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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치밀하게 집권을 준비해오던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학살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다. 만일 민주화운동 세력이 치열한 반유신투쟁 와중에도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5월 광주의 학살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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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아니, 부끄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어느 날 문득 품은 의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저는 제 아버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나 마흔 고개를 넘어섰고, 두 아이의 '또 다른' 아버지가 된 지금의 제가 돌아볼 때 '왜 그렇게 밖에 못했나' 싶은 부끄러움으로 남지만 말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그 아버지에게 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첫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전두환의 '평생 동지'임을 자랑스러워한 아버지

초등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저의 집에는 낯설지만 아주 높은 사람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이 일 년에 몇 번 배달되곤 했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은 '민주정의당 총재 대통령 전두환'. 금박으로 박힌 그 글씨 속의 편지는 늘 첫머리가 '존경하는 평생 동지 아무개님'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몇 가지 장면 역시 그렇습니다. 퇴근 후 KBS '9시 뉴스'를 즐겨 보시던 아버지는 늘 오후 9시가 '땡' 하는 순간 시작한다는 소위 '땡전' 뉴스 속 전두환의 동정에 대해, 그리고 그 강력한 지도력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다며 칭송과 함께 때로는 부러움으로 여러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1934년 경기도 판교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차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3살이 되던 해, 친어머니를 병으로 잃었고 그 이후 아버지의 삶은 고단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저에게 새로 들어온 계모로부터 당한 설움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설움은 역시 '배고픈 설움'이었다고 합니다. 계모는 밥 먹을 시간만 되면 가만히 있다가도 트집을 잡아 때렸고 그렇게 쫓겨난 아버지의 주린 배는 머루와 밤 등 산열매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여름은 그나마 다행이고, 산열매도 없는 겨울은 더욱 힘들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친구 집을 찾아가 한 끼 밥을 얻어먹곤 했지만 늘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어 수시로 굶어야 했다는 아버지의 '계모 잔혹사'는 어린 제게 그 어떤 슬픈 동화보다 애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와 결혼했던 스무 살 당시 아버지의 체구는 상당히 왜소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에게 꼭 말 잘 듣는 착한 효자 아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느꼈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민주화 열기로 넘쳐나던 1987년 전후. 1986년 5·3 인천 민주화 시위와 그 해 10월 건대에서의 애국 학생 민족해방 투쟁총연맹(애학투련) 사건을 빌미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일사건 최대 구속자 수인 1288명의 대학생을 용공 좌경세력으로 잡아 가두는 등 독재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그 시절, 전두환 정권에 대한 아버지의 지지 역시 맹목적이었습니다.

당시 제 눈에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KBS '9시 뉴스'에서 아나운서의 '좌익 용공 세력 발본색원'이라는 멘트에 따라 아버지 역시 박자를 맞춰 "저 빨갱이 새끼들…" 운운하는 모습에 저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정말 그들이 빨갱이일까.

그런 의문을 묻는 저에게 아버지 역시 정확한 답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전두환 대통령이 무너지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그런 빨갱이 세상이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죽는 것"이라 말씀하셨고, 저에겐 "행여 대학에 가더라도 절대 저런 놈들과 함께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받곤 하셨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리 많은 학식을 가지고 계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계모가 학교를 제대로 보내줄 리 만무했기에,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닌 것이 아버지 학벌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는 심한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어려서 잘 먹지 못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에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던 아버지라서 그랬을까. 아버지는 유난히 사회적 명성과 지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당시 무소불위의 독재자인 전두환의 '평생 동지…' 운운하며 시작하는 금박 편지는 아버지의 긍지이며 자랑이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아버지가 단순히 이 편지 때문에 그토록 전두환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해, 그러니까 1989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가 전두환으로부터 이처럼 특별한 편지를 받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죄 닦겠다며 학생운동에 투신한 아들

분신사건 후 학내 농성중 학내 폭력 근절과 의문사한 학생회장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함께한 동지한 분신한 후, 우리는 대학을 점거하고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다. 휴교령이 발표되기 전, 집회 사회를 맡고 있는 이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얼마후 집시법 위반 및 기물파손죄 등으로 나는 구속되었다.
▲ 분신사건 후 학내 농성중 학내 폭력 근절과 의문사한 학생회장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함께한 동지한 분신한 후, 우리는 대학을 점거하고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다. 휴교령이 발표되기 전, 집회 사회를 맡고 있는 이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얼마후 집시법 위반 및 기물파손죄 등으로 나는 구속되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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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는 매우 힘이 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서울 모 지역에서 살던 우리 집에 파출소장이나 동장 등 소위 지역 기관장이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아버지 이름을 대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늘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이라는 직책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사회정화위원회'가 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참 높고 대단한 분인가 보다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1988년, 민주화 열기 속의 총선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이 열리고 이에 따라 시작된 국회의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저는 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바로 그 '사회정화위원회'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의 친위조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실제로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얼마만큼 했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당시 큰 비난을 받던 전두환과 같은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대학에 입학한 후, 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우리 사회에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제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 아버지가 지은 그 부끄러운 역사의 죄 닦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비합법 민주화 운동 조직에 가입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독재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렇게 미워하던 '빨갱이 김대중'이 사실은 핍박받던 정치인이라는 것과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일어난 그 참혹한 죽음이 '난동 사태'가 아니라 '죽음으로 울부짖던 처절한 민주화 투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그 금박의 '평생 동지'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최대한 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속 아버지의 존재에는 부끄러움과 불신이라는 높은 벽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운동권 아들, 대학 제적 후 아버지와 인연을 끊다

학생운동 당시 대학에서 농성중 그해, 우리는 의문사한 동지와 이를 규명하라는 절규를 남기고 분신한 동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이다.
▲ 학생운동 당시 대학에서 농성중 그해, 우리는 의문사한 동지와 이를 규명하라는 절규를 남기고 분신한 동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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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버지와 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말 잘 듣고 착했던 아들이 아버지의 기준으로 볼 때 발본색원해야 할 '빨갱이'가 되었음을 처음 알게 된 사건은 제가 대학 2학년 때 운동권 동지의 의문사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농성장으로 아버지께서 찾아오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방학이 채 끝나지 않았던 그때 집으로 날아온 제적 통지서는 결국 아버지와 저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파탄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두환과 함께했던 아버지의 행적이 부끄러워 시작한 학생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진 여러 충돌 속에서 아버지와 저는 이미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날, 저는 집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 후 저는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구구절절이 많은 그 사연을 다 쓰다 보면 속된 말로 책 한 권 분량이니 각설하고, 그렇게 인연을 끊은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해가 바뀐 그다음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함께 일하던 동지가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전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학생회장의 억울함을 규명하라는 유서를 쓰고 분신한 것입니다. 또다시 농성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닌 대학은 학내 폭력이 매우 심했습니다. 학내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대화가 아닌 폭력으로 화답했습니다. 훗날,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되어 조사된 이 사건의 결과에서도 이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대학의 학생처에서 학내 폭력배들에게 장학금과 용돈을 줘가며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폭력을 사주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에 맞섰던 학생회장은 사망 직전까지 이들에게 7차례에 걸친 감금과 폭력, 협박을 당했고 끝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싸웠던, 저를 비롯한 십 수 명의 선후배들은 학교로부터 제적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동지가 분신하기 전날, 우리는 또다시 낫과 쇠파이프, 각목을 들고 나타난 폭력배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아야 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결국 그날, 그 친구는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습니다. 뒤늦게 친구의 분신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분했고, 억울했고, 뜨거운 눈물이 목젖을 넘어 온몸에 통곡으로 흘렀습니다. 그 친구와 나는 학교에서 제적된 후 늘 함께였던 동지였습니다. 함께 굶었고 함께 투쟁했으며 또 함께 맞았습니다.

사실 그 친구가 분신하기 전날, 제가 먼저 분신을 기도했습니다. 녹이 슨 낫과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나타난 십수 명의 폭력배에게 맞으며, 저는 더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단 하나의 소중함인 목숨을 던져 이 야만을 고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 저의 분신 기도는 실패했습니다. 석유통을 들어 온몸에 기름을 붓는 과정에서 들고 있던 라이터가 젖어버려 불꽃을 퉁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를 목격한 후배들이 달려들었고 이후 또다시 내가 분신할까 걱정하여 후배들은 내내 당번처럼 번갈아가며 저를 감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만 그 친구가 분신하고 만 것입니다.

개처럼,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더이상 잃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그 분함으로 저는 친구에게, 동지에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그때의 그 죄책감과 분노는 꼭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니, 여전히 그 슬픔과 절망은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그날, 아버지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집을 나온 이후 소식을 끊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휴교령이 발표된 학교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당시, 농성장으로 다시 아버지가 찾아온 것입니다. 연일 언론에서 시위 관련 속보가 나오고 전대협의 각 총련별 사수대가 파견되어 작은 소도시가 들썩이며 큰 사회적 이슈가 되자 대학 당국이 농성자의 가족들에게 연락한 것입니다.

사수대로부터 아버지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만나봐야 뻔한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빨갱이 짓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며 강제로 저를 끌어가려 할 것이고, 그에 맞서 저 역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화를 낼 뿐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함께 있던 선후배들도 아버지를 만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저의 마지막 자리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이미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동지였던 두 사람을 그렇게 잃고, 저는 또다시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끝내 우리가 저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독하고 모진 마음을 먹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품 안에 써 놓은 유서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참고 있었던 이유는, 다만 단 한 명이라도 끝까지 힘을 보태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쩌면 오늘이 아버지와 저의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가 왜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아버지의 기준은 틀렸다'고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결심한 그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후 이 자식이 왜 그 길을 걸어갔는지 말씀드리는 것이 어린 시절 착하고 말 잘 듣던 아들이 해야 할 마지막 도리라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저는 그런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도 없었습니다. 농성장을 벗어나 아버지가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아버지는 강제로 저를 붙잡고 다짜고짜 차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완력에 저 역시 맞섰습니다. 밀고 버티는 상황에서 저는 아버지에게 소리쳤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런다고 제가 차에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시끄러워. 빨리 안타면 넌 죽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런다고 제가 아버지에게 힘으로 밀리겠습니까? 그만 하세요."

대화를 통해 아버지와의 간극을 채우고 싶었던 기대가 무너지자 저는 아버지에게 소리치며 화를 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완고한 아버지, 권위적이고 도통 대화가 불가능한 그 아버지가 제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습니다.

"제발 상만아. 이 아버지 말을 들어다오. 지금 안 가면 경찰이 너를 잡아서 감옥에 처넣겠다고 전화를 했어. 그러면서 오늘 안으로 널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으니 제발 이 아버지의 말을 한 번만 들어줘. 이 아버지가 빈다. 제발…."  

눈물이 아버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호소에 저는 순간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저의 몸은 차 안으로 밀어 넣어졌고, 동시에 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옥바라지하던 아버지가 석방된 아들에게 내민 담배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밀쳐져 태워진 차 안에서 저는 아버지에게 "지금 차를 세우지 않으면 도로로 뛰어내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차는 서지 않았고, 아버지는 "만약 네가 뛰어내린다면 나도 같이 뛰어 내리겠다"며 "제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만 대답하셨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저는 순간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모양입니다. 아직 추운 3월, 근 일주일간 밤샘 농성을 하며 제대로 잠 한숨 못 잔 제 육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그만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든 것은 얼굴에 와 닿은 차가운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그곳은 검문소였습니다. 열린 차 문으로 총을 겨눈 경찰에게 저는 이내 체포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은 제가 차에 태워져 출발할 때부터 이미 차량 번호로 수배를 내려놓고 검문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 고마웠습니다. 만약 그렇게 집으로 끌려갔다면 저는 평생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경찰이 저를 체포하니 오히려 고마웠다고 할까요. 구속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고사하고, 분신으로 사경을 헤매는 친구를 두고 농성장을 벗어났다는 도덕적 자책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체포된 저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재판을 받아 석방될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입니다. 세상 일, 참 알 수 없음을 이때 처음 제대로 알았습니다. 묘하게도 아버지는 이후 제 운동가로서의 삶에서 최대 후원인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있던 동안 아버지는 꼬박꼬박 저를 면회하러 오셨고, 영치금과 필요한 것을 챙겨주며 소위 '옥바라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석방되던 날, 아버지는 두부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조용히 건네주셨습니다. 담배였습니다. 막상 아버지는 흡연하지 않던 분이었는데도, 누군가에게 "감옥에서는 금연이라 담배를 못하니 그것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듣고 이 아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나름대로 준비한 소위 '이벤트'였던 것입니다.

생각이 달랐던 아들과 아버지의 '특별한 화해'

95년 5·18 학살자 처벌 범국민대회 행진 학교를 졸업한 후 재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이 당시 아버지는 얼마되지 않는 활동비를 받고 있던 아들 몰래 생활비를 건네주곤 했음을 뒤늦게 아내에게 듣곤 했다.
▲ 95년 5·18 학살자 처벌 범국민대회 행진 학교를 졸업한 후 재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이 당시 아버지는 얼마되지 않는 활동비를 받고 있던 아들 몰래 생활비를 건네주곤 했음을 뒤늦게 아내에게 듣곤 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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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아버지와의 새로운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제 앞에서 민주화 운동을 힐난하지도, 독재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석방 이후 제가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 간사를 시작으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인권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천주교 인권위 등 재야단체와 인권단체에서 일하며 직업적 운동가로 살아온 지금까지, 아버지는 적극적 지지자이자 후원인이 돼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선거 때만 되면 누구를 찍어야 할지 묻곤 하셨다는 것입니다. 1992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는 김대중 후보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내심 별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변했기로 설마 아버지가 그 '빨갱이' 김대중을 찍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 아쉽게도 김대중 후보는 떨어졌고 신한국당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아쉬워하며 "나는 분명히 김대중을 찍었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저 듣기 좋으라고 그리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 대통령선거인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며 저는 문득 5년 전 그때 그 말씀이 진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지난번에도 진짜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했어요?"
"그럼. 진짜지."
"아니. 아버지는 김대중 후보가 빨갱이라고 싫어했잖아요? 그런데 왜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아버지의 두 번째 눈물을 보았습니다.

"상만아, 내가 너한테 참 미안하다."
"네? 왜 그러세요?"

느닷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당황하고 민망하여 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너 감옥에 갔을 때 말이다. 아버지가 결국 아들을 잡아서 경찰에 넘겨주고 감옥에 보냈는데 아버지가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러니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어. 네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못 해주겠니?"

아버지의 말씀에 저 역시 울컥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날, 그러니까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태워진 그 차가 검문소에서 세워지고 끝내 자신의 눈앞에서 총을 겨눈 경찰에 의해 아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내내 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속된 아들을 감옥으로 찾아와 면회하면서 아버지는 경찰에 속아 아들을 감옥에 보낸 바보 같은 행동에 뼈아프게 자책했던 것입니다. 그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오직 그 아들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안하다. 상만아. 아버지가 못나서 너를 감옥에 보내게 되었어. 앞으로도 아버지는 네가 원하는 사람 꼭 찍을 테니 미리 꼭 말을 해줘. 전두환, 노태우 이것들이 내 아들을 감옥에 보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왜 내가 그놈들을 찍어줘?"

2002년 돌아가신 아버지, 왜 진작 말씀 못 드렸을까... "아버지, 사랑합니다"

대학 졸업식날 아버지와 함께.. 1990년 대학에서 제적된 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1993년, '운동권 관련 제적생 복적조치'에 따라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던 날 아버지에게 학사모를 씌워 드린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날, 아버지는 참 기뻐하셨다.
▲ 대학 졸업식날 아버지와 함께.. 1990년 대학에서 제적된 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1993년, '운동권 관련 제적생 복적조치'에 따라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던 날 아버지에게 학사모를 씌워 드린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날, 아버지는 참 기뻐하셨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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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부정은 이제 추억이 되었고 기억이 되었습니다. 2002년, 또다시 이 못난 아들이 그토록 당선을 바라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던 아버지는, 그러나 그의 당선을 채 보지 못하고 오랜 병환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저는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잊지 못합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동네 복덕방 하는 이에게 들었다며 조심스럽게 저에게 물으셨죠.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노무현이가 무슨 대통령이 되겠냐며 복덕방 하는 이가 말하던데, 정말 노무현이 고등학교 밖에 못 나왔냐?"
"아버지. 노무현 후보가 가난해서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건 사실이지만 그 후 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한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대번에 "그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며 환하게 웃으셨죠. 저는 아버지의 그 환한 웃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아들, 그래서 시작한 학생운동 과정에서 아버지와 충돌하면서 제가 던진 그 많은 비수 어린 말에도 저의 철없음을 안아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불효자였지만, 저는 뒤늦게야 아버지가 너무나 그립고 또 아프게 다가옵니다.

채 세상을 알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그래서 굶주리고, 배우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받았던 아버지. 그래서 본인의 그 남모를 고통을 제 자식에게는 물러주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제 기준과 가치로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그 잘못을 빌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왜 아버지에게 이 말을 진작 못했을까요.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식이었음을 자랑스럽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입니다' 공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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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