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항일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넷째 날(1월 13일) 오전, '발해(渤海, 698년~926년)' 유적지에서 박영희 시인이 한 "중국이 우리 역사를 뜯어고쳐 세계유산에 등록하면 우리는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설명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화려했던 '발해국'의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성벽은 1500년의 풍상을 견디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웅장함을 흔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남은 유산을 누가 어떻게 지키느냐는 숙제로 남기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우리 교육에서 발해의 역사는 서자나 다름없이 취급되었다. 대부분 통일신라와 조선의 당쟁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의 영토 다툼을 공부하다 남는 공간에 발해의 이름을 조금 집어넣었던 지난날 교육정책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성벽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책에서 봤던 '발해 5경' 지도에 한자로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日本'을 지우고 중간에 '東'을 써 넣어 '동해'로 바꿔놓았다. 낙서라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묘한 희열을 느꼈다.

 

감시원은 박물관까지 따라와 사진촬영을 막았다. 박물관 벽에 걸린 발해국 역대 왕들 초상화가 대부분 신하(臣下) 옷차림이어서 머리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그림도 '동북공정'의 일부로 여겨졌다. 감시원은 무엇이 두려운지 왕들의 그림도 찍지 못하게 했다.

 

발해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니 한국의 역사는 지금도 중국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발해의 역사가 우리 역사라고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자탄의 목소리도 나왔다.

 

빈촌이지만, 평화스럽게 느껴진 마을

 

발해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은 규모도 작고 전시물도 별로였다. 박영희 시인은 그동안 발굴된 주요 유물은 다른 곳으로 치워놓았다고 했다.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이 낮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중국동포가 운영한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뜸한 한적한 시골 길모퉁이에 있었다. 한국의 농촌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겨울방학 기간인데도 눈싸움을 하거나 썰매 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돈 벌러 나갔는지 대문을 밖으로 잠가놓은 집도 보였다.

 

마당이 들여다보이는 판자 울타리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세월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초가가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마을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눈 덮인 길은 정겹게 다가왔다. 눈썰매를 타면 재미있겠는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식당이 있는 마을은 글자 그대로 빈촌이었으나 평화로웠다. 가끔 강아지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아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뽀드득' 소리를 재미삼아 눈길을 걸으니까 1960년대로 돌아가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식당 이름은 '조족인가(朝族人家)'.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누추했으나 내부는 청결했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보이는 주인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시골집 사랑방 같은 객실로 들어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방이 따뜻하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졸음도 잠시, 구수한 육개장 국물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면서 잠이 달아났다. 우족찜도 함께 주문했다고 해서 기대가 되었다.

 

 

보약 같던 육개장과 우족찜

 

육개장이 먼저 옹기그릇에 담겨 나왔다. 생각과 다르게 고기와 고명이 듬뿍 들어 있었다. 한국 음식점에서 나오는 육개장에도 빠지기 쉬운 고사리와 숙주나물이 들어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보신탕, 조기탕, 육개장 등에는 고사리가 몇 가닥 들어가야 제격이기 때문이었다.

 

보신탕, 삼계탕과 함께 3대 보양식으로 손꼽히는 육개장 국물을 한 수저 입에 넣고 음미해보았다. 어지간한 한국의 식당 주방장보다 손맛이 좋은 것 같았다. 은근한 국물에 곁들이는 졸깃한 양지머리와 사태고기는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정성이 들어간 밑반찬도 여러 가지 나왔다. 특히 송송 썰어 양념을 넣고 버무린 고추는 별미였다. 된장에 담근 고추 같았는데, 고기를 먹고 몇 개 집어넣으면 청소부처럼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얼큰하고 시원하기로 으뜸인 육개장 국물은 구수하고 담백해서 마실수록 입에서 당겼다. "어~ 시원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뜨겁고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아 개운한 김치를 얹어 배를 불리니까 몸에 온기가 돌았다. 오전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도 풀리는 것 같았다.

 

이어 우족찜이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족찜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쇠붙이도 녹여먹을 먹성의 성장기 학생들은 마주앉은 일행에게 너도 한 개, 나도 한 개 권하면서 손에 하나씩 들고 발라먹었다.

 

쫀득쫀득하면서 고소한 살코기는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돼지고기를 많이 소비하는 중국은 쇠고기가 비싸지 않아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우족찜이 나왔는데 술이 빠질 수가 없었다. 해서 어른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맥주를 한 컵씩 따라주었다.

 

만주는 추운 지역이어서 농작물에 독한 농약을 하지 않아도 병충해가 생기지 않는단다. 그래서인지 겨울 들녘에서도 소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렇게 방목해서 키운 소는 육질도 쫄깃하고 맛도 좋다고 했다.

 

만주에서의 육개장과 우족찜은 기운을 북돋워주는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지 않았던 쇠고기 음식을 마음 놓고 포식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독한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더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속도 편하고 기분도 좋았다.

 

따뜻한 방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배가 부르니까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앉아서 노닥거리기만 할 수도 없었다. 길림성 연길(옌지)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올랐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육개장, #우족찜, #발해, #만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