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올해로 50년을 맞는다. 5.16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어떤 이는 민간이냐 군부냐가 무슨 문제냐고 한다. 민주냐 독재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간 독재가 군부 독재 못지않은 상처를 내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5.16은 기본적으로는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었다는 데 역사적 책임이 크다. 그리고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한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옥죄었다는 점이 민간 독재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산업화를 이룩한 공적이 있다는 옹호론 때문에 역사 평가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권력의지와 행위에 대한 평가는 동기와 목적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돼야 한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위한 독재가 아니라 독재를 위한 산업화를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

역사 평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실증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민주평화복지 포럼(민포럼, 상임대표 이부영)이 14일(월) 오전 10시부터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5.16 쿠데타 50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민주개혁 진영도 10년 동안 국정을 책임졌기 때문에 국회의장과 국무총리, 국회의원과 정부 각료 출신 인사들이 많다. 지방자치 광역 및 기초 단체장 출신도 상당수다. 이들이 구성한 민포럼은 5.16 쿠데타와 박정희 체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 역사평가를 목표로 국내 진보- 보수 학계의 최고급 학자와 활동가들을 주제발표와 토론자로 초빙했다.

진보 쪽에서는 박명림(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임혁백(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정근식 교수(서울대 사회학과)가 각각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 대한 주제발표를 맡았다. 토론자로는 조국(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재홍(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김동춘(성공회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연세대 사회학과), 그리고 486세대의 리더인 신계륜 전 국회의원과 '백만 민란'의 최민희 집행위원장이 나선다.

보수 진영에서는 뉴라이트의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인 박효종 교수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와 전상인 교수 (서울대 환경대학원)가 토론을 맡았다. 사회자로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박은정(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상환(경상대 경제학과), 임현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가 각각 종합토론과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맡았다.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권력 유지 위해 필요 때마다 군부대 동원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93년 2월까지 32년 동안 군인 출신이 직접 정치를 지배하고 군부가 어느 사회집단 보다도 실질적으로 우위에 서는 '사실상의 병영국가(barracks state) 체제'가 지속됐다. 직업군인 출신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씨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물론, 집권당을 관리하는 실력자인 사무총장도 대부분 군 출신 인사가 맡았다. 한국전력이나 광업진흥공사와 같은 국가 기간산업을 관장하는 주요 공기업의 사장 자리가 군 장성 출신의 퇴역 후 보장받는 몫으로 정해져 있었다.

중고교 뿐아니라 대학에까지 군사교련이 필수과목으로 부과됐고, 사회 각 부문의 모든 직장 단위에 향토예비군이 설치돼 군 출신 지휘관이 정기적으로 훈련을 맡았다. 또 이들 예비군 지휘관은 직장의 비상기획관으로서 고위 간부진에 속했다. 군부 통치 시대가 사실상 병영국가였다는 것은 박정희 전두환 씨가 정권 찬탈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군대를 동원했다는 사실로도 명백하게 입증된다.

박정희 씨는 18년 동안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무려 일곱 번에 걸쳐 군대를 동원했다.

첫째는 군대 동원의 첫 시발로 5.16 쿠데타다.
둘째, 1964년 6월3일 대일 굴욕외교 반대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셋째, 1965년 8월26일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고려대와 연세대 등에 무장군인을 투입해 대학생들을 체포했다.
넷째, 정권 집단의 부정부패와 중앙정보부의 횡포, 대학에 강제로 시행한 군사교련의 철폐를 요구하며 반독재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체포하고 학원가를 진압하기 위해 1971년 10월15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주요 대학에 군 부대를 투입했다.
다섯째, 1972년 10월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의사당 앞에 탱크를 진주시킨 채 헌법을 새로이 제정한 유신체제 쿠데타를 감행했다.
여섯째, 1975년 4월8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고려대에 휴업령과 함께 군대를 진주시켰다.
일곱째, 1979년 10월 부산 마산 시민들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에 항거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항쟁에 나서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특전 부대를 투입했다. 이 일곱 번째 군대동원은 당시 언론보도까지 금지한 긴급조치 9호 때문에 보도되지 못했으며 공개된 기록자료가 없는 상태다. 사실상 역사 기록에서 삭제된 결과가 됐다.

5.16 쿠데타와 5.18 내란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전두환 씨는 군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둔갑하는 허구적 민정이양을 거쳤다. 그러나 군 출신 쿠데타 주도세력이 독과점하는 1인 또는 과두지배 체제가 계속됐다. 국가 권력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국회의장- 국무총리- 집권당 대표-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이라는 5대 기둥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체제였다.

이 중에서도 한 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군 출신이던 중앙정보부장이 조정자의 위치에 섰다. 주요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터지면 정부 차원의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구성해 대처했는데 여기서도 주도자는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군정을 군정답게 만드는 총괄 조정자가 중정 부장이었다.

정당, 선거, 의회, 언론, 대학, 노조 등 무력화... 절차적 민주주의 말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정당, 선거, 의회, 언론을 무력화시켰다. 민주주의의 실제 내용인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한 전제 정권이었고 모든 권력은 대통령 1인에 집중된 독재 체제였다.

첫째, 정당 정치면에서 군부통치 시대의 집권 여당인 공화당과 민정당은 집권 세력이 정치공학적으로 조직한 관제 단체였다. 군부정권의 집권당은 공화당의 예에서 보듯이 창당 때부터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 권력기관이 그 산실 노릇을 했으며 정치자금도 이른바 4대의혹 사건 등으로 조성된 검은 돈을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화당은 선거와 국회 운영 등 정상적인 정치과정에서도 자율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최고권력자 박정희와 그의 사병 노릇을 한 중앙정보부 등에 의해 철저히 통제됐다.

1971년 공화당 지도부에 의한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은 정당과 의회 정치를 장식품화한 박정희 체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경험적 예이다. 당시 국회에서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야당 측의 해임결의안이 상정됐다. 대통령 박정희는 공화당 지도부에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를 부결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표결 결과 공화당 의원들 중 일부가 반란표를 던져 해임결의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이때 이른바 '대통령의 진노'가 폭발했고 반란 의원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이 중앙정보부에 떨어졌다. 그러자 공화당 지도부인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이 즉각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가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수모와 고문을 당하고 그날로 의원직 사퇴서를 써야 했다. 마치 조폭 내부에서 배신자를 징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였다.

이는 군부 통치 시대에 대통령 박정희의 '심기'와 중앙정보부가 얼마나 공포의 화신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군부 통치 아래서는 대학가에서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 간부나 정권에 비판적인 교수들도 이곳에 영장 없이 끌려가 매질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학생의 제적 처벌과 교수의 강제 해직이 다반사였고 중정에서 조사받다가 의문사한 미제사건도 한 둘이 아니다.

둘째, 군정 체제에서의 선거를 보면 1963년과 67년, 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는 관권 개입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부정 시비에 시달린 박정희는 유신체제에서 대통령 선거를 아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바꾸어버렸다. 대통령 간접선거는 혼자서 출마하고 찬반 투표에 의해 추대받는 것으로 선거라는 용어로 규정하기는 어려웠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1인 유신정우회 소속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실상 군주정과 귀족정의 혼합체제였다. 전두환 씨도 형식적인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직에 올랐다.

셋째, 의회정치 면에서 박정희 체제는 정당정치를 무력화시킨 것과 똑같이 의원들의 원내 표결행위까지도 사전 점검하고 통제했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비서실 등 대통령 박정희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권력기구가 정치공작을 담당했다. 심지어 청와대 경호실장도 나서서 여야 국회의원들을 정치공작 차원에서 접촉했다. 이 같은 사실은 1979년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본래의 직무가 아닌 정치공작에 개입하는 것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견제하다가 10.26 사건이 터졌다는 당시 군사법정 문답에서도 드러났다.

박정희 체제 아래서 의회정치는 1969년 3선개헌 강행과 1972년 유신헌법 수립에서 결정적으로 왜곡됐다. 박정희는 집권세력 핵심인사들까지도 반대한 3선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구영 공화당 초대 총재나 김종필 전 당의장, 예춘호 전 당 사무총장(국회 상공위원장), 양순직 국회 재경위원장 등에 대해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협박하고 당원에서 제명했다. 유신 때는 군대를 동원한 상황에서 이같은 정치공작과 협박이 공포의 수준에 이르렀다. 국회의 가장 긴요한 권한이자 책임인 헌법 개정을 이런 식으로 강행한 것은 의회정치의 파괴라 아니할 수 없다.

언론사, 대학, 주요 사회단체 등에 정보기관원 상주
비판적 언론인과 교수 강제해직...전태일 노조지도자 분신

넷째, 언론과 국민 여론의 형성과정에 대해 박정희 체제는 철저한 사전 통제를 가했다. 중앙정보부가 각 언론사에 담당 정보원을 두어 상주하거나 상시적으로 출입하면서 보도내용을 사전에 점검하고 조정했다. 이에 기자들이 기관원의 편집국과 보도국 출입을 막으면서 자유언론 운동이 벌어지자 중앙정보부가 언론사의 수입원인 광고 수주를 못하도록 광고주들에게 공작했다. 정권 측은 자유언론 운동을 벌이는 기자들을 해직시키라고 요구하면서 언론사의 경영을 옥죄었다. 언론사 측은 결국 기자들을 강제 해직시키면서 정권 측과 타협의 길로 갔다.

다섯째, 주요 대학에 여러 정보기관원이 상주하면서 정보 수집 이상의 감시와 통제를 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본부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 치안본부 특수대, 서울시경찰국 정보과, 관악경찰서 정보과, 그리고 보안사까지도 정보원을 상주시켰다. 이같은 대학에 대한 정권 측의 감시와 통제에 반발한 교수와 대학생들이 학원 자유화 운동을 벌였다. 정권 측은 강의 내용 중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교수들에 대해 감시하다가 이른바 '정치 교수'라는 죄목을 씌워 여러 교수들을 강제 해직시키기도 했다.

여섯째, 박정희 체제의 특성인 개발독재로 인하여 노조 운동은 철저히 탄압을 받았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피폐했다. 기능공과 어린 여공들이 기준 노동시간 넘기기나 심야 노동을 일상화 했으며 피땀어린 삶을 살아야 했다.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경이적 성장을 이끌었던 자영업자와 젊은 화이트 칼라층 샐러리 맨, 전문기능인들 역시 비슷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란 이들 노동자와 샐러리 맨들의 잘 살아 보자는 열망과 투지로 쌓아 올려졌다는 것이 실증적인 분석이다.

개발 연대에 20세 이상 산업화의 중심 계층은 1945년 해방 이후 교육받은 세대로 이들에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제도 아래 번영을 누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들의 산업화에 대한 열망과 투지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성장은 그 국민적 피땀으로 이룩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경제성장이 박정희의 개발독재 통치력에 의한 성과라고 본다면 지나친 영웅사관과 피상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박정희 시대 노조에 대한 탄압은 1971년 청계 피복노조의 지도자 전태일이 노동기본법을 가슴에 안고 분신한 사건으로 입증된다.

농공상 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동서지역 간
특혜 성장정책이 가져온 국가균형 발전의 파괴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방식에 의한 경제성장 정책은 불균형성장론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 불균형성장론은 낮은 이자와 장기상환 조건의 외자를 기업들에 할당하는 권한을 가진 집권세력이 특혜를 주는 불합리 구조로 악용됐다. 그 결과 국가 부(富)의 심각한 편재 현상이 구조화했다.

재벌 대기업 위주로 수출지원 특별융자 등 많은 특혜가 주어졌다. 국민 생활과 직접 맞닿고 또 대기업의 부품 하청업체로 수출에도 영향을 주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은 도외시됐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국가 자원의 배당과 정부 정책지원 측면에서 엄청난 불평등 구조를 뿌리내렸다.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대기업과 하청 협력업체 사이의 이른바 '먹이사슬' 구조는 군부독재 시대 특혜정책의 유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균형 성장정책이 국민 경제에 끼친 가장 심각한 상처는 동서 지역간 불균형을 구조화해 놓았다는 점이다. 집권세력의 출신지인 대구 경북과 경남 지역을 국가 재원의 집중 투자와 불균형 산업화의 전략적 대상으로 삼았다. 대구 구미 포항과 울산 마산 창원에 우선적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공업단지를 건설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의 과실이 지역적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지역차별의 근원'을 만들었다. 동서간 지역감정의 실질적 원인은 이 같은 국가 부의 불평등 분배와 인재 등용의 차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는 실제로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분석된다. 특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후보들간의 잘못된 득표 경쟁이 낳은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국가경제의 혜택과 공직 인사에서의 불평등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모순 구조가 아니라면 정치인들의 선동만으로 심각한 지역주의가 구조화될 수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분신과 투신 등 극단적인 저항의 정치문화 유산 남겨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32년간의 군부통치는 매우 부정적인 정치문화 유산을 남겼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조선조 600여년과 일제 식민지배 36년, 해방후 미군정 통치와 이승만 정권 20여년, 그리고 5.16 이후 군부통치 32년은 신민형 문화를 키웠다.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시민적 자유와 자아의식, 그리고 정치참여 보다는 규율 준수와 복종의 의무가 더 강조되는 정치문화다.

그에 비해 항일 독립운동과 4.19 의거, 1960~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5.18 광주민중항쟁, 90년대 각 분야의 시민단체 운동, 2000년대 인터넷 활동과 촛불시위 등은 참여형 문화의 배양기에 해당한다.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데 바탕이 되는 시민문화(civic culture)는 지방형, 신민형, 참여형이 적절한 혼합비율로 구성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문화는 아직도 박정희 전두환 체제 32년간의 강렬한 신민형 유산에 지배돼 온 양상이다.

첫째로 강력한 통치자, 권위있는 지배자를 희구하는 것이 신민형의 유산 때문이다. 둘째, 합리적이고 탈권위적인 지도자를 유약하고 무책임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부도덕하고 비리를 저질러도 경제만 잘 관리하면 유능한 정권으로 평가하는 풍토가 자리잡았다. 셋째, 재야 민주화운동권 뿐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여야 사이에 타협과 협상 보다는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하는 정치문화가 뿌리내렸다. 이 역시 군부독재에 대해 오랫동안 저항하면서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신 분신,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의 단식투쟁과 장외 시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데서 연유한다. 5.16 쿠데타 이후 오랜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데 장애가 되는 부정적인 정치문화가 유산으로 남겨진 것이다. 넷째, 개발독재 체제 아래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분배와 복지, 삶의 질과 인간주의, 자연 생명보호와 환경문제 등 정신적 가치가 무시되는 정치문화가 심화돼 왔다.

최고 공직자로서 대통령의 '도덕적 타락상' 국민 의식을 오도

대통령 박정희가 남긴 정치적 유산 중 공직자로서 '모럴 해저드'와 도덕 불감증은 후대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

첫째는 국정 최고책임자가 특혜를 준 재벌 기업들로부터 통치 비자금을 받은 일이다. 10.26 직후 청와대를 수색한 합동수사부 요원들은 그의 집무실 캐비넷에서 현금 9억원을 발견했다. 당시 9억원이면 현재 화폐가치로 100억원 가까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 후 여러 종류의 재판과정과 언론 취재에 의해 기업인들이 청와대를 방문할 때 비자금을 갖다 바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전두환 씨는 내란과 부정축재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기업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이유를 묻는 재판장의 신문에 "과거부터 내려 온 관행에 따른 것"이라고 답변했다. 박 대통령에게 기업인들이 해 온 관행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얘기다.

둘째, 대통령 박정희는 김재규 중정 부장의 권총에 맞아 숨진 10.26 사건 당일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비밀 연회장에서 측근 권력자들과 주연을 벌였다. 그 자리에는 술 시중을 들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2명의 연예계 여인이 동석했다. 한 사람은 유명 가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인 패션모델로 여대생이었다. 당시는 부산 마산에서 시민 학생들의 반독재 시위가 폭발해 이를 진압하기 위해 특전부대를 투입한 계엄령 상황이었다. 그런 비상시국에 대통령 박정희와 김재규 중정부장,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이 그 같은 주연을 벌였다는 것은 최고 공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상이 아닐 수 없다.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군사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박 대통령의 주연과 여자에 대해 증언했다. 한달에 열 번씩 그런 주연을 벌이며 그 자리에는 항상 술 시중을 드는 여인이 두 명씩 동석했다는 것이다.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 권력자들의 사생활로는 지나치게 타락한 행태였다. 만일 국가안보의 위기가 있다면 이들의 판단과 결정이 과연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의문시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통치비자금을 정치인과 군 장성들에게 주는 '하사금'으로 썼다. 그런 방법으로 정치인들을 공작했고 군부에 하나회와 같은 친위 세력을 육성한 것이다.

최고 공직자들의 그 같은 모럴 해저드는 10.26 사건과 재판 과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상당 부분 공개됐다. 여기서 많은 국민들이 "강력한 지도력으로 경제 성장만 잘 이루어 나가면 부패비리와 사생활 문제는 덮어 둘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부패해도 유능한 지도자가 낫다는 오도된 국민 의식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재홍 기자는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민포럼 정책홍보위원장 겸 대변인입니다.



태그:#5.16쿠데타 50년, #민주평화복지 포럼, #박정희-전두환 32년 통치의 그림자 , #절차적 민주주의 말살, #국가균형발전 파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