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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훈련을 대신 받는 일로 용돈 벌이를 하는 천달수(박중훈 분). 의뢰인이 송금한 사례비 5만 원을 찾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가 100억 원이 통장에 입금된 사실을 확인한다. 천달수는 그 돈을 찾아서 물 쓰듯 쓰기 시작하는데….

오래된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의 한 장면이다. 어느 날 내 통장에 거금이 들어왔다면?혹은 길거리에서 돈을 줍거나 지하철에서 고가의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번 이야기는 돈과 예금통장에 얽힌 재판 이야기다.

어느날 통장에 들어온 4억 원... 돌려주지 않았더니

ⓒ 서우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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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외국에 회사를 차린 이방인(가명)씨. 의욕을 갖고 시작한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적자는 쌓이고 직원들 월급은 밀리고 거래처의 빚 독촉은 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은행 잔고를 확인해보고 깜짝 놀랐다. 정체불명의 돈이 4억이나 입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웬 횡재인가 싶었다. 돈을 송금한 사람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도 해봤지만 일단 쓰고 보기로 결정했다. 거래처의 빚을 청산하고 직원들 월급을 줬다. 그렇게 숨을 좀 돌리고 나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송금한 사람이 고소를 한 것이다.

잘못 입금된 통장의 돈은 돌려주는 게 맞다. 이씨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사상으로는 당연히 반환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이게 형사처벌 대상인지 따져봐야 한다.

크게 3가지 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절도, 횡령, 점유이탈물횡령죄.

절도는 법률상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는 행위"이다. 형법에서 절취란 남의 물건을 주인 의사에 반해 가져와야 성립한다. 이씨는 통장에 이미 들어온 돈을 써버렸을 뿐 남의 돈을 빼앗아 온 것이 아니므로 일단 절도는 아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횡령과 점유이탈물횡령죄다. 두 죄를 비교해보자.

횡령 :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
점유이탈물횡령 : 유실물, 표류물 또는 타인의 점유를 이탈한 재물을 횡령했을 때

횡령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을 기본으로 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직원이 회사 돈을 몰래 빼돌리는 것이다. 또한 할인해주겠다고 받은 약속어음을 자기 빚을 갚는 데 써버린다거나, 팔아달라고 부탁받은 보석을 판매한 후 돈을 챙겼을 때 횡령죄에 해당한다.  

점유이탈물횡령은 어떤 죄일까. 주인의 손을 떠난(점유를 이탈한) 물건 등을 챙겼을 때 성립하는 죄다. 예를 들어 잘못 배달된 편지나 택배를 받았다가 돌려주지 않거나,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많이 돌려받은 것을 알고도 챙겼을 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노트북이나 가방 따위를 몰래 가져왔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도 엄연한 점유이탈물횡령이다. 징역 1년 또는 벌금 300만 원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사례에 나온 이씨의 경우를 보자. 1심과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이씨를 점유이탈물횡령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횡령죄에서 재물의 보관이라 함은 위탁관계가 있어야 한다"며 "피해자의 돈은 점유를 이탈해 우연히 이씨의 계좌에 입금된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입금된 돈은 점유이탈물"이라는 것이다. 즉, 우연히 입금된 돈에 대해 계좌 주인이 재물을 보관할 지위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검찰은 법원의 판단에 수긍할 수 없었다. 유사한 판례에 비추어 볼 때 횡령죄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검찰이 염두에 둔 사례는 2005년 사건이었다. 내막은 이렇다.

대법원 "통장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돈도 보관할 의무 있다"

통장에 정체불명의 돈이 입금됐다면 함부로 쓰지 말자.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다.
 통장에 정체불명의 돈이 입금됐다면 함부로 쓰지 말자.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다.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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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전주인(가명)씨는 자신의 부동산을 현소유(가명)씨에게 7억 원에 팔기로 하고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현씨는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으로 나누어 지급하기로 하고, 전씨는 잔금 지급일에 부동산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약속대로 계약금과 중도금을 이미 보내 준 현씨는 마지막으로 잔금 3억 원을 전씨에게 보냈는데 직원의 착오로 2번 입금하는 실수를 했다. 그런데 전씨는 이 돈을 돌려주지 않고 모조리 써버렸다. 오히려 "나는 정당하게 받은 돈이며 남은 돈도 없다"며 배짱을 부렸다.

현씨 처지에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이때 법원은 "착오로 송금된 3억 원에 대해 전씨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돈을 보관하는 자의 지위에 있다"며 "이 돈을 임의로 소비한 행위는 횡령죄"라고 판단했다. 전씨는 이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은 [사례 1]과 [사례 2]는 같은 사안이 아니라고 봤다. [사례 2]는 전씨와 현씨 사이에 계약관계가 있었던 반면, [사례 1]에서 이씨는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입금을 받았기 때문에 '보관자'로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까지 왔다. 2010년 12월 대법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어떤 예금 계좌에 돈이 착오로 잘못 송금되어 입금된 경우에는 그 예금주와 송금인 사이에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보관관계가 성립한다. 송금 절차의 착오로 입금된 돈을 임의로 인출해 소비한 행위는 횡령죄에 해당한다. 송금인과 이씨 사이에 별다른 거래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거래관계가 있건 없건 통장에 들어온 돈은 잘 보관할 의무가 있다는 결론이다. 결국 이씨에게도 횡령죄가 적용됐다. 통장에 정체불명의 돈이 입금됐다면 함부로 쓰지 말자.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다. 마음대로 썼다가는 횡령죄를 범하게 된다.

"예금거래, 이름만 빌려줬다"는 안 통해... "예금 명의자가 통장 주인"

[사례 3] 장사내(가명)씨는 아내 조안해(가명)씨와 함께 자신의 단골 은행을 찾았다. 장씨가 모아둔 돈이 있었는데 예금자 보호를 받을 목적으로 조씨 명의로 4000만 원짜리 예금통장을 만들었다. 예금거래신청서에는 조씨가 신청인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이 통장에는 장씨의 인감이 거래도장으로 찍혀 있었고, 비밀번호도 장씨가 평소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자도 장씨의 계좌로 입금되어 왔다.

그런데 이 은행이 파산선고를 맞는 바람에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예금보험공사가 지급을 해줄 상황이 됐다. 아내 조씨는 "내 이름으로 된 예금이므로 내게 돈을 달라"고 했지만 공사는 실제 소유자가 아니라며 남편 장씨에게 돈을 지급해버렸다. 

이 통장의 실제 주인은 장씨일까, 조씨일까. 1심과 2심 법원은 장씨라고 판단했다. '겉으로는 조씨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장씨가 관리하던 통장이었으니 장씨와 금융기관 사이에 암묵적으로 장씨의 소유로 본다는 약정이 성립한 것이다', 그동안 법원의 판례도 이런 입장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9년 3월 기존의 판례를 바꾸었다. 대법원은 "통장의 비밀번호 관리, 자금출연 경위, 예금인출상황 등은 장씨와 조씨 간의 내부적 법률관계에 불과할 뿐 이를 예금계약 당사자를 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어 "금융거래는 다른 계약보다 훨씬 더 실명확인 절차를 통해 객관적으로 표시된 예금명의자 및 금융기관의 의사에 기초해 예금주를 정해야 한다"며 "금융실명법에 따라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 예금계약을 체결했다면 예금주로 기재된 조씨가 당사자"라고 밝혔다. 만일 장씨가 당사자가 되려면 "예금계약서 이상의 명확한 증명력을 가진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이런 판단은 계약 문서 해석을 둘러싼 기존의 판례가 뒷받침하고 있다. '계약당사자 사이에 문서를 작성한 경우 당사자의 내심의사에 관계없이 당사자가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 의미를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언대로 의사표시의 존재와 내용을 인정해야 한다.'

이 판결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예금명의자(예금주)가 예금 통장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태그:#예금, #통장, #돈을갖고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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