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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오랫동안 앓아누웠던 모양이다. 얼마 후 할머니가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 전해들은 소식이었다.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화해의 메시지였고, 나와 삼촌을 친구로 맺어주려는 노력의 시작이었다. 방학이 되면 나를 꼭 내려 보내라고 했을 때, 엄마는 무조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광주에 내려간 때는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째서 늦게 내려갔는지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다. 대개의 사회과학 서클들이 그랬듯이 방학과 동시에 며칠짜리 수련회가 있었고, 이후에도 귀향하는 친구들과 이러저런 이유로 술판을 벌였던 것 같다.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쨍쨍한 땡볕이 눈을 찌르는 한여름 낮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고속버스 옆구리 짐칸에서 엄마의 선물꾸러미를 꺼내는데, 쉴 새 없이 방출되는 땀으로 이미 전신이 흥건하게 젖은 느낌이었다.

골목을 걸어 들어가는 내내 미칠 지경이었다. 동네 입구 가게에서 수박을 산 것이 문제였다.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정수리에 쏘아대며, 선물 꾸러미나 수박을 내려놓든지, 아니면 배낭이라도 내려놓고 가라고 요구했다. 

할머니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얼굴을 때린 서늘한 바람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커튼 같았다. 흙의 열기를 빼앗은 물 입자들이 눈보라처럼 얼굴에 날아드는 순간 모든 짜증이 날아갔다. 비릿한 물 냄새에 뒤섞인 맨 흙의 습한 먼지들이 코를 자극했다.

시멘트 마감된 수돗가에서 할머니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 마당에 뿌리고 있었다.

- 장손 왔는감. 

할머니는 그날 일이 몹시 미안했던 듯 연신 웃으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루 끝에 쪼그린 채 늙은 어미의 노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삼촌의 눈가에도 반가움이 번졌다. 이곳에는 평온함이 오랜 만에 친구하자며 놀러온 것 같았다.

차가운 펌프 물로 몸을 식힌 후 바람이 살랑거리는 마루에 앉아 늦은 점심상을 받았다.

- 장손이 왔는디, 찬이 변변찮아서.  

급하게 차렸다지만 더위를 무릅쓰고 시장까지 다녀온 밥상이었다. 잘 구워진 도미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왔고, 옆에는 소고기불고기도 한 접시 놓였다.

참죽의 새순으로 튀긴 부각도 향이 좋았지만, 통깨가 잔뜩 뿌려진 꼬막 회에서는 얼마나 싱싱한 바다냄새가 나는지. 포기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등이 푸짐하게 올라온 밥상을 보는 순간 뱃속이 요동쳤다.

맛있게 먹는 것이 식욕을 돋우는지, 아니면 사람이 그리웠던 것일까. 양팔로 무릎을 감싼 채 상 옆에 쪼그리고 앉은 삼촌이 날렵한 젓가락질을 구경하며 군침을 흘렸다. 그에게서는 아직도 할아버지 장례식 때의 포르말린에 섞인 향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3.

호수에 떨어진 돌이 파문을 일으켰을 때,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다. 그것을 잡은 물새가 수면을 차고 올랐고, 매가 물새를 낚아챘다. 그렇지만 나는 돌을 던질 때, 매를 보지 못했다. 

항쟁 첫날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에는 2백 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휴교령이 떨어지면 정문 앞으로 집결하라는, 학생운동지도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학생들은 공수부대원들의 급작스러운 기습에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들은, 공수부대 물러가라며 던진 돌팔매가 피의 학살극 서막이 되리라 예측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 수백 명의 시민들을 살해하는 것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군부였음을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저항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몇 달 전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시내로 진출했던 대학생들은, 그것이 부마항쟁의 출발점이 되리라 예상했을까.

시위는 부산과 마산으로 번져나가 박정희정권 붕괴의 결정타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 전날 부산대학교 학생지도부는, 「민주선언문」을 읽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적힌 대로 도서관 앞으로 모이기도 전에, 무슨 근거로 시위 실패라 단정 짓고,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갔던 것일까.

1980년 5월 17일 밤까지 민주화대성회를 주도했던 광주지역 학생지도부는, 군부의 일제검거령 소식을 접하고 안전한 장소로 피신했다. 본격적인 반정부투쟁에 대비해 지도부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금남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여 싸웠다.

그런데 학생지도부는 투쟁 현장으로 되돌아와 항쟁의 선봉에 서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그들은 항쟁이 벌어지자 오히려 대중들에게서 멀어졌다. 미래에 대한 어떤 비관적 전망이 그들을 돌려세웠는지 모르겠다.

불의에 저항하는 일이 성공과 실패의 전망으로 결정할 일이던가. 무엇이 그토록 서둘러 현실을 예단토록 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서울역에서 '회군'하지 않았다.

광주항쟁이 터지기 며칠 전 서울역에 모였던 10만 여 대학생들의 지도부는, 쿠데타에 맞서는 가장 강력했던 대오의 해산을 결정했다.

효창구장과 잠실운동장 근처에 군 트럭과 장갑차들이 집결 중이라고 연락 받은 지도부는, 심야에 군부와 충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쿠데타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서울역에 모여 전선 사수를 외치는 학우들에게 해산을 요구했다.

그 결정으로 민주화투쟁 열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정권장악의 가장 큰 장애가 사라지자 군부는, 광주에서 참혹하게 시민들을 살상한 후 곧장 청와대로 달려갔다.

전선의 어디에서 가장 두려움을 느낄까. 학생운동지도부는 전선에서의 퇴각결정이 '피의 광주'를 불러오리라 예측했을까. 그들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가장 치열하게 접점이 이루어진 전선에서 도망쳤다.

만약 학생지도부가 효창구장에 진주한 군대에게 그들의 원래 전선으로 돌아가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면, 투쟁을 계속했다면,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갖추었던 서울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쿠데타 군에 저항했다면, 그렇게 대규모로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할 수 있었을까.

전남대학생들이 지도부의 공허한 결정에 따라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였던 것처럼, 쿠데타나 계엄령이 확대되면 우리는 서울역에 모여 목숨 걸고 저항할 것이라 선언했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군부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현실은 가혹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단번에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거대한 몸통을 불안하게 뒤뚱거리며 고통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을 뿐이다.

삼촌의 기억상실 증세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취직면접 보던 날 밤이라고 했다. 의류회사 광주매장의 현장사원 자리였다. 폭도에게 취직할 기회를 만들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 회사 본사 임원과 아버지가 대학동창이었다. 나이도 다른 입사지원자들보다 많았다. 받아주기로 한 이상 나머지는 본인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형식은 공채였다. 서류처리가 끝난 후 마지막 절차는 면접이었다. 전날 밤 부뚜막에 정화수 떠놓고 기원했던 할머니는, 그날 오후 면접을 잘 했다는 삼촌의 전화를 받았을 때까지도 전혀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저녁 먹고 들어가겠다는 이야기 역시 늦둥이 막내의 당연한 보고사항이었다. 늙은이들은 이제 한 시름 놓았다 싶었을 것이다. 취직한다는 것은, 정상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큰애가 욕 봤다며, 고마워했다.

삼촌과 친구들은 충장로 골목 식당에서 잡탕찌개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아직도 광주에는 피 냄새가 고스란히 남았다. 극렬폭도들에게는 미행이 따라 붙던 시절이었다. 그 순간에도 술집손님을 가장하여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친구들은 민감한 주제는 피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 군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40여 일 동안 단식투쟁하다 옥사한 비극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유족들로부터 시신을 탈취한 경찰이 전남 영광에서 장례절차를 강제로 끝냈다는 것에 울분을 토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항쟁 구속자들이 성탄절 특사로 모두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마음만은 변치 말자며, 언젠가, 언젠가를 다짐하는 술잔을 부딪쳤을 뿐이다.

삼촌이 술집을 나간 시각은 밤 10시경이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건물에 붙은 화장실에 가는데 방한외투까지 입을 필요는 없었다.

20여 분이 지나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불안했지만, 누구를 만난 모양이라며, 기다렸다.

술자리의 시간이란 강물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소주잔을 몇 번 부딪치거나 술잔을 한번만 돌려도 방금 무엇 때문에 심각했던가를 잊어버리는 것이 그런 자리였다. 또 30분 정도가 지나갔다. 그런데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매섭게 강했고, 기온도 영하로 떨어졌다. 와이셔츠에 양복차림으로 길에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는 날씨였다. 친구들이 신경이 곤두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권력을 찬탈한 자들에게나, 친구들에게나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다들 일말의 가능성으로 더욱 불안했다. 바로 불법 연행이었다.

할머니가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때도 그때쯤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시계를 보았는데 11시 15분이었다.

집에도 없다!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친구들은 충장로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술자리를 파하고 나오는 학교 후배들도 합류했다.

종호 형이 없어졌다야! 정말인가? 혹시 짭새들이 달고 간 거 아냐? 징헌 새끼들.

그래도 삼촌은 허망하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대를 뒤지던 친구 한명이 혹시나 싶어 다른 친구와 함께 광주미문화원에 가보았던 것이다.

1980년 12월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한 대학생들에게 방화되었던 그곳은, 술집에서 두 블록이나 떨어진 황금동에 위치해 있었다. 왜 거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며, 그들은 후일 할머니로부터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듣고 겸연쩍어 했다. 어쩌면 그들도 지붕을 타고 올라가 기왓장을 뜯고 인화물질을 부어 그곳을 불 지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삼촌이 발견된 지점은 미문화원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어두운 골목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앞으로 엎어진 채 쓰러져 있었는데, 의식을 잃은 지 한참 된 듯했다. 둔기에 맞은 듯 머리 옆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와이셔츠 칼라까지 젖은 상태였다.

영하의 골목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몸은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웠고, 사지도 뻣뻣했다. 친구들은 앞 뒤 생각할 겨를 없이 삼촌을 들쳐 업은 채 대로를 달려갔다. 앰뷸런스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했다. 

도대체 삼촌은 왜 그곳에 갔을까. 자의로 갔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던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끌려갔다 해도 발견된 곳이 하필 거기였는가도 의문이었다. 형사가 끌고 갔다면 경찰서 대공과나 안기부 광주분실이어야 했다. 아니면 505보안대거나 말이다.

제 발로 걸어갔다 해도 의문이 남았다. 바람이 매서워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진 밤이었다. 양복만 입고 그 먼 거리를 걸어갈 수 없었다. 술이 추위를 막아준 것일까. 목격자도 없었다.


태그:#광주항쟁, #서울역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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