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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팡한 떡시루처럼 금병산에 폭 안겨 들어 있다는 실레마을은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이다.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자신의 고향을 무대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실레마을 전체가 그의 작품의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처녀작인 <산골나그네>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인 <봄봄>, <동백꽃>, 그밖에 <총각과 맹꽁이>, <아내>, <소낙비>, <만무방>, <솥> 등등, 많은 단편들이 실레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래서 실레마을에 가면 그를 기리는 '김유정문학촌'과 그의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길을 순례할 수 있는 '실레 이야기' 길이 조성되어 있다.

 

실레마을은 경춘선 전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김유정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인물이름을 붙인 곳이며, 역을 표기하는 서체가 궁서체로 되어 있는 유일한 역이라고 한다. 열차에서 전철로 바뀐 경춘선은 속도도 빨라졌으며 역사들도 새 건물로 바뀌었다. 김유정역도 번듯한 한옥으로 바뀌어 사람들을 맞았지만,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건물은 너무 새파래서 아직은 낯설었다.

 

 

금병산 산자락이 펼쳐놓은 들판에는 봄볕이 가득해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우선 역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을 찾아들었다. 담장 안팎으로 심겨져 있는 동백꽃 나무가 이제 막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김유정의 전시관과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전시관에 들어가는데 냄새에 민감한 일행 중의 한 명이 무슨 향내가 나는 것 같지 않느냐고 한다. 해설(미리 예약을 했었다)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 웃으면서 엊그제 3월 29일이 김유정 선생의 추모제였기에 동백꽃을 꺾어다 놓았더니 거기서 나는 향내라고 한다. 동백꽃향이 그렇게 강한 줄 처음 알았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봄봄>에는 동백꽃향을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이라거나,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처럼 표현해 놓았다.

 

 

전시관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모두 꽃에 코를 박고 향을 맡는다. 라일락 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향에 가깝고, 행운목의 꽃 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향과 가깝다고 여기면 딱 맞을 향내다. 한 사람이 "동백꽃이라면 붉은 색이 아니냐. 이건 노란 것이 꼭 산수유꽃 같다"고 묻는다.

 

해설사는 "이것의 학명은 '생강나무'지만, 강원도 지방에서는 동백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김유정 선생의 소설에도 이 꽃을 '노란 동백꽃'으로 나타내고 있죠. 실레마을이 있는 금병산 숲에는 노란 동백나무가 많지요" 하면서, 사람들이 산수유가 아니냐고 어찌나 묻는지 아예 생가 뒤뜰에 노란 동백꽃과 비교해 보라고 산수유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해설을 받은 후에 자유롭게 전시관과 생가를 둘러보았다. 생가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고증을 거쳐 2002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생가의 안뜰로 들어가 보니 ㅁ자 형태의 특이한 구조다. 지붕을 덮은 노란 짚이 두껍다. 봉당의 길다란 툇마루에 앉아 미음자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붕 위로 솟아있는 산자락의 소나무가 우리를 내려다본다. 미음자를 통해 들어온 빛이 마루 한쪽을 달군다. 이곳에서 집필도 하고, 병마와도 싸웠을 작가를 떠올리며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겸해 한참을 머물렀다.

 

 

이제 '실레 이야기길'을 걸을 차례다. '실레 이야기길'이란 소설 속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들을 따라 걷는 길이다. 둥글게 걷는 길이니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없겠지만 화살표 방향을 잡아 들길로 나섰다. 사람 발길이 닿기 쉬운 들길은 잠깐이고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이라는 푯말이 나오면서 금병산 밑자락 산길로 접어든다.

 

이 푯말과 관련된 작품은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아내>, <소낙비>가 있다고 적혀있다. 길 따라 이런 푯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소설 속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를 나타내는 알림판들이다. 따라서 길을 나서기 전에 미리 짬을 내어 그의 작품 몇 편을 읽어 보고 걷는다면 훨씬 의미 있는 시간이 되겠다.

 

 

오솔길의 흙길은 낙엽에 덮여 포근포근 했다. 적당한 오르내림의 산길은 험하지는 않았으나 제법 길었다. 잣나무와 낙엽송은 키 재기를 하듯 쭉쭉 하늘로 뻗어 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의 씨눈들은 출산을 앞둔 산모의 젖멍울처럼 탱글탱글해져서는 톡 치면 화들짝 놀라 잎을 틔울 듯하다. 아직은 산속바람이 쌀쌀해서 동백나무가 활짝 피지는 않았지만, 양지바른 비탈길에 심겨져 있는 것은 노란 꽃을 예쁘게도 피웠다.

 

소설 속에 나오는 청춘들처럼 풀썩 그곳에 뛰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시관에서 맡은 향내가 기억되어 마음이 오밀조밀 나른해졌다. 친절하게 나무들에도 이름표를 붙여 놓아 식물공부까지 하며 걸었다. 작가가 고향에서 야학을 열었던 '금병의숙'이 있던 터를 지나 다시 처음의 자리로 왔다. 산길의 1시간 50분은 제법 긴 시간이었다. 안내된 코스를 걸으려면 편한 신발과 기운을 보충할 먹을거리를 조금은 준비해서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洞名)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 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50호 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김유정을 연구한 어느 편저자의 책에서 김유정이 자신의 고향을 이렇게 소개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그리고 '빈약한 촌락'이 아니라 김유정이란 인물의 떡시루 안에 폭 안긴 평화의 땅처럼 한가롭고 아늑하게 보였다. 봄볕에 하얗게 도드라져 보이던 길 때문인가, 이방인의 눈에는 그리 느껴졌다.


태그:#김유정문학촌, #실레이야기길, #김유정역, #경춘선, #노란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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