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킹스 스피치>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어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맘마미아>나 <러브 액츄얼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콜린 퍼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근데 톰 후퍼 감독은 대체 누군가. <킹스 스피치> 이전에 그가 찍은 영화래야 <뎀드 유나이티드>(2009)가 고작이다.

1974년 잉글랜드 프로축구 최강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이 된 브라이언 클로프의 이야기를 담은 <뎀드 유나이티드>. 그전에 후퍼는 <엘리자베스 1세>(2005)나 <존 아담스> (2008)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한 경력이 전부다. <킹스 스피치> 이전에 그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신출내기 감독이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그는 벼락 스타가 되었는가.

1936년 영국왕실과 에드워드 8세

 영화 <킹스스피치> 포스터.

영화 <킹스스피치> 포스터. ⓒ ㈜영화사 그랑프리

1936년 1월 20일 영국 왕 조지 5세가 숨을 거둔다. 장자상속 원칙에 따라 맏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에드워드 8세가 된다. 그러나 그는 볼티모어 출신 미국 여성 심프슨 부인과 밀애에 빠진 상태였다. 평민 출신 여성이며,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다가, 영국인도 아닌 심프슨 부인과 국왕이 결혼하는 문제는 결국 스캔들로 비화한다.

에드워드 8세는 왕가가 심프슨 부인을 집안 식구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했으나 그가 수장으로 있는 영국 국교회와 영국은 물론 영연방 각국의 확고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의 유일한 지지자는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윈스턴 처칠뿐이었다고 전해진다. 에드워드 8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결국 1936년 12월 11일 라디오로 퇴위 선언을 공포한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킹스 스피치>는 이런 내막을 짤막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준다. 살아생전에 조지 5세는 요크 공작 알버트(버티)에게 왕실의 존립근거가 얼마나 취약한지 역설한다. 술이나 먹고 바람둥이로 이름 높은 맏아들에 대한 불만을 둘째 아들에게 감추지 않는다.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영국 왕실의 위태로운 지경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버티와 조지 6세

알버트 프레데릭 아더 조지(Albert Frederick Arthur George)라는 긴 이름의 소유자. 대관식을 올리기 전에는 요크 공작 (Duke of York) 혹은 알버트 왕자(Prince Albert)라 불렸던 인물. 가족들 사이에서는 버티란 애칭으로 불렸던 조지 5세의 차남. 버티는 어릴 적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런 동생을 에드워드는 '버벅 버티'라고 놀려대기 일쑤였다.

버티에게는 말 더듬는 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타고난 왼손잡이였다. 하지만 왕가의 엄격한 법도 때문에 훈련을 거듭하여 오른손잡이로 거듭 난 전력이 있다. 또한 심한 안짱다리였던 버티는 혹독한 인내와 시련을 겪은 다음 안짱다리를 극복한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렸을 적부터 버티는 '트라우마'가 극심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영화는 버티가 말을 더듬게 된 원인을 이런 배경에서 찾아낸다. 문제는 세계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영연방 수장으로서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도버 해협 너머에서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강력한 독재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험난한 시기. 과연 버티는 난관을 극복하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있겠는가.

엘리자베스 왕비는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필한다.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더듬이 습관을 고치려고 무진 노력한다. 그녀가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홀로 찾아오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킹스 스피치>가 관객의 눈을 끄는 것은 역사적인 인물 조지 6세의 어둡고 다채로운 면모를 과장하지 않고 소박하게 잡아내는 점일 것이다.

라이오넬 로그와 조지 6세

로그를 연기하는 제프리 러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샤인>에서 자폐증을 앓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을 연기한 배우가 제프리 러쉬다. 오스트레일리아 이주민 출신 언어치료사인 로그는 자기원칙을 내세우는 인물이자 성공하지 못한 연극배우였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어 문화권 연극대본을 줄줄이 꿰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그는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의 방식으로 말더듬이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래서 번번이 조지 6세와 충돌한다. 그가 믿는 것은 학위도 아니고, 작위도 아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믿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이 겪은 전쟁 후유증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경험이 그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도록 인도한다.

그가 국왕이 될 버티와 충돌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어느 날 혼자 찾아온 버티에게 라이오넬은 산보를 제안한다. 그들은 대화 도중에 라이오넬의 허물없는 태도 때문에 충돌하고, 버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린다. 누구와도 소통하는 편한 관계를 가지려는 로그와 평민에 대한 스스럼없는 태도를 갖지 못한 조지 6세의 충돌이다.

조지 6세는 로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밝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통이란 일대일 대응관계가 자연스러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킹스 스피치>는 타고난 선민의식을 가진 아주 특별한 인간과 완전한 평민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적잖게 흥미롭다.

권력자와 언어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던 1930년대 라디오는 권력자들의 주요한 연설무기였다. 관객은 조지 5세와 에드워드 8세의 유창한 연설이 어떻게 라디오와 결부하여 큰 효과를 불러오는지 확인한다. 산업화시기에 문명의 이기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용한 도구로 작용하는지가 확연히 입증된다. 더욱이 전쟁을 목전에 둔 시기라면 어떻겠는가.

벽시계가 저녁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조지 6세 국왕의 연설시각은 여섯 시다. 남아있는 시간은 10분. 하지만 아직도 국왕은 진땀을 흘리며 버벅대고 있다. 절망과 불가능의 철벽 앞에서 괴로워하는 조지 6세. 이때 엘리자베스 왕비가 문을 열고 시간이 다 됐다고 말한다. 포기하다시피 한 얼굴로 조지 6세가 로그를 대동하고 연설장으로 입장한다.

<킹스 스피치>의 절정이다.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로그와 버티가 마주선다. 열린 창문을 배경으로 로그는 지휘하듯, 혹은 노래하는 표정으로 버티를 인도한다. 그들 사이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왕과 평민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 사명을 함께 해결해야 하는 동반자 관계다. 연설시간은 딱 9분이다. 어찌 됐을까.

피부만 권력이 아니라, 언어도 권력이다.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하는 자들에게 권력은 언제나 동반자였다. 로마의 키케로와 네로가 그러했고, 러시아의 레닌이 그러했으며, 제3제국의 히틀러가 그러했다. 가까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러했다. 최고 권력자들은 언어에 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민중의 이익과 약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웃음과 유머, 감동과 눈물을 넘나드는 로열 휴먼 코미디가 온다!"

<킹스 스피치> 팸플릿 인용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감동과 눈물 혹은 로열 휴먼 코미디(?)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크고 작은 결함과 한계를 본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과정을 보면서 공감한다. 특히 조지 6세의 말더듬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국왕과 로그가 소통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로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눌한 대로 대국민 연설문을 읽어나가는 조지 6세의 표정에는 만족감과 고마움 그리고 자신감이 서려있다. 무리 없이 연설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는 만족감. 그의 앞에서 말없이 경청하는 평민친구 로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앞으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도 잘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이다.

<도덕경> 제45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똑바른 것은 굽은 듯하고, 아주 기막힌 기교는 서툰 것 같으며, 아주 훌륭한 언변은 어눌한 것 같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번드르르하게 꾸며대고 거짓말이나 일삼는 정치가들이 득세하는 요즘 한국 정치판을 본다. 그들이 <킹스 스피치>에서 작은 부끄러움이라도 느꼈으면 하는 게 비단 나만의 바람일까. 이 땅의 권력자들이여, 최소한이나마 성찰하고 자중하라. 말을 더듬었던 영국 왕 조지 6세에게 국민과 소통하는 법이라도 제대로 배우기 바란다.

조지 6세 라이오넬 로그 말더듬이 소통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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