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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시인 윤동주 생가와 그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연변의 명동에 간 적이 있다. 한 밤중에 윤동주 생가를 둘러보기 전에 들렀던 곳이 대성중학교다. 대성중학교는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윤동주 생전 모습과 장례식 때의 장면들이 몇 점의 사진으로 남아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청송 심련수 시조집>
 <청송 심련수 시조집>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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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한쪽엔 작은 책방이 있다. 서점이라기엔 뭣하다. 그저 수십 권의 책을 진열해놓고 필요한 사람들은 책을 사간다. 책방엔 조선족 처녀 하나가 수줍은 표정으로 책 구경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때 책방에서 하나 구한 게 있다. 청송 '심련수 시조집'이다. 여러 권의 윤동주 시집과 다른 책을 놔두고 이 시집을 골라잡은 이유는 단지 심련수라는 생소한 이름과 교복을 입고 있는 청년의 사진 때문이다.

시집을 구했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조에 관심은 있었지만 당시의 시의 정서와 지금의 나와 별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다. 그렇게 몇 개월을 읽다 말다가 만지작거리다 인내를 가지고 읽은 게 엊그제다.

그런데 이상한 게 글이다. 운문도 그렇고 산문도 그렇다. 한동안 눈에 안 들어왔던 글도 나중에 읽으면 잘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심련수 시조집'도 그렇다.

일단 시집 자체는 투박하다. 겉표지는 투박하지만 내용은 그냥 인쇄소에서 대략 찍어낸 느낌이다. 그렇다고 시의 내용이 막 찍어냈다는 것은 아니다. 질(?) 좋은 책만 보다 투박한 책을 접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는 게다.

심련수의 시를 읽다보면 이게 시조인가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3장 6구 형식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는 시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종장에서 파격 형식을 보이는 시도 있고, 중장에서 한 행이 더 늘어나 4행 시조 형태도 있다. 2행 시조 형태도 있다. 이 책의 서문엔 심련수가 가장 좋아하고 시조 쓰기에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 노산 이은상이라 한다. 심련수의 2장 시조도 이은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심련수의 시들을 읽다보면 생소한 언어도 종종 튀어나오지만 지명이 많이 나온다. '신계사' '원산부두에서' '외금강역' '온정리의 하로밤' '금강문' 등 수십여 편이 여행지 같은 지명을 딴 글감의 시를 지었다. 이는 심련수가 송도나 금강산을 답파하면서 여행지에서 느낀 소회들을 자주 시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헌데 그 속엔 단순히 여행지의 감상만을 적은 게 아니다. 민족의 설움이나 아픔, 그리움 등을 노래하고 있다.

부두에 남긴 설음 쌓여 또 쌓여
荒波(황파) 밀려드는 이 방축 되었는가
너무나 애통하여 돌과 같이 굳었는가

배 소리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데
못 잊을 님 보내는 사람이야 오죽이나 하랴
갈매기 기웃거리며 또 우는가 엿보더라.
- <元山埠頭에서>, 1940년 5월 7일

부두는 떠나고 오는 곳이다. 떠나보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자의 마음이 너무 애통하여 돌처럼 굳어가는 데 속도 모르고 갈매기는 우는지 안 우는지 기웃거리며 엿본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는 여행지에서 몸을 쉬면서도 빼앗긴 조선의 땅을 생각한다. 조선민들의 따스한 정을 생각한다.

旅路에 곤한 몸을 마음껏 쉬이려고
溫泉의 뜨거운 물에 몸을랑 잠그고서
아- 아, 조선의 땅도 식지는 않을 것을 알엇소.

만나는 사람마다 뜨거운 情이 흐르고
건느는 말삼씨도 情다웁기 짝이 없다
이 한밤 길어저 주소 마음껏 있어 보게
- <溫井里의 하로밤>, 1940년 5월 7일

그는 시조라는 형식을 빌려 시를 쓰면서도 시조의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시를 썼다. 그렇다고 시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형식을 취하면서도 형식에 얽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심련수의 시를 읽다보면 정서 표출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아마 이런 점이 조금은 투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집을 엮은 김룡운 선생은 이를 두고 윤동주 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호방성과 거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같은 북간도에서 살아가며 민족의 슬픔과 아픔을 그리고 정결하게 살아가고자 했던 두 인물, 심련수와 윤동주. 그런데 윤동주는 우리에게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심련수는 그 이름마저 생소하다. 그런 점이 아쉬웠는지 김룡운 선생은 윤동주와 심련수를 동시대의 민족 시인으로서 쌍벽을 이룬다고 말한다. 사실 그 시를 읽다보면 민족 시인으로서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물이 되려면은 이 江山 물이 되고
바위가 되려거든 이곧에 바위 되소
願하긴 내 죽거든 물 바위 되려 오겠소.

盤石 위 앉아 시며 그 소리 듣자오니
仙女의 淸雅한 노래 이 아닌가 하노라
- <萬暴洞 4수 중 2수>, 1940년 5월 8일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란 읽혀질 때 시로서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심련수라는 이름도 연변에 가서 책을 구입하고야 알았고 그의 시를 처음 읽어 보았다. 심련수를 발굴하고 그의 시를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엮은이들의 노력과 품이 헛되지 않으려면 국내에서도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민족 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선 일부 학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의 시가 대중들에게 많이 읽혀져야 할 것이다.


태그:#심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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