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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헌(58)씨는 재일동포 2세다. 그는 1973년 일본 교토대학 재학 당시 조총련계 '재일대남공작원'에 포섭되어 사상교양과 지령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주요 일간지 기사 등 각종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고 재일대남공작원에게 국가기밀을 보고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 받았다.

그러나 2009년 10월 6일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는 윤정헌씨가 간첩죄를 쓰게 된 1970-80년대에 걸쳐 진행되었던 보안사(현 기무사)의 모국유학생 대상 '수사근원발굴공작'은 군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재일동포 모국유학생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보안사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였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불특정 재일동포 모국유학생을 대상으로 구체적 범증 없이 내사 및 수사를 진행하여 기본권을 현저히 침해하였다고 그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윤정헌씨를 포함해 간첩죄로 처벌된 유사 사례의 모국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출생, 성장한 후 모국에 유학와서 보안사에 검거될 때까지 한국 국가보안법 등에 대하여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었고, 모국유학생을 모집한 재일대한민국공관과 민단에서도 국가보안법과 정치현실에 관한 사전 교육을 안 했다고 했다.

1984년 8월 27일 전두환 정권하의 보안사는 재일교포 윤정헌씨를 연행해 그해 10월 8일까지 43일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하고 회유, 협박하여 허위자백을 받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를 한 사실이 진실위 조사결과 확인되었다.

당시 검찰은 장기간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의 피해자인 윤정헌씨를 법원에 기소하였다. 법원도 임의성이 의심되는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 등을 유죄 증거로 삼아 윤정헌씨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하였다.

진실위는 보안사가 수사권이 없음에도 모국유학생 윤정헌씨를 위법하게 수사하고 불법감금 가혹행위로 사건을 허위조작한 점과 검찰이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존, 무리하게 기소한 점에 대하여 국가는 윤정헌씨와 관련인들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더불어 국가는 윤정헌씨와 그 가족의 피해를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서울고법 "고문 못 이겨 거짓 자백, 간첩행위 증거 없다"

그 후 윤정헌씨는 진실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2010년 1월 재심을 신청하게 되었고 지난 4월 8일 서울고법은 윤정헌씨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은 가혹행위와 심리적 억압이 없어 허위 자백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죄를 선고한 게 부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수사기록이나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 등에 비춰보면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고 간첩행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본 1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발표했다.

1심은 '고문을 동반한 불법적인 수사로 작성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으며 윤씨가 수집했다고 검찰이 주장하는 기밀은 대부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라 기밀이라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윤정헌씨의 재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며 2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자 상고했다.

기자는 진실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임채도 전 조사관을 만나봤다. 그는 진실위에서 공무원직장협의회 위원장도 맡은 바 있다. 다음은 임채도씨와 지난 4월 13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법원에서 윤정헌씨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는데 검찰에서 집요하게 상고를 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임채도 전 조사관
 임채도 전 조사관
ⓒ 임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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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헌씨를 기소한 당시 공안부 검사는 가족과 변호인이 있는 자리에서 윤정헌에게 '지금이라도 자백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이때 윤정헌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85년 당시 공판정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내용이다. 유죄 판결을 내린 당시 법정은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여 검찰에서의 피의자진술조서를 '신빙성있는 상태'에서의 진술이라며 증거 채택했다.

그러나 윤정헌씨는 공판정에서 당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40일 이상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심한 고문 가혹행위를 받아 허위자백을 하였고, 검찰조사에서 보안사 조사내용과 다르게 부인하거나 번복하면 다시 보안사에서 조사할 수 있다며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보안사에서 윤정헌씨에 대한 고문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고, 고문으로 인한 공포감과 심리적 억압상태가 검찰조사에까지 이어져 검찰에서의 진술의 임의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최근 신문기사를 보니 당시 쟁점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재심 법원이 객관적으로 판단했으리라 믿는다."

- 검찰의 계속적인 항소나 상고조치에 대해 재일교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분들의 부담도 클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억울한 분들에 대해 국내 법조인들이나 인권단체의 지원이나 관심은 어느 정도 되나?
"그 점이 가장 아쉽다. 2007년 대법원이 사법부 과거사정리 차원에서 검토한 1972년부터 1987년 사이 시국공안사건 판결 가운데 불법구금과 고문 등 재심사유가 있는 것으로 파악한 사건은 224건인데, 이 가운데 재일동포 관련 사건은 68건이다. 검찰도 지난 권위주의정권 시기 발생한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검찰이 공익의 대변자로서 자기역할을 다한다면 인권침해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윤정헌 씨의 경우 당시 홍성우 변호사가 변론을 했다. 공안기관이 사법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에도 용기있는 변호사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약자의 편에 서서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분들이 있어 법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현재는 더많은 인권단체와 훌륭한 법조인들이 있다. 재일동포 조작간첩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 이 사건이나 다른 진실위 사건을 조사하면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과거사를 들추어 무엇하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과거사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무임승차자(프리 라이더: free-rider)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과거사 뿐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사를 조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는 증거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과거사나 독도에 관한 망언에 대해 그들의 미성숙을 질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과거사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참회와 반성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 우리 사회 일각의 무임승차자들은 공동체의 책임을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임승차한 현재 상태를 즐기고 싶을 뿐이고 그 즐거움을 깨뜨리는 시도가 일체 불온하게 느껴질 뿐이다. 소아적 태도다."

"조국은 우리 가족을 버렸지만 우리는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 취임 후 공무원직장협의회 대표로서 겪었던 애로사항은?
"4년여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진실위가 다루는 사안이 워낙 엄중했다. 여러 가지 논쟁과 충돌이 불가피했다는 점도 있다. 위원장의 진보나 보수성향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합리적 토론으로 좋은 결론을 도출한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관들로서는 양심에 따라 조사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아무런 근거없이 '편향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때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조사관들이 '편향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면 우리의 조사결과를 신중하게 받아들인 재심법원도 '편향적'이라는 말이 된다. 이건 억지다. 수십 년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피해자와 유족의 입장을 보고서에 반영한 것이 '편향'이었다면 달게 받아들이겠다. 4년여 활동기간동안 모든 조사관과 직원들이 나름대로 노력했다.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위원회의 정치적 제도적 환경이 조사활동을 원활하게 뒷받침하지 못한 부분도 아쉽다."

- 지난 3월 월간조선은 "납북자위에 재취업한 과거사위 조사관들" 제하의 기사에서 "전쟁납북자위 조사관 7명 중 4명이 이념편향 논란을 일으켰던 진실화해위 출신이며, 이들은 진실화해위 활동을 주도했던 진실화해위 직협 소속이었다"며 비난한 바 있다. 자유민주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문제에 시비를 제기하는 월간조선의 비난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대통령 후보자의 탈세문제나 고위공직 후보자의 범법행위는 범죄행위인데도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면서 불법단체도 아닌 정당하고 합법적인 공무원 직장협의회 활동을 마치 무슨 범죄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원색적으로 비난한 월간조선에 보도행태에 대해 진실위 직협 전 위원장으로서 입장을 이야기 한다면?
"직업선택의 자유를 놓고 시비를 거는 것은 유감이다. 공무원직장협의회는 '공무원직장협의회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기관 공무원들이 직장 내 일을 기관장과 자율적으로 협의하여 해결해 나가는 민주적인 협의기구이며, 공무원이 자유롭게 결성하고 기관 고유의 근무환경개선, 업무능력향상 및 업무와 관련된 고충사항과 기타 기관 발전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는 공무원단체다. 노동조합도 아닌 이런 임의단체가 진실위 활동을 주도했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억지인지 모르겠다. 진실위원회는 법률과 시행령에 따라 15인의 위원들이 다수결에 의해 모든 결정을 한다. 진실위원회 조사관들이 이 기사로 인해 재취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다. 구체적인 피해사례와 규모를 산정하고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다."

- 재일교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분들이 진실위 진실규명 이후에도 경제적 사정 등 여러 이유로 재심이나 명예회복노력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분들을 위해 정부나 법조인, 인권단체 등에서 어떤 지원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나?
"피해자들은 재일동포 2,3세들로 대개 1970년대와 80년대에 모국유학생 신분으로 국내에 들어와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수년에서 십수 년 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20, 30대가 모두 헝클어져버렸다. 신체적 정신적 상흔은 더욱 깊다. 고문피해의 후유증은 지금도 크다. 현재까지 그들은 믿었던 조국에 대한 배신감과 다른 한편에서 버릴 수 없는 민족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어느 피해자의 아내가 직접 했던 말이다. '조국은 우리 가족을 버렸지만 우리는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1970, 80년대 남북간의 극단적 체제대결의 희생양이 그들이다.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

차제에 재일동포에 대한 국가차원의 관심과 지원도 촉구하고 싶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데에는 재일동포들의 도움이 컸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기억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경제성장의 밑거름에 재일동포의 기여가 크다. 나라가 가난할 때 국내에서 크고 작은 재해나 사고가 발생하면 재일동포가 가장 먼저 모금액을 전달해주었다. 1988년 올림픽 때 재일동포들이 1억달러 이상을 헌금했다. 한일수교 된 후 일본주재 대사관과 영사관 건물조차 없을 때 재일동포들이 합심하여 모금해서 땅과 건물을 마련했다. 비단 이런 도움에 대한 되갚음이 아니더라도 재일동포 문제의 뿌리에서 국가의 책임을 느꼈으면 한다.

- 조사관으로서 또 직협 위원장으로서 진실위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이나 감회, 의미 있었던 순간들은?
"과거사는 과거로 끝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인권침해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는 말이 있다. 가리고, 잊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국가차원의 과거사정리 활동이 끝난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지속적인 과거사정리를 위해 향후 어떤 조치나 노력들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국가차원의 과거사 정리와 화해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최소한 유해발굴, 희생자 배보상법 마련, 과거사재단과 같은 진실위원회 후속조치 권고안이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입법가들의 노력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 진실위 전 조사관 입장과 시선을 담은 백서를 준비 중인데 그 의미와 진행상황, 향후 발간계획 등을 정리하여 소개한다면?
"우리 진실위원회는 세계 다른 나라 진실위원회(TRC) 가운데 가장 긴 기간 동안, 가장 광범위하게 과거사조사가 이루어졌다. 매우 독특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물론 한국 진실위원회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 또한 평가의 대상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는 올바른 평가를 위한 기초자료로서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일선 조사관들의 소회를 기록해두고자 할 뿐이다."


태그:#김성수, #간첩조작,뉴라이트 이영조,과거사위,국가보안법, #임채도, #윤정헌, #재일교포, #진실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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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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