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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강화도 고려산에 갔다. 고려산은 진달래축제(강화고려산 진달래예술제, 이하 진달래축제로 표기)로 유명하다. 축제는 끝났지만, 고려산의 진달래 군락지는 꽃과 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온통 울긋불긋했다.

 

황사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라 걱정을 했지만, 다행스럽게 전날 내린 비 덕분에 산길에서는 먼지가 일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산 주변 풍경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공중의 먼지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타는 순간까지 황사는 까맣게 잊었었다. 

 

해마다 축제를 할 만큼 유명한 고려산 진달래를 구경삼아 갔지만, 꽃놀이가 목적이 아니라 산행이 우선인지라 다른 등산로에 비해 진달래군락지와의 거리가  비교적 먼 적석사~낙조대(낙조봉) 쪽으로 올라가 진달래 군락지를 경유, 백련사~고인돌 주차장 쪽으로 하산했다. 중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군락을 지났다.

 

고려산(436m)은 원래는 오련산이었다고 한다. 오련산을 고려산으로 바꾸게 된 것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부터라고 강화도 진달래축제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고려산 관련 뉴스나 고려산을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 등에 너나없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 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 '문화재청' 강화고려궁지 설명 전문.

 

강화고려궁지(사적 제133호)는 고려의 강화천도와 관련된 유적이란다.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라고 대략 항몽 혹은 반몽 정도로만 설명되어 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솔직히 이런 유적들의 이런 설명들은 언제나 껄끄럽게 읽히곤 한다.

 

전쟁 중 그 나라의 왕이 잡히면 나라 자체가 무너지고 마니 어떻게든 왕을 보호해야 하는 고로 어디로든 안전하게 대피시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한 일, 강화도 같은 땅이 있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정말 우리에게는 은혜로운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껄끄럽게 읽히는 이유는 자신들의 무능함 때문에 전쟁이 났음에도 백성들은 나 몰라라 도망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솔직히, 침략을 받기 전까지, 왕을 대피시키기까지 왕과 권력층에게 백성은 어떤 존재였는가 말이다. 

 

'도망친 마당에까지 이렇게 까지 거창한 규모의 궁궐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대항'이라는 말 대신 '피난'이라고 바꾸든지, 피난지였다는 사실을 밝히든지, '오련산은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고려산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강화도 진달래 예술제 고려산 설명 중)란 공식적인 설명을 역사 사실에 근거, 참고하여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려산 산행을 앞두고 고려산과 강화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던 중 이런 설명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로 분분했었다. 또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충렬왕 7년(1281), 국보 제306호)에 강화도에 대해 단 한 줄도 전혀 기록하지 않은 사실도 생각났다.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문화재청 설명 부분 참조) 있는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자신의 말년(고려 충렬왕)에 그동안 자신의 발길이 닿았던 곳에 전해 내려오는 역사나 설화, 승려들의 행적과 미담 등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주체성과 호국, 선행이나 효행 등을 일깨우는 사서다.

 

일연스님은 강화도 선원사에 조실로 3년간 머무르기도 했다. 당시 선원사 주관으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 제작(1237~1248)되었다. 그럼에도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강화도나 강화도의 역사, 당시 존재했던 절이나 스님 등에 대해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에 대한 지극한 발원이나 자부심을 단 한 줄이라도 기록할 법하건만, 오련산 정상 샘물의 다섯 가지 색깔의 연꽃을 날려 연꽃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지었다는 오련산의 오련사 전설에 대해서 만이라도 몇 줄이라도 기록할 만한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강화는 정권야욕에 눈먼 무인들이 활보하던 땅이었으며,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쳐 온 왕과 권신들이 머물던, 한편 은혜롭지만 한편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땅이었기 때문 아닐까? 고려산 산행을 하루 앞두고 분분했던 생각들은 현기증이 날 만큼 붉은 엄청난 규모의 고려산의 진달래 앞에 서서도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고려산에 몰려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냥 방관자의 눈으로 즐기고 말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두고 보면 반드시 보이는 불미스러움은 고려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털제비꽃들에 반해 진달래 군락지를 향해 가는데 어떤 여자 둘이 산기슭에 바짝 달라붙어 무언가를 캐고 있다. 함께 간 언니와 다가가보니 꽃 두 송이를 피운 족두리풀을 막 캐어 "이거 산나물이 아니라 꽃이예요"라며 자랑스러워하지 않는가.

 

"아까 그 족두리풀 캔 사람들 발길 닿는 곳이었다면 아마 저렇게 예쁘게 피어있지 못했을 거야. 아마 진즉에 작살났을 거야. 왜 그렇게 이쁜 것만 보면 캐가려고 혈안인지 모르겠어. 가져가 심어도 죽을텐데 말이야. 그냥 두면 알아서 잘 살 텐데…."

 

몇 년 전 진달래축제와 함께 설치된 나무 계단을 따라 고려산 정상쪽으로 가는 길, 저 만치 떨어진 곳에 무척 아름답게 피어난 각시붓꼿 한 송이가 눈을 붙잡았다. 옆에 있던 언니가 이렇게 말한다. 뽑힌 족두리풀이 자꾸 안쓰럽게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짓이겨진 땅에 내 손가락 길이 남짓한 솜나물이 간신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고려산 정상에도 술과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축제장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마다 술과 안주를 팔고 있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지만, 일행들 따라 나도 이따금 이용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할까?' 지나칠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고려산 자락에 태어난 연개소문이 훈련을 하며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깃든 오련지를 복원해 놓은 곳에 잠깐 멈춰 오련지 구경을 했다. 누가 "와 연꽃이 있네?"라고 해 다가가 보니 색 바랜 플라스틱 연꽃이 떠 있다. 아쉽고 씁쓸해졌다. 고려산에 연꽃과 관련된 전설이 있으니, 연꽃 두어 포기 사다 심었다면 여러모로 좋았겠다 싶어서.(박스기사 참고)   

 

오련지를 지나 백련사로 향하는 길은 내리막길인데 전날 내린 비로 온통 질척거리는지라 투덜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산길 양쪽으로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단풍잎제비꽃이 만발해 있어서 무척 즐거웠다.

 

강화 고려산 행정 부실 관리 유감

진달래 군락지를 뒤로 고인돌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백련사로 내려 가기 전에 복원해 놓은 오련지가 나타난다. 오련지는 고려산 인근에서 태어난 자란 연개소문이 이 성안에서 말을 사육, 말에게 먹인 샘물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당시 오련산에는 5개의 이와 같은 샘물이 있었는데 이중 정상에 있는 것은 제사에 쓰인 던 것이라 제외, 나머지 4개의 샘물을 말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방 전문가들은 이와는 달리 내성이 함락될 경우 도피처로 활용할 경우에 대비, 오련지(물광)을 산 정상에 만들어 두고 항상 물을 길얻가 부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련지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안내글을 보면서 탁상행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설명문 5줄에 '이후'라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 말 때문에 고구려 말에 살았던 연개소문(603~ 663? 666?)이 고구려 20대왕인 장수왕(394~491)보다 먼저 살다간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읽기에 따라 고려산의 전설을 우선하면 연개소문은 고구려 이전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후~… 고려산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9줄의 설명은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할까. 특히 4번째줄 '청색꽃은 조사가 원하는 곳에…, 청색꽃이 떨어진 곳에 청련사를 지어'라는 부분은 대채 뭔말인지 이해가 쉽지 않다. 따지려고 들면 끝이 없겠다. 첫줄 5개의 오정은 그냥 '오정', '5개의 연못(우물,샘)'으로 쓰는 것이 맞다. '복사'라는 말도 복원이 맞을 것 같다.

 

설명문에 밝힌 것처럼 이 설명문은 강화군청이 아닌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개인의 돈을 모아 오련지를 복원하면서 설치한 것이다. 그런만큼 전문성이 좀 떨어져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읽을 글이라면 신중하게 적었어야 했다. 실수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2003년 이후 강화군청 그 누구도 이 설명문을 전혀 보지 않은걸까?

 

강화군청은 진달래축제 이후 나무계단, 홍보물 등을 설치했다. 올해는 제4회, 지난 4월 30일 막을 내렸다. 지난해 진달래축제를 다녀간 사람들이 35만이란다. 이 오련지는 고인돌 주차장에서 군락지로 가는 길가에 있다. 오련지 둘레에는 고려산의 역사를 안내해주는 여러 설명문들이 서 있어서 그런지(위 기사 중 1964년 고려산 모습) 지나가던 사람들 대부분 발길을 멈추고 들렀다 가곤 했다.

 

이 설명문은 개인이 설치했다지만 고려산이나 진달래축제 관리자는 개인들이 아니다. 그런만큼 강화군청의 책임이다. 강화군청 담당자 중 누구라도,단 한사람만이라도 진달래축제장이나 고려산을 다녀갈 사람들이 읽을 이 안내문을 관심있게 읽었다면 이 오류투성이 안내문이 9년째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기사를 쓰다가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시정하게 해야 할 것 같아 강화군청 문화체육부(032-930-3224/3628) 문화예술 담당자에게 전화해 알려줬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묻는다. 오련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련지를 몇 군데 복원해 놓은 것도 아니고 단 1곳에 복원했다는데 이렇게 물을 수 있을까? 담당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른다고 치자. 그렇다면 자체적으로 알아봐야지 민원인에게 되물을 수 있는가? 의식도 태도도 씁쓸하다.


태그:#진달래축제, #고려산, #진달래예술제, #오련지,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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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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