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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잠금쇠가 3개나 있는 모텔 방에서 보낸 하룻밤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따금 복도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나 발소리가 들렸지만, 내 방 앞에서 그 소리가 멎는 기색은 없었다.

 

배낭을 방에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자 평창읍 가게의 불은 하나씩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읍을 가로질러 영월이나 정선으로 빠지는 도로는 일찌감치 한산해지고 있었다.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저녁식사를 할 만한 곳을 물색한다는 그럴싸한 이유로 하릴없이 평창 읍내를 배회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평창 읍내를 돌아다녔다. 종일 걸었더니 발이 퉁퉁 부어서 아팠지만 그렇다고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발의 통증은 사라질 터. 걸을 수 있을 때 걸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결국 내가 저녁식사를 하려고 찾아든 곳은 전국 어딜 가나 있는 체인형 분식집이었다. 오다가다 아무나 부담 없이 들어가 가볍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평창에 왔으니 한우고기를 먹는 것도 좋겠지만 혼자 고기 집에 들어가 불판 앞에 앉아 고기를 굽는 뻘줌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아 고기 집은 간판만 구경하고 돌아 나왔다. 고기는 다음 기회에.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녁식사를 하고, 모텔 근처에 있는 동네 슈퍼에 들러 캔 맥주 하나를 샀다. 쥔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여기 사람이 아니시네요, 한다. 차림새를 보면 티가 나나? 나는 그냥 씨익 웃었다. 쥔아저씨는 캔 맥주를 그냥 내밀다가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내준다.

 

평창의 밤은 조용했다.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자동차가 달리면서 내는 소음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인구 9000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는 어딜 기웃거려도 낡고 오래되어 활기가 사라진 느낌만을 팍팍 풍겼다. 

 

그대들, 고이 잠들어 계신가?

 

아침에 나는 모텔 방을 나서기 전에 신발을 점검했다. 어제 뇌운계곡을 걷다가 신발 끈이 끊어져 임시변통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신발이 오늘 몇 시간은 더 걸어도 견뎌줄 것 같아 최종 목적지인 노산성(魯山城)에 오르기로 했다.

 

높이 419m인 노산에 있는 노산성은 둘레가 517m로 그리 크지 않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평창백성들이 이곳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 평창군수였던 김광복이 쌓은 성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성을 쌓은 것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성을 쌓는 것은 외부의 적을 막으려는 것일 터, 전쟁이 끝나면 성은 효용가치를 잃고 버려지게 마련이 아닐지. 그래서일까, 산성은 허물어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성벽은 사라지고, 산책로가 된 길만이 남아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할 때는 제법 그럴싸한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런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산책로를 몇 번이나 빙빙 돌아야 했다.

 

대신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운 이들을 기리는 전적비가 우람하게 세워져 있었다. 성은 허물어져 돌덩어리들만 남았더라도, 산성을 따라 도는 길은 남아 있어 그 길을 걸었다. 흙길은 포근하면서 부드러워서 걷기 좋았다. 멀리 평창읍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지금이야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강원도가 아주 외진 곳이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지만, 임진왜란 때는 달랐을 것이다. 왜군은 험준한 산을 몇 개나 넘어 이 땅으로 몰려들었을까? 성을 정비하고 무기를 모으면서 그들과 대적해서 싸울 준비를 하던 민초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들이 수런거리면서 돌을 모아 성을 쌓고 있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민초들의 숨결이 무너진 돌담 위에 아로새겨진 것 같았다.

 

임진왜란 전적비가 세워진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현충탑 뒤에 서 있는 소박한 검은 비석은 한국전쟁 때 생명을 바쳐 싸운 이들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죽은 이들을 위해 묵념을 한다. 그대들, 고이 잠들어 계신가?

 

현충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얀 꽃이 활짝 핀 목련나무가 우아한 자태로 자리 잡고 서 있었다. 목련을 보고 있자니 꽃송이마다 죽은 이들의 넋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강원도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길을 따라 개나리도 피어 있었다. 그리고 풀숲에 제비꽃이 수줍게 숨어서 피었다. 물이 오른 나무는 싱그럽게 깨나는 중이었고, 청설모는 바쁘게 나무를 타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난 반가운데, 니들은 도망치기 바쁘구나

 

봄은 소리 없이 남쪽에서 달려와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땅속에서 숨죽인 채 숨어 있던 꽃씨들을 흔들어 깨웠나 보나. 그제야 어제 뇌운계곡을 따라 걷다가 길 옆 도랑에서 발견했던 개구리들이 기억났다.

 

도랑을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이 깃든 물체가 내는 소란스러운 소리는 여인네의 수다처럼 귀에 감겨져 왔고,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내가 도랑에 가까이 가니 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잘못 들었을까?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서 있자니,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도랑 안을 들여다보니 시커먼 등짝을 한 개구리 한 마리가 바쁘게 도망치고 있었다. 녀석은 내 기척을 눈치 채고 경계심이 발동한 것이다. 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녀석의 발끝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개구리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도랑을 따라 걸어가면서 눈여겨보니 열댓 마리는 족히 넘는 개구리들이 거기에 있었다. 어떤 녀석은 내 시선이 머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죽은 듯이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너, 살아 있는 거 다 알거든. 내가 큰 소리로 말해도 녀석은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만물이 깨어나는 봄이라더니, 길에서 드디어 개구리를 만났구나, 싶었다. 나는 반가운데 녀석들은 나를 무조건 외면하고 싶어 하는 봄이었다.

 

노산성 산책로는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가볍게 걸음을 내딛는 느낌이 좋았다. 폭신한 길이 마음에 들었고, 평창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것도 좋았다. 하늘은 말간 푸른빛이었고, 구름이 잘 펴서 붙인 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걷기 좋은 날에 걷기 좋은 길을 걷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평창에 가거든 노산성에 꼭 들르시라.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평창, #노산, #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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