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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직후 월미도
 상륙직후 월미도
ⓒ NARA 비밀해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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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 월미도 주민들은 이 마을에 가해진 미군폭격으로 집단희생됐다. 미군 항공기들에 의해 자행된 폭격은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항공기들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 소사하였다. 이 집중폭격으로 이 지역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됐다.

이 사건 희생자 중 10여명의 신원은 확인되었으나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가 신원확인을 하지 못한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은 미군 인천상륙작전 전에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진실위 조사에 의하면 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밀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 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 1950년 9월 13~14일 함포사격의 사전작업으로 인민군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는 것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이런 목표로 미군은 다수의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 폭격했다.

월미도 폭격 진실위 권고에, 3년간 묵묵부답인 정부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대한 군사적 필요를 인정하고 적을 기만해야 할 군사적 필요가 컸다고 하더라도, 폭격 이전 폭격지점 선정에서나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진실위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 사건에서 미군의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눈으로 식별 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월미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따른 보호도 받지 못했고 국가는 주민들 땅을 60년 넘게 보상 없이 강탈했다. 전후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었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6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막대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2008년 8월 진실위는 월미도사건의 진실을 규명했고 한국정부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보상할 수 있는 방안과 함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 위령사업 지원, 관계기록 정정 등 명예회복조치를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한국정부는 진실위 권고 후 3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자 지난 2월 25일 이 사건 피해 주민 45가구가 국방부, 인천시, 미국정부, 유엔을 상대로 가구당 300만 원씩 모두 1억3500만 원을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관련기사 : 월미도 미군폭격 피해주민들, 정부 등 상대 소송).

60년 동안 월미도 주민이 겪은 고통, 외면할 텐가

불타는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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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진실위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전 조사관 김구현 박사(진실위 미군사건 담당 팀장, 서울대 정치학 박사)와 지난 3월 9일부터 16일까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2010년 7월 14일 당시 진실위 이영조 위원장은 AP 기자에게 군사작전 지역인근에서는 "불가피하게 부수적 피해(collateral demage)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동안 한국정부가 월미도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입장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도 이 사건을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로 판단해서 그런 것인가?
"부수적 피해란, 그 용어 사용 자체가 민간인학살을 감추려는 기만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조심스럽다. '부수적 피해'는 전투과정에서 군사적 목표물을 공격하다가 발생하는 의도하지 않은 민간인 피해를 언급하는 용어다. 부수적 피해는 국제인도법상 반드시 금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적 목표에 대한 공격이라도 '예상되는 군사적 이익'에 비해 '예상되는 민간인의 피해'가 과도하다면 무차별 공격으로 간주되고, 군사목표일지라도 공격은 보류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기록에서 적군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으로 민간인 마을과 피난민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반인륜적인 민간인 학살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가 있다. 근래 이라크 전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 공격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폭이 반복되고 있는 모습에서 무차별 폭격금지를 준수하려는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처음 공격계획 단계에서부터 '부수적 피해'로서 민간인의 사상을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고, 이는 민간인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허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 전쟁이 끝난 후에라도 정부가 월미도 피해 주민들에게 최소한 귀향할 수 있는 조치정도는 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부는 법적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금껏 아무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좀 이해하기 힘든데 정부의 이런 냉담한 조치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나?

"한국 민법은 개인의 소유권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월미도 주민의 고통은 소유권만을 중시하는 견해로는 해결하기 곤란해서 문제가 된다. 월미도 주민들은 그 섬에 정착하여 여러 대를 살아왔다. 당시는 '왕토사상'의 영향 하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일제는 토지조사 시 강제로 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해방 후 토지개혁 시 국가에서 토지분배 하였으나 주민이 공동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소유권 이전 절차가 1~2개월 늦어지는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기지가 되면서 주민들은 월미도에서 쫓겨나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제 때 관광과 유흥지로 유명하던 월미도를 개발하면서, 일제도 월미도 주민들의 거주권을 무시하지 못하고 2차례나 월미도 내의 다른 토지를 주어 거주케 했다.

소유권은 등기를 해야 갖출 수 있는데, 등기할 권한도 있었고 등기를 하고자 했어도 전쟁 등으로 도저히 등기하기를 기대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월미도 주민들의 호소에 대해 '등기가 없으니 소유권이 없고 그러니 아무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정부가 무책임하게 대응해온 것이다. 해줄 의사가 있으면 법적근거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갖추면 되는 것이고, 우선 시의 조례로라도 주민들의 긴급한 고통을 해소시킬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 60년이 넘도록 월미도 주민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의 목적인 국민보호 의무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다."

- 미국 오바마 정부가 전 부시정권보다는 인권문제에 조금은 적극적인 면이 있다고 보면, 또 현재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이나 유엔이 이번 소송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까? 또 노근리 사건의 경우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하고 희생자 배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등 미국정부가 적극적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은 다른 미군사건에 비하면 차라리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미국정부가 진실위가 조사한 다른 미군관련사건에 대하여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입장을 취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전 부시정부보다 전쟁 중 민간인 피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에 오바마 정부가 좀 나은 환경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또 유엔에 한국인 사무총장도 있으니 아무래도 여건은 낫다고 보인다. 문제는 오바마 정부나 한국인 유엔사무총장에게 피해자의 호소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좀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그들도 힘이 든다고 판단이 되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노근리 사건이나 월미도 사건이나 전체적으로 같은 원인에 의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노근리 사건은 AP통신 등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던 사건이다. 이런 국제적 여론의 압력 하에서 2000년 당시, 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게 한-미가 합동으로 사건을 조사했고, 미국 대통령도 사과를 표명했었다."

"전쟁 범죄, 끝까지 추적해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1948년 월미도. 폭격 전 월미도. 해변의 열지어선 건물이 미군 막사. 산쪽으로 붙은 작은 집들이 월미도 원주민 지역. 미군은 해방 후 부터 월미도에 막사를 짓고 살았으며 월미도 주민들과 교류가 있었고 이곳지리도 익숙했다. 월미도 폭격 시 미군막사는 한 채도 손상되지 않았다.
 1948년 월미도. 폭격 전 월미도. 해변의 열지어선 건물이 미군 막사. 산쪽으로 붙은 작은 집들이 월미도 원주민 지역. 미군은 해방 후 부터 월미도에 막사를 짓고 살았으며 월미도 주민들과 교류가 있었고 이곳지리도 익숙했다. 월미도 폭격 시 미군막사는 한 채도 손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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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지역 미군폭격 사건 등을 포함 한국전쟁 중 미군이 관련된 민간인학살 사건들이 대부분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 체제 하에서 기각되거나 진실규명 불능 되어서 아쉬운 면이 있다. 미군사건을 조사했던 조사관 입장에서 진실위에서 미군사건을 다루면서 가장 어려웠던 애로사항은? 아울러 향후 인권문제에 좀 더 신경을 기울이는 새 정부가 들어 설 때 미군사건 관련하여 추가 조사나 진실규명 할 여지가 있나?
"애로사항은 조사대상을 규정한,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문제였다. 참고로 공소시효 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를 둔 취지 중 하나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라도 15년 내외의 기간이 지나면 증거가 사라져 불법성 입증이 어렵다는데 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행위를 고소, 고발해도, 국가가 수사할 사건으로 받아주지 않고 각하하는 것이다.

다만 전쟁범죄 경우에는 온 인류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성 때문에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재판관할권도 특정국가에 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범죄자에 대해서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언제까지라도 추적해서 반드시 처벌해야할 국제적 의무가 있다.

조사과정의 애로사항은, 60년이 지난 사건이어서 증거수집이 어려운데 더하여,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이 미국 군인인데 이들을 소환조사할 방법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애로였다. 미군사건의 경우는 전쟁범죄 혐의가 있기에 공소시효 적용이 없고 국가가 반드시 추적, 처벌해야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인권국가를 추구한다면 인권을 강조하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 당연히 추가 조사할 것으로 믿는다."

- 한국전쟁 중 미군이 관련되어 한국 민간인이 희생 된 사건의 전체적 피해자 수나 사건의 규모, 건 수 등을 추정 한다면?
"진실위에 신청된 사건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발생일자, 장소가 다른 신청사건이 171건이었고 확인된 희생규모는 5292명이었다. 거주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혹은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가 희생된 경우가 많다. 일가족이 몰살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네바협약에 명시된 특별보호 대상인 여성(45.57%), 어린이 노인의 비율이 높다. 실제 희생자 수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60년이 지난 사건이고 고향을 떠나 피난 중에 발생한 사건이 많기 때문이다. 또 진실규명 신청절차에서도 신청기간이 한정되어서 실제 피해자 중 상당수가 신청절차를 몰랐고, 이미 관련자가 세상을 떠나서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진실위 이영조 위원장 체제 하에서 전 안병욱 위원장 체제보다 미군사건 진실규명 기준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언론보도가 수차례 있었다. 어떤 기준들이 어떻게 강화 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불법성' 인정을 위한 증거요구를 일반 형사사건의 유죄확정에 필요한 증거 수준과 유사하게 높였다. 60년이 경과한 사건이고 가해자 측을 조사하기 거의 불가능한 점을 고려하며, 또 법 취지가 궁극적으로 화해에 있다는 취지에서, 피해자 측의 진술과 증거를 많이 반영했던 전 안병욱 위원장에 비해서, 이영조 위원장은 진실규명의 전제조건으로 불법성을 강조했고, 범죄행위의 불법성 요건으로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 지난 60년 동안 유족과 희생자들이 말 못할 고통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손해배상 액수로써 가구당 300만 원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이번 소송이 그냥 상징적인 의미의 소송이라서 그런 것인가?
"(내가)생각하기로 소송에서 청구하는 액수(소가)에 따라 소송비용이 올라가는데, 월미도 유족들이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 법적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상징적 의미의 액수만 청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재판의 진행을 봐가면서 추후에 청구액수를 올릴 것으로 본다."

- 진실위 미군사건 담당조사관 입장에서 이번 월미도 사건을 포함해 미군관련 사건에 대해 이명박 정부와 송영길 인천시장에게 건의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월미도는 개항시기 한국에 영향을 미치려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미국이 석유회사, 러시아, 일본이 석탄창고 등을 두었고, 러일전쟁에서는 그 앞 바다에서 해전이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월미도는 역사의 운명을 바꾸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 그 위치로 무고한 월미도 주민들이 폭격을 당했고,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60년 넘게 귀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월미도는 한국전쟁시기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상징적 공간으로 적합하다. 주민들에게 귀향의 기회를 제공하고, 역사적 상징성이 뛰어난 월미도 역시 그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맞게 발전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기를 바란다."


태그:#월미도, #김구현, #미군사건, #진실화해, #김성수, #과거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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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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