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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네덜란드로 피난 오는 말루쿠인들.
 1951년 네덜란드로 피난 오는 말루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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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루쿠 군도(짙은 초록색 부분).
 말루쿠 군도(짙은 초록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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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찾은 캠프 붸스트보르크(Kamp Westerbork)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유대인 집단 수용소로 사용했던 캠프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던 붸스트보르크 캠프에서 아우슈비츠(Auschwitz) 캠프까지 연결된 철로는 이제 끊어진 채 이곳의 기념물로 남아 있다. 안네 프랑크도 이곳에 머물다가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에 태워졌다.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붸스트보르크는 또 하나의 다른 네덜란드의 역사를 품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비어 있던 캠프는 1951년 네덜란드로 피난을 온 말루쿠(Maluku)인들의 거처로 20년간 사용되었다. 말루쿠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일부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당시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자치 주(주도는 암본 Ambon)였다(말루쿠는 북말루쿠와 남말루쿠로 나뉘는데, 여기서 언급된 말루쿠는 남말루쿠를 가리킨다).

말루쿠인들은 왜 60년 전 머나먼 네덜란드로 왔나

말루쿠인들이 머나먼 네덜란드로 오게 된 과정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종교·종족 갈등 등이 얽힌 인도네시아의 복잡한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말루쿠인들은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와 손잡고, 수카르노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세력과 대립했다. 자바를 중심으로 한 수카르노 세력은 이슬람이 다수였지만, 말루쿠인들은 기독교도가 다수였고 지배자였던 네덜란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식민 지배 당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군사 등 많은 부문에 말루쿠인을 적극 기용했다. 특히 말루쿠인들은 왕실네덜란드인도네시아군대(KNIL, Koninklijk Nederlandsch Indisch Lege)의 일원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도 참여했다.

우호적이던 네덜란드가 물러가고 껄끄러운 관계이던 수카르노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는 것은 말루쿠인들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말루쿠인들은 1950년 4월 25일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말루쿠공화국(RMS, Republik Maluku Selaten) 정부를 수립했다. 네덜란드는 말루쿠 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RMS를 반정부군으로 규정했다.

말루쿠 독립은 실현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 KNIL은 해산했고, 네덜란드는 자신들에게 협력했던 KNIL 소속 말루쿠인과 그 가족들을 자국으로 피신시켰다. 1951년 4월부터 석 달 동안 말루쿠인 1만2500명이 네덜란드가 제공한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말루쿠인들의 네덜란드 피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또한 RMS 대통령이던 크리스 사우모킬(Chris Soumokil)은 1966년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반역자로 처형된다. 같은 해 요한 마누사마(Johan Manusama)가 망명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말루쿠인들은 애초에 네덜란드를 한시적 피난처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길은 멀어져 갔다. 이들은 네덜란드가 제공한 편의들이 말루쿠 2세대를 진정으로 돕는 것이라기보다는 말루쿠 젊은이들을 떠돌이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권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말루쿠인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불만을 시위로 표출했다. 또한 1970년 네덜란드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을 습격하고 1975~1977년에는 기차 탈취, 학교 인질극 등을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 정부는 대화 창구를 확대했다. 그리고 말루쿠인들에게 수천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시민권을 인정해줬다. 1986년에는 유트레히트(Utrecht)에 말루쿠의 역사 및 전쟁 당시의 생생한 사진 자료를 소장한 박물관도 설치했다. 이 박물관에는 네덜란드 식민 통치 역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트레히트에 있는 말루쿠 박물관.
 유트레히트에 있는 말루쿠 박물관.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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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루쿠 군도에 남아 있던 말루쿠인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말루쿠인들과 심각한 반목을 겪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말루쿠를 탄압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말루쿠 군도로 많은 무슬림을 이주시켜 상권을 장악하고 종교적, 문화적 동화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토착 말루쿠인과 이주한 무슬림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9년 1월 암본에서 기독교도 운전기사가 몰던 차에 무슬림 소년이 치이는 사고가 발단이 되어 대규모 종교 분쟁이 발생했다. 갈등은 말루쿠 전역으로 확대되는데, 이슬람의 일부 과격한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 분쟁이 더 심각해졌다. 결국 5000명이 넘는 사상자와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해 2000년 유엔에 개입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커다란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입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정부가 기독교도 학살을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네덜란드의 말루쿠인들은 말루쿠에 남아 있는 말루쿠인들이 종교적, 종족적, 경제적으로 차별을 당하며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고향과 같은 붸스트보르크에 모인 말루쿠인들

기념사를 하고 있는 막스 하우리싸.
 기념사를 하고 있는 막스 하우리싸.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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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굴곡진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말루쿠인들은 매년 4월 캠프 붸스트보르크에서 네덜란드에 이주해 온 1세대를 기억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숨진 선열을 애도하는 예배 시간을 마련한다. 말루쿠인들에게 붸스트보르크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던 또 다른 고향과 같은 곳이다.

지난 4월 23일 붸스트보르크에서 열린 행사에는 500여 명의 말루쿠인과 50여 명의 네덜란드인이 참가하였다. 네덜란드의 국영 방송사(NOS)를 비롯한 많은 미디어가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행사 기간 내내 그들은 말루쿠에서 사용되는 암본어(말레이어를 기본으로 하지만 차이가 있다. 말루쿠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일부이지만 언어는 다르다)와 네덜란드어를 함께 사용하며 행사를 진행하였다.

기자는 이 행사를 준비하고 함께 진행한 말루쿠 2세대 막스 하우리싸(Max Haurissa)를 취재했다.

막스 하우리싸는 네덜란드 아쎈(Assen) 지역의 말루쿠 타운 대표를 맡고 있다. 아쎈 지역에는 약 800명의 말루쿠인이 함께 살고 있다. 피난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피난 온 세대들과 함께 3세대, 4세대의 말루쿠인들이 아쎈에 정착해 있다.

하우리싸는 77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건강해 보였다. 하우리싸의 아버지는 KNIL에서 군수 물자를 취급한 장교였다. 하우리싸의 아버지는 말루쿠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고향에 남아 있으면 처형당하거나 수감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1951년 네덜란드로 왔다고 한다. 하우리싸의 가족들은 1967년까지 붸스트보르크 캠프에 살았다.

1971년 붸스트보르크 캠프가 철거된 후 말루쿠인들은 캠프 근처의 도시인 아쎈, 베일런(Beilen), 호흐페인(Hoogeveen)으로 옮겨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다. 집단 수용 시설에서 벗어난 말루쿠인들은 타운을 이뤄 함께 살아갈 터전을 마련했다.

타운을 형성해서 살고 있는 말루쿠인들이 국가 행사 때 말루쿠공화국의 국기를 집집마다 걸어두고 있다.
 타운을 형성해서 살고 있는 말루쿠인들이 국가 행사 때 말루쿠공화국의 국기를 집집마다 걸어두고 있다.
ⓒ 네덜란드 국영방송 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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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 수용소였던 붸스트보르크에서 사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하는데, 왜 이곳을 다시 기억하고 함께 모여 추모식을 하는지?
"낯선 땅에 온 우리의 부모가 내 나라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노력했던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60년간 이국땅에서 후손들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려고 노력해왔던 우리 조상들이 시작한 곳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1951년 네덜란드로 피난 올 때, 네덜란드 정부는 우리에게 '수카르노 정부와 협상해 말루쿠가 독립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협상은 결렬됐다. 네덜란드는 수카르노 정부에 강경책을 취하고자 했지만, 미국 등이 이를 저지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말루쿠에 남은 사람들은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후손들은 그때의 상황과 진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는 꾸준히 그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

- 피난 온 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생활을 해왔는지?
"아버지는 네덜란드에 오자마자 아쎈의 자전거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많은 말루쿠인들은 매일 10km가 넘는 길을 걸어 그곳으로 일하러 갔다. 어머니는 캠프 안에 있는 섬유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좀 더 벌이가 괜찮은 아쎈의 부잣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셨다. 부모님은 우리 6남매와 함께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어려웠지만 늘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서로 격려하며 그 시간들을 버텨냈다."

종교적 믿음에 대해 말하던 하우리싸는 인터뷰 도중 말을 끊더니 기자에게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돼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종교 이야기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 붸스트보르크 캠프를 떠난 후 어떻게 생활했나?
"장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존심도 강하고 삶에 대한 의욕도 강한 분들이셨다. 말루쿠에 살 때는 살림이 넉넉했는데, 네덜란드에 온 후로는 궁핍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자식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고 배워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나는 스포츠 교사가 되었고 이후 돈을 벌어가며 공부하여 기계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나 병을 얻어 직장을 떠나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병을 다스리고 난 후에 나는 시청에서 번역과 통역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65세에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구할 때 경쟁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뽑힐지 자신이 없었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열일곱 명이 지원했는데, 말루쿠인인 내가 당당히 뽑혔다.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준 부모님이 자랑스럽다."

자녀가 여섯 명, 손자·손녀가 벌써 스물두 명이라는 하우리싸는 함께 온 손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우리싸는 행사에서 기념사를 맡았다. 피난 온 후 네덜란드에 대해 느낀 실망과 불신, 말루쿠인이라는 자부심, 새롭게 삶을 개척한 이야기, "아주 계산적인" 네덜란드 사람들 이야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한 희망적인 삶, 그리고 인내해야 했던 세월에 대한 하우리싸의 연설은 인상적이었다.

추모행사에서 만난 이들이 포옹하고 있다.
 추모행사에서 만난 이들이 포옹하고 있다.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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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행사 모습.
 추모행사 모습.
ⓒ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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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리싸의 손녀는 말루쿠를 어떻게 기억할까

지난해 4월 17일,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벰믈(Bemmel)의 한 교회에서 RMS의 세 번째 대통령인 존 봐틸레트(John Wattilete)의 취임식이 열렸다. 봐틸레트는 말루쿠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말루쿠 2세대이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봐틸레트는 직업이 변호사로, 네덜란드로부터 생존권과 시민권을 보장받은 세대의 주역이다.

하우리싸의 손녀.
 하우리싸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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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말루쿠인들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인도네시아 감옥에 갇혀 수십 년간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석방하고, 망명 정부와 관련 있는 말루쿠인들에게도 국민투표권을 주어 정치적인 미래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봐틸레트는 취임사에서 이제는 독립보다는 인권을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말루쿠인들을 포용해 이들이 네덜란드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루쿠인들은 네덜란드 속의 소수민족으로서, 그리고 네덜란드의 과거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여전히 말루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말루쿠인이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뿌리를 내렸던 붸스트보르크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기자는 그곳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몇몇 네덜란드인도 인터뷰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말루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이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말루쿠인들에게 네덜란드가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우리는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형제"라고 말했다.

말루쿠 4세대인 하우리싸의 손녀는 자라서 말루쿠를 어떻게 기억할까?


태그:#말루쿠,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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