보지도 못했다. 몇 번 깜빡 잠과도 같은 시도가 있었지만 임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무대 영창에서 받았던 고문과 성적 수치심으로, 삼촌은 오랫동안 발기불능 상태였다. 유약하고 자기표현이 서툰 삼촌이 사정을 설명하지도 못했으리라. 당황할수록 더 위축되는 것이 그 증세였다. 

- 입양해서도 키우는데 뭐가 문제예요?

뒤늦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께 대들 듯 던진 화풀이였다.

- 글쎄, 삼촌은 정이 들어 그러고 싶어 했는데. 네 할머니께서 워낙 완강했다. 

헤어진 후 삼촌은 더욱 말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두었다가는 병나겠다 싶었던 아버지가 할머니를 설득해, 모자를 서울로 불러 올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삼촌의 앞날까지 염두에 둔 고육책이었다.

그렇지만 눈치 보며 일없이 집에서 지내기에 서울은 삼촌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비디오를 빌려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고, 조카들 손에 끌려 고궁을 돌아다니는 것도 한 두 달이었다.

군대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삼촌이 어떻게 있을지 눈에 선했다. 밤이면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 새벽까지 소설책을 읽었을 것이고, 늦게 일어나 눈치 보며 아침상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삼촌은 늙은 어미 등을 밀어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볼 나이에 뒤늦은 시집살이를 했다.

- 가까이서 뵈니까 무척 깔끔하시더구나.

그래서 괜찮았다는 것인지 까탈진 성품 때문에 마음고생 했다는 것인지 종을 잡을 수 없었다. 후자의 느낌인 것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돌연한 죽음은 삼촌에게 남은 희망조차 걷어가 버렸다. 삼촌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았는데. 자식에 대한 끔찍한 보호본능으로도 시간의 신을 설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병명은 대장암이었다. 복통과 혈변이 있었어도 단순히 치질 정도로 생각하고는, 민간요법으로 임시방편하거나 약을 사 드셨다고 했다. 나는 진통제나 소화제 같은 것으로 암세포를 박멸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졸업식 날 삼촌까지 올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 며칠 후였다.

혈변이 심해졌다는 할머니의 불안 섞인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상황이 안 좋다고 직감했다. 나의 서투른 운전솜씨 때문이었을까, 광주로 내려가는 내내 아버지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종합검진 결과는 아버지의 예상대로였다. 의사들은 당연히 수술을 권유했다. 수술 기술이 좋아져서, 대장암 정도는 종양만 정확히 들어내면 생존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했다.

아버지가 친분 있는 몇몇 의사들에게 확인전화 해보았을 때 들었던 대답도 비슷했다. 인접장기로 원격 전이만 되지 않았다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탐문한 것이었지만 그것 이상 누가 더 잘 답변할 수 있었을까.

- 물혹이 터져서 혈변이 나오는 거니까, 그거만 제거하면 된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는 거짓말을 반복하며,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삼촌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나는, 수술은 잘 끝났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불안했다.

우리들은 서로의 눈빛에서 불길함을 발견할까 두려워하며 수술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건강에 대한 관심을 받은 적이 있으셨을까. 삼촌은 내 옆구리에 딱 붙은 채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기술자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작은 아버지는 수술비를 모두 책임지겠다고 장담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수술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을 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방으로 불려갔을 때, 의사는 이미 폐하고 복막에 원격 전이가 진행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통보했다.

그걸 꼭 갈라봐야 알아요? 순간 욕설이 목젖을 흔들었지만 꿀꺽 삼켰다. 할머니의 남은 생명도 그 자의 선의에 달려있었다.

수술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던 것도 우리를 참담하게 했다. 수술의 충격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허약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가족들이 총출동하여 할머니를 보살필 기회가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신도 평생 처음 호강을 누려보셨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그것은 남은 자들에게 위안거리라도 제공해주려는 당신의 배려였다.

할머니는 자주 의식을 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항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곳곳에 숨어있는 종양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육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진통제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았다. 의식을 쫓아버려 육체의 부식을 인지하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이었다. 주사약에 취한 할머니는 초저녁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러다 그냥 돌아가시는 것은 아닐까 싶은, 죽음 같은 잠이었다. 아버지는 며칠째 밤새워 병실을 지켰다. 당신 얼굴도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에게 헌신해보는 자리였을 것이다.

- 잠시 눈 좀 붙이세요. 깨어나시면 알려드릴게요.

괜찮다는 아버지를 병실 한쪽에 놓인 보호자용 소파로 보낸 후,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분리불안에 병실 문조차 나서지 못하는 삼촌을 달래서 집으로 데려간 사람은 고모였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원무과에 들러 병원비부터 정산했던 고모는, 할머니의 손을 쥐는 순간 몇 십 년간 미뤄놓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태그:#광주항쟁, #폭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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