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92년 9월 17일, 빙그레 이글스가 해태 타이거즈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즌 17차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열흘 전에 2위 그룹과 10경기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이글스였지만, 타이거즈와의 승부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1991년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 해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2위를 달리던 해태 타이거즈였고, 또 역대 최강이라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완성하고도 이글스는 유독 타이거즈에게만은 시즌 4승 12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해 역시 정성껏 쑨 죽으로 호랑이 밥을 챙기는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양 팀의 기둥투수 송진우와 이강철이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정규시즌의 남은 경기는 17일과 18일 두 경기 뿐이었고, 그 안에 뭔가 결판이 나야 했다. 그 밖에 해태의 이순철도 롯데의 박정태를 누르고 최다안타 타이틀을 챙기기 위한 안타 한 개가 필요했다. 

물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6대 0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5회 초에 선발투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프로야구 최초의 '다승(19승)-구원(25 세이브포인트)' 2관왕을 배출했다. 그러자 이강철의 동료 문희수가 5회에 자진등판해 이정훈과 장종훈의 몸통에 화풀이를 하고 퇴장당하는 소동을 빚었고, 그렇게 격앙된 틈에서 다시 해태의 이순철은 7회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최다안타 타이틀을 확정짓는 150개째 안타를 만들어냈다.

장종훈 타격폼 '국보투수' 선동열은 장종훈의 타격폼에 전혀 빈 틈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 장종훈은 선동열을 상대로 단 한 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선동열과 장종훈의 '격차'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정대현(SK)의 공을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해서 이대호(롯데)가 부족한 타자가 아니듯 말이다.

▲ 장종훈 타격폼 '국보투수' 선동열은 장종훈의 타격폼에 전혀 빈 틈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 장종훈은 선동열을 상대로 단 한 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선동열과 장종훈의 '격차'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정대현(SK)의 공을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해서 이대호(롯데)가 부족한 타자가 아니듯 말이다. ⓒ 한화 이글스


하지만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모두 세월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에도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남은 또 다른 대목이 있었다. 0대 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무사 1,2루에 주자를 놓고 타석에 선 이글스의 4번 타자 장종훈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해태 선발 신동수의 4구째를 때려 펜스 가운데의 가장 깊숙한 곳을 넘기는 130m 짜리 홈런을 날렸던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한국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40개의 홈런을 날리는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홈런, 야구가 가진 모순적인 매력

어쩌면 홈런은 야구가 품고 있는 가장 반 야구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야구는 촘촘하게 짜인 팀플레이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전과 협력플레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3할 타자와 2할5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단 5% 차의 확률에 근거해 주전과 후보를 나누고 타순을 짜고 작전을 선택하며, 스타와 후보 선수를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홈런은 그 모든 과정들을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경기 종반 결정적인 한 점 싸움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홈런 한 방은 그 앞의 타자가 아웃카운트 하나와 바꾸며 성공시킨 희생번트, 혹은 주자가 횡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유니폼에 온통 흙물을 들여가며 성공시킨 과감한 도루의 모든 숨 가쁜 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경기 막판에 터져 나온 만루 홈런 한 방은 기선을 잡는 선취점이니, 안전궤도에 올리는 추가점이니, 사실상 승부를 가른 쐐기점이니 하며 세 시간 넘도록 해설가가 열을 올리던 모든 순간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물론 홈런을 치겠다는 일념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도 있을 수 없고, 폭죽 같은 홈런포에 의지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겠다는 감독도 있을 수 없다. 야구감독은 경기장의 선수들을 향해 수많은 사인을 날리지만 '홈런을 치라'는 사인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역설적인 매력 때문에 홈런은 야구장으로 팬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 '왜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적당한 곳에만 떨구면 안타가 되는 것을, 굳이 외야수가 지키고 선 곳까지 멀리 때려내느라 헛수고들이냐'고 질타했다는 초창기 어느 야구단 사장의 생각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멀리 강하게 때릴수록 대단한 것'이라는 단순함. 그리고 어떤 궁지에서도 '번쩍' 한 순간에 뒤집어내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호쾌함.

그래서 야구를 미국인들의 삶으로 만든 것은 베이브루스(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였고, 일본인들의 자존심으로 만든 것은 오 사다하루'(일본에서 태어난 중화민국 국적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였다.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러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

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1992년 롯데 자이언츠 우승의 주역, 염종석 1992년 최고의 선수는 장종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것은 염종석이었다.

▲ 1992년 롯데 자이언츠 우승의 주역, 염종석 1992년 최고의 선수는 장종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것은 염종석이었다. ⓒ 롯데 자이언츠


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에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장종훈은 17일에 40홈런을 날리며 송진우의 19승째를 만들어냈고, 18일에는 이강철의 19승 도전을 좌절시키는 41호 결승홈런을 날리며 다시 송진우에게 단독 다승왕 타이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칭호와 함께 2년 연속 MVP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연습생 출신의 홈런왕, 하지만 가을에 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신생팀 빙그레의 월급 40만 원짜리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이듬해 팀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틈에 1군 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던 소년.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은 뒤 8cm나 자란 키만큼 기량도 쑥쑥 성장해 불과 4년 만에 홈런왕 타이틀을 접수했고, 1991년에는 한국프로야구 35홈런과 114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더해 .345의 타율과 21개의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두고 기어이 40홈런 벽을 넘어서며 후배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다.

그가 세운 41홈런의 벽은 98년에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의해 무너졌고, 99년에 50개의 벽을 넘은데 이어 2003년에 56개까지 달려간 이승엽의 기록 뒤편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물론 1992년 이후 한국 야구의 홈런시대가 개막된 것은 아니었다. 장종훈이 불운 속에 깊은 부진의 늪에 빠졌던 1993년에는 김성래가 28개로 홈런왕이 올랐고, 그 뒤로 다시 김상호와 김기태가 25개만으로 홈런왕에 오르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장종훈이 있었기에 이승엽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종훈의 41홈런 이후 해마다 새로운 시즌이 막을 올리고 누군가 연달아 서너 개라도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하면 신문과 방송은 그것이 과연 1992년의 장종훈에 견주어 어느 만큼 빠르거나 느린 것인가를 가늠했고, 그런 과정에서 후배 타자들이 근육을 키우고 스윙 궤적을 다듬으며 도전하는 목표선이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져 나온 장종훈의 홈런 두 방은 이글스 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데 이어 '눈엣가시' 해태 타이거즈의 기를 꺾는 기분 좋은 결정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해의 우승은 3위로 올라와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꺾은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이글스에 네 번째 준우승을 선사한 롯데 자이언츠였다. 시즌 내내 불을 뿜은 장종훈의 대포는 한국시리즈 기간 단 한 차례도 가동되지 못했고, 반면 롯데 자이언츠의 소총부대는 쉼 없이 단타와 번트와 도루의 잔공격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리즈 다섯 경기에서 나온 단 두 개의 홈런은, 롯데 타선에서도 소문난 소총인 이종운과 공필성이 때려낸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홈런이 가진 역설의 한 면인지도 모른다.

은퇴식 장종훈이 은퇴식에서 후배 정민철과 부둥켜안고 있다.

▲ 은퇴식 장종훈이 은퇴식에서 후배 정민철과 부둥켜안고 있다. ⓒ 한화 이글스


장종훈 염종석 정민철 1992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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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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