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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주민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덕치면 면민의 날입니다. 아침 8시경 우리 마을 회관 앞으로 버스가 들어오기로 되어있으니 가실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시간 지켜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일이 있더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던 일 잠시 멈추시고 마을 주민 모두가 면민의 날에 참석하시어 즐거운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올 해 또 농사 열심히 지어야제라우!' 이웃마을 사람들과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 흥겨운 놀이마당 '올 해 또 농사 열심히 지어야제라우!' 이웃마을 사람들과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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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오줌 싸러 '칫칸(돌 두 개 나란히 놓인 화장실)'에 다녀 온 뒤 잠을 다시 청하려 하니 호랑지빠귀가 울어대 잠을 못 이룬다. '휘이이 휘이이' 세찬 바람 지나가는 휘바람 소리처럼 '마을 사람들! 한 해 농사 준비하는 봄이에요' 마치 육상경기 전 선생님께서 출발 신호 부는 휘파람 소리처럼 들려온다. 몸을 뒤척이고 있으니 곧이어 뒷산 정자나무에 찾아와 울어대는 딱따구리. 곧이어 종달대 지저귀고 뒤란 감나무에 앉은 참새들 이에 뒤질세라 '짹짹' 노래하며 즐거운 하루가 시작됨을 알린다.

그러다가 마을 이장님께서 새벽부터 안내 방송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깨어났다. 시골에서 날이 밝으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 취급받기 일쑤다. 그만큼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며 살지 않으면 남보다 뒤처지게 농사일 꾸려가기 때문이다.

오늘은 밤나무를 혼자 심어야 한다. 부모님 돌아가시자 한때 묵혀버려 방치한 야산에 밤나무를 심어 풀과 잡목들이 자라지 못하기 위해서다. 부모님께서 밤과 감나무 농사를 지어  일곱 자식들 예쁜 교복을 입혀 보낼 때 육성회비를 한 차례씩 대기도 했다. 강 건너 밤나무 밭을 경제논리로 따지면 안 가꾸는 게 이익이다. 하지만 고마운 마을 잊을 수 없어 눈 뜨고는 차마 묵혀버릴 수 없기 때문에 가꾸고 있는 것이다.

마을 앞산에 있는 밤과 감나무 밭은 이제 다 묵혀버렸다. 하지만 그동안 형님들이 신경 써서 유일하게 풀을 베며 가꾸는 밤나무 밭은 우리 집 뿐이다. 그런데 돈을 주어도 누가 풀 베어 주는 사람이 없어 두 해 동안 방치하다보니 잡목들이 우거지고 키 작은 감나무들은 칡넝쿨이 감고 올라가 가지들이 고사하고 있었다. '저 감나무! 우리들에게 회비를 대주었는데 차마 죽여 버릴 수는 없지' 생각 끝에 올 봄 마을 아버지 한 분에게 어렵게 놉(하루하루 품삯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품팔이 일꾼 ; 네이버 사전)을 얻어 베었고, 못다 벤 곳은 나와 함께 모두 베었다.

'나도 오늘 면민의 날에 가고 싶은디 저 밤나무 오늘 심지 못하고 다음 주에 심으면 말라 비틀어 죽으면 어떻하지…' 고민하며 이장님의 방송 소리 안 들었었던 걸로 한다. 고향 집에 살면 좋으련만 주중에는 회사에 다니니 어쩔 수가 없다.

'사둔 많이 묵어!' 활짝 핀 벚나무 아래 이웃마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먹는 점심.
▲ 점심시간 '사둔 많이 묵어!' 활짝 핀 벚나무 아래 이웃마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먹는 점심.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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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치게 깔끄막이 심허더니 몇 번 굴러부렀당게.' 주말에 찾아와 함께 잡목 베는 일에 합류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시면 반갑게 맞이하던 동환이 어르신. 빵과 우유를 드시면서 "그러도 자네들이 참 대단허네. 여그 베야꼬 밤이나 감이 얼매나 나오것는가? 내 품삭 나올라먼 몇 년 걸리것네" 껄껄 웃으신다.

"돈 벌어서 어디다 쓴다요. 부모님이 짓던 밭 안 묵히고, 우리들에게 회비를 대준 밤이나 감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아먼, 그렇고말고. 백번 옳은 말이제. 부모님이 애지중지 짓다 간 곳이라 아들들이 묵히불던 안 허고 요로케 견치 가꿀라고 허는 마음이 참 보기 좋네. 내가 그리서 힘들더라도 베어주는 것이여. 요로케 깔끄막 진데서 일허다 궁글먼 나 큰일 나부러. 글지만 자네가 하도 부탁허길래 큰 맘 묵고 비어주는 것이여. 내가 올해 및 살인지 안가? 칠십 넘긴지가 한 참 되아부렀어. 올 해 일흔 일곱인디 우리 마을에서 아직까지 나만큼 힘 씀선 일 헌 사람 없어. 그나저나 앞산도 이제는 자네 밤나무 밭만 뺀 히부네. 나머지는 젠작 다 묵히불고 칡덩쿨만 무성 혀. 자네 부모님이 참 현명헌 사람들이었어. 당장에 묵을 식량이 없어도 자식들 갈 친 욕심이 엄청나게 강히서 배 곯아 감선 갈친게 요로케 밤나무 밭도 깨끗이 비어주고…."

팔십을 바라보는 동환이 어르신 덕분에 가시덤불 숲을 이룬 밤나무 밭은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작년에 심은 나무들 중 가뭄에 콩 나듯이 살아있는 나무들은 올 해는 숨통이 트여 잘 살 것이다.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곳에 밤나무를 심는다. 작년에 놉을 얻어 심은 밤나무들은 키가 큰 풀과 넝쿨식물에 몸이 감겨 거의 다 죽어버려 다시 심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심은 밤나무들이 죽은 줄 미리 알았더라면 밤나무 묘목이 떨어지기 전에 구해 진즉 놉을 얻어 심었을 텐데 잡목 베면서 알아 묘목을 어렵게 구해 늦은 것이다. 놉을 구해 심으려 하니 하필 면민의 날이라 손 내밀며 도와 달라 말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혼자 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벚꽃 아래 하루 놀고 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나무를 심는 내내 마음은 화사한 벚꽃 그늘 아래에 가 있었다.

어서 심고 잠깐만이라도 마을 어르신들 흥겨운 모습 바라보고 싶어 아침도 굶은 채 새벽부터 밤나무를 심었다. 버스가 들어와 마을 주민들을 싣고 가고 잠시 후 봄비에 불어난 강물 따라 회문산 자락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풍악놀이 소리. 아무리 부지런히 심어도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고 베어 놓은 가시덤불은 왜 그리도 내 몸을 달라붙어 잡아당기는지. 돌과 자갈이 많은 너덜겅 산이라 힘을 써서 괭이질을 해도 돌 자갈이 계속 나올 뿐이다. 찰진 땅이 아니라 흙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파다가 심으니 더딜 수밖에 없었다.

'에이. 오늘 못다 심으면 내일 놉 얻어서 심지 뭐. 뿌리에 물 적셔 그늘 아래 두고 학교에 좀 갔다 오자.' 허기도 지고 힘도 없어 면민의 날이 열리는 모교인 덕치초등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잔디, '봄물' 오르고 벚꽃 그늘 아래 시름 모두 잊고 하루 철렵 즐기시는 면민들.
▲ 운동장 잔디, '봄물' 오르고 벚꽃 그늘 아래 시름 모두 잊고 하루 철렵 즐기시는 면민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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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민의 날이 이전에는 8·15일 광복절에 있었다. 그런데 한여름이라 날도 덥고 해서 벚꽃 피는 봄에 하자고 열린 것이다. 지난 4월 16일 토요일. 학교에 도착하니 하늘 높이 애드벌룬이 떠 있고, 운동장에 심어진 잔디는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뿌리 살살 건드리는 봄기운에 연둣빛 물감으로 칠해지고 있었고 그 위로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오전 행사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각 마을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즐거운 식사를 하고 계셨다. 기웃기웃 고개 내밀며 마을 사람들을 찾는 데 등 뒤에서 앞집 점순이네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이웃마을 주민들과 만나 윷놀이(우측)를 즐기고 서로 술 잔을 권하고 있다.
 오랜만에 이웃마을 주민들과 만나 윷놀이(우측)를 즐기고 서로 술 잔을 권하고 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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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도수! 잘 왔네. 그라니도 혼자 나무 숭구니라 만난 것도 못 묵고 맘이 걸렸는디 잘 왔고만."
"아이고메! 배도 고프고 힘도 팽겨 도저히 못 숭구것도만요. 그리서 점심도 때울 겸 행사도 볼겸 히서 왔고만이요."
"어따 잘 힜어. 여가 있어. 내가 얼릉 밥 챙기올랑게."
"아니라우. 제가 타 묵을께라우."
"아녀, 내가 가야 돼아지 괴기라도 한 점 얻어와. 응, 우선 막걸리 한 잔 혀! 샛거리도 안 묵고 일 헝게 얼매나 배가 고파. 나도 오늘 둘째딸이 여그 행사에 맞춰 동창회에 참석한다고 연락이 와서 어저께 산에 나물 좀 뜯으로 댕깄더니 몸이 영 말을 안 듣고만. 고 놈 밥 다 묵고, 더 묵어 잉!"

돼지를 서너 마리 잡아 끓인 얼큰한 돼지 국밥. 늙으신 부모님들 후르륵거리며 먹는 뜨거운 국물 속으로 팔랑팔랑 춤을 추며 떨어지는 연분홍빛 꽃잎들.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음 이젠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고 뜨거운 국밥 속으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내 마음도 꽃잎처럼 화사하게 물들어간다.

꽃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추운 겨울 사둔은 어치게 견디었냐고, 봄이 옹게 참 좋다'고 옆 이웃마을 사돈에게 안부를 묻는 어머니들. 연분홍빛 꽃 잎 아래 이웃마을 사람들과 서로 술잔을 권하며 윷놀이 즐기시는 아버지들 모습에서 봄은 얼어붙었던 우리네 가슴에 희망찬 새순을 틔우며 찾아온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 펑 뚫고 박차고 나오는 '가슴꽃' 보는 면민의 날이 봄이어서 참 좋다.

졸업식 때 내가 우체국장 상을 타던 강당. 이젠 컴퓨터 교실로 활용하고 있다.
▲ 옛 강당 졸업식 때 내가 우체국장 상을 타던 강당. 이젠 컴퓨터 교실로 활용하고 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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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이라고 점순이네 어머니 덕분에 아침 겸 점심까지 맛나게 먹고 교실로 들어가 구경을 했다. 면민의 날이라 그런지 교실은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내가 다닐 때 사용했던  낡은 교실은 다 헐리고 그 자리에 정원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신 뒤쪽으로 2층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내 학교 다닐 때 두 칸짜리 슬레이트로 지어져 5, 6학년 때 사용했던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2층이 올려 지면서 건물은 완전 구조변경이 되어 어색했다. 6학년 졸업식 때 졸업장을 받아 쥐고 정든 학우들과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 글썽이며 모였던 교실은 급식실로, 5학년 때 배웠던 교실은 유치원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두 칸짜리 교실을 지으려고 각 마을마다 돌아가며 울력으로 터를 닦던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봄 날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는 마을 이장이었는데 새벽이면 입에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우것테, 마을 중간, 아랫것테' 그렇게 세 군데 돌아다니며 외쳐댔다.

"울력들 나옷쇼! 오늘 국민하교 교실 터파기 허로 강게 괭이, 바작, 산태미, 지게들 지고 나옷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중장비로 하면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을 마을별로 돌아가며 곡괭이와 삽으로 터파기 작업을 해서 어렵게 신축했던 건물이라 애틋하게 다가왔다.

서로 얼굴 마주 보며 공부하는 교실. '공부도 더 잘 되겠지.'
▲ 교실 서로 얼굴 마주 보며 공부하는 교실. '공부도 더 잘 되겠지.'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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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아담하게 새로 지어진 교실들을 둘러보았다. 나란히 일렬로 줄을 맞춰 남학생 여학생 분단별로 앉았던 책상은 빙 둘러 서로 바라보며 공부할 수 있도록 있게 했다. 선생님 말을 듣지 않으면 여학생과 앉혀버린다고 엄포를 놓던 선생님 말씀이 스쳐지나가며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대형 TV 모니터는 물론 각종 현대식 교육 기자재가 내 눈을 휘둥그러지게 만들었다.

세면대 입구에는 점심 먹고 이빨 닦으라고 칫솔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선생님께서 다음 주에 이빨 검사한다고 하면 칫솔에 소금을 묻혀 오랜만에 이를 닦으면 잇몸에서 피가 났던 등굣길 아침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지린내가 코를 찌르고 푸세식 변기에 앉아 있으면 구더기가 구물구물 거리던 재래식 화장실은 온데간데없고 비데까지 설치된 최신식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놀랐다.

졸업식 때 우체국장상을 타며 공책을 선물로 받았던 강당으로 갔다. 상을 받기 위해 교탁 앞에 나가 서 있던 곳은 컴퓨터실로 변해 있었다. 재학생들이 졸업가를 불러주며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던 후면 공간은 실내 체육 및 사물놀이 배우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남쪽 축구골대 옆으로 갔다. 운동회를 하면 청군 백군 나뉘어 깃발을 흔드는 응원단장의 행동에 맞춰 응원가를 부르며 신나게 떠들며 놀던 곳에 발길 멈춰 섰다. 아름드리 큰 벚나무는 사라지고 대신 운동장으로 넓히고 남은 공간은 새로운 교문이 나 있었다.

운동회 날이면 어머니는 밤을 삶아와 나를 살짝 불러내 주곤 했던 자리로 가 서 있어본다. 달리기 시합이 있다고 담임선생님께서 호루라기 불며 '전체 일어서!' 하면 운동신경이 부족했던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려 괴로운 장소였다. 벚나무 옆 운동장에서 아침이면 함께 입학한 이웃집 현주와 놀곤 했는데 어느 날 형한테 배웠다며 6자와 9자를 돌로 땅에 새기며 헷갈리지 않게 쓰고 가르쳐 주었다. 1학년 코흘리개 시절 그 화사한 봄날이 아른아른 떠올라 발길 오래도록 머물러 서 있었다.

봄이면 벚나무 예쁘게 꽃을 피우며 등교하던 우리들에게 '봄꿈'을 심어주었다.
▲ 옛날 교문 봄이면 벚나무 예쁘게 꽃을 피우며 등교하던 우리들에게 '봄꿈'을 심어주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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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을 지나 내가 다녔던 옛 교문으로 간다. 교문 양쪽에 서 있는 벚나무는 아직도 건재하게 버티며 화사한 벚꽃을 내게 선물해 주고 있었다. 5학년 어느 토요일, 빨리 집에 가려고 아이들 모두 지름길인 교실 앞에 쌓아진 축대 아래로 뛰어 내리다 그만 나는 발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어 팔이 부러져 엉엉 울다 집으로 가던 교문에 서 있었다. 마침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학교 선생님 여러분이 교문에 들어서서 올라오고 계셨다. 그 중 내 담임선생님도 계셨는데 나는 선생님들이 무서워 '팔이 부러졌다'고 말도 못 꺼내고 잠시 울음 그치고 지나가던 곳에 앉아 회상했다.

'그때는 왜그리 내가 순진했는지. 아니 바보였는지. 선생님께 팔이 부러져 아려 죽겠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엉엉 울며 집으로 갔는지. 나는 그 시절 선생님께서 내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빨개지며 가슴이 뛰는 울렁증 환자여서 어쩔 수 없었지.'

아린 추억을 뒤로 하고 교문을 바라보았다. 쉬는 시간에 친구랑 눈깔사탕 사 먹고 헐레벌떡 뛰어 오르던 경사진 교문에는 미끄럼 방지용 작은 돌들이 시멘트 속에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그 길 위로 왼쪽에 코 수건을 옷핀으로 고정시켜 단정히 매달고 아버지 손을 잡고 입학식 하러 들어서던 쌀쌀했던 그 봄날이 아스라히 떠올랐다. 그리운 아버지 얼굴 떠 올라 그만 얼른 운동장으로 발길 옮긴다.

운동장을 빙 둘러 화사하게 핀 벚꽃을 볼 때마다 시집 간 내 누이가 결혼 식 때 입은 연분홍빛 드레스가 떠오를 만큼 눈이 부시다. 또 소풍가는 날 저녁이 떠오른다. 소풍가는 날 저녁이면 내 마음도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혹시 내일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잠을 자던 날이 생각났다. 학교 주변을 빙 둘러 심어 놓은 벚꽃들이 화사하게 피면 학교에서는 꼭 봄 소풍 날짜를 잡곤 했다.

소풍가는 날, 반별로 운동장에 줄지어 서서 교장님 훈시를 듣고 있으면 연분홍빛 꽃잎들이 무리를 지어 바람결에 휘날리며 머리 위에 날아와 앉곤 했다. 오랜만에 달콤한 풍선껌 맛보며 각 반 앞에 나란히 서서 우릴 쳐다보고 계시는 선생님 몰래 풍선을 불곤 했다. 그러다 의외로 풍선이 크게 부풀어 오르면 놀라 얼른 입 속으로 '흡' 빨아들이며 꺼 추던 날이 지나간 흑백필름 속에 다시 살아났다.

운동회 날이면 기웃거리던 좌판 가게. 빈 호주머니만 만자작 거리며 침 삼키던 어신 시절이 생각났다.
▲ 좌판 가게 운동회 날이면 기웃거리던 좌판 가게. 빈 호주머니만 만자작 거리며 침 삼키던 어신 시절이 생각났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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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운동회 날이면 언제나 늦게 오셨다. 농사일 조금이라도 더 하다 오려고 친구들 어머니는 아침 일찍 다 오시는데 유독 내 어머니만은 점심 때 쯤 소쿠리에 밥을 이고 쌍벚나무 아래로 오셨다. 3, 4학년 때 였던가. 한 번은 운동회 때 공중에 엿을 매달아 놓고 뛰어서 따 먹고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앞서가던 친구가 넘어지는 바람에 3등으로 들어와 공책 한 권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 기뻐서 어머니가 계시던 쌍벚나무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 잘 했다'고 몸빼바지(허드렛바지) 속에 꼬깃꼬깃 접어 넣어둔 십 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셨다. 운동회 날이면 친구들은 고무공 하나씩 다 사서 노는 데 나만 없어 그 돈으로 샀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며 어머니 얼굴이 쌍벚나무 사이로 떠올랐다. 운동회 날이면 사람들이 많으니 어머니는 언제나 찾기 쉬워라고 점심때면 쌍벚나무 아래로 오라 했다. 그 쌍벚나무 아직도 화사하게 꽃망울 터트려 주위 빙빙 맴돌게 하며 나를 붙들고 있다.

서울에서 열려던 동창회를 한 주 연기하고 고향에 내려온 후배들. 고향을 사랑하는 맘이 참 곱기만하다.
▲ 35회 후배들 서울에서 열려던 동창회를 한 주 연기하고 고향에 내려온 후배들. 고향을 사랑하는 맘이 참 곱기만하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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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모교 졸업식이 77회 째 열렸단다. 내가 33회이니 강산이 네 번 변한 세월인데 바로 엊그제 졸업장을 들고 교문을 나서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내가 다닐 적 학급 수는 두 반이었다. 그래서 6년 동안 번갈아가며 한 반이 되어 학우로 지내다 보니 누구네 아들이고 여식인지, 형과 누나는 누구이고, 또 동생은 누군지 다 안다.

면민의 날에 아는 후배들 얼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2년 후배들 동창회 모임이 모교에서 열리고 있었다. 당초 서울에서 열려던 것을 한 주 미뤄 면민의 날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 얼굴도 보고, 태어나 살던 고향 마을도 찾아가보려 내려온 것이다. 고령화로 인해 사람 발자국소리 그리운 적적한 고향 마을 행사에 온기를 불어 넣으려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내려온 것이다. 동창회 모임에 내려와 행사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주름살 깊어진 부모님들 얼굴에도 오랜만에 봄 햇살 따스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2년 후배(35회 졸업생)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배구경기를 하고 있다.
▲ 배구경기 2년 후배(35회 졸업생)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배구경기를 하고 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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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정점을 행해 달려가는지 노래자랑이 끝나고 상품 시상식이 열린다. 어서 밤나무 심으러 가야 하는 데 코흘리개 어린 시절 추억들이 발 길 닿는 곳마다 새록새록 피어나 나를 붙들고 있다. 행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아쉬워 디스코 메들리 송이 나오자 겨우내 움츠려들었던 몸을 마음껏 풀어 헤치려고 무대 앞으로 나와 어깨 흔들어 댄다.

벚꽃도 흥에 겨운지 꽃 잎 바람결에 휘날려 면민들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사둔 건강 헛쇼 잉! 내년 봄에 우리 또 만납시다!'
회문산에 걸쳐진 봄 햇살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태그:#김도수, #진뫼마을, #섬진강, #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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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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