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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당 공원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암초가 당집에 모셔진 '애랑'이 갑작스런 파도에 쓸려 죽음을 당한 곳이라고 전한다. 관광지로 조성되면서 바다 한 가운데인 그곳에 '애랑'의 동상이 세워졌다.
▲ 해신당 공원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암초가 당집에 모셔진 '애랑'이 갑작스런 파도에 쓸려 죽음을 당한 곳이라고 전한다. 관광지로 조성되면서 바다 한 가운데인 그곳에 '애랑'의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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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이라고 다 같은 동해안은 아니다. 깨끗한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여름은 여름대로, 쓸쓸한 바다에서 고독과 낭만을 찾는 겨울은 또 겨울대로, 동해안은 천혜의 관광명소임이 틀림없지만, 삼척 부근을 경계로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강릉에서 양양을 거쳐 속초로 이어지는 위쪽 동해안은 새뜻하고 번화하여 파도소리조차 흥겨운 대중가요 노랫소리처럼 들리는데, 삼척에서 경상도로 이어지는 동해안은 반대로 차분하고 고즈넉하여 같은 바다의 파도소리건만 그윽하게 느껴질 정도다.

강원도가 수도권과 인접한데다 고속국도 등 교통 여건이 견줘 좋은 반면, 남쪽으로 갈수록 관광객들의 손때를 덜 타 예스러운 맛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속국도 못지않은 4차선 국도가 놓여 가기 훨씬 수월해지긴 했지만, 위와 아래 동해바다의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인해 찾는 관광객들의 표정과 옷차림조차 확연히 구분됐다.

그래서인지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흥겨운 댄스곡이 어울리는 여름엔 위쪽으로 가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의 뉴에이지가 끌리는 겨울엔 남쪽 동해바다가 제격이라고. 불과 몇 해 전 동해안을 찾았을 때만 해도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삼척이든, 울진이든,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라면 모두 '강릉'과 '속초'가 돼버렸다.

유흥가로 변모한 정동진 주변과 여름이면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망상 해변 근처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어촌과 같은 한적함과 풋풋함이 물씬 풍겼던 삼척의 바닷가조차 그들을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

옹기종기 지붕이 맞닿은 채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어촌 마을의 슬레이트집들은 형형색색의 간판과 네온사인으로 치장한 중세 유럽풍의 성으로 거듭났고, 통통거리며 먼 바다로 나가는 고기잡이배는 더 이상 흔한 풍경이 아니다.

고속국도처럼 잘 닦인데다 통행료도 받지 않는 고속화도로를 두고 애써 산과 바다를 따라 구불거리는 옛 7번 국도를 따라가는 것도 그 옛 정취가 그리워서다. 휴게소야 쉬엄쉬엄 가다 도로변의 발길 닿는 곳, 마음 이끌리는 곳에 멈춰서면 되고, 운 좋으면 그곳에서 주민들과 가벼운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 살해당한 곳

공양왕릉에서 내려다 본 궁촌 마을 왼쪽 숲 너머에 레일바이크 승하차장과 너른 주차장이 있다. 그곳과는 대조적으로 공양왕릉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 공양왕릉에서 내려다 본 궁촌 마을 왼쪽 숲 너머에 레일바이크 승하차장과 너른 주차장이 있다. 그곳과는 대조적으로 공양왕릉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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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시내에서 근덕면 소재지를 지나 10분 남짓 가면 조그만 어촌 마을인 궁촌리에 닿는다. 동해바다의 거친 파도조차 숨죽여 부딪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더욱이 마을 입구에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어둑해질 저녁 무렵 이곳을 찾는다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공양왕은 나라를 빼앗긴 채 개경에서 천릿길인 이곳까지 유배당해 와서 끝내 피살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그가 유배 와 잠시나마 살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궁촌(宮村)'이고, 마을 입구 고갯길은 그가 목 졸려 죽임을 당한 곳이라 해서 지금도 '살해재'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느 동해안과는 달리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무덤 앞에 서니 누군가 방금 다녀간 흔적을 보게 된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그에게 술 몇 잔 따라 바친 듯, 술이 반쯤 남은 빈 소주병이 무덤에 기대어 세워져 있다. 이곳을 애써 찾아온 이는 누굴까. 짐작건대, 멀리서 온 관광객이 아닌, 이곳 궁촌리 주민의 마음 씀씀이인 것 같다.

공양왕릉 상석 곁에 놓인 소주병 비참한 최후를 맞은 공양왕을 찾아 술을 따른 이는 과연 누굴까.
▲ 공양왕릉 상석 곁에 놓인 소주병 비참한 최후를 맞은 공양왕을 찾아 술을 따른 이는 과연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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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궁촌리는 외지 관광객들로 넘쳐나지만 정작 마을 이름의 유래랄 수 있는 공양왕릉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한적했던 마을에 동해바다를 따라 레일바이크를 즐기는 대규모 놀이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레일바이크 매표소와 불과 200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지만, 변변한 안내판 하나 세워져있지 않은 공양왕릉은 관광객들의 눈길조차 끌지 못한다.

어쩌면 그 비운의 삶을 반추하자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것보다 차라리 외롭고 처량하게 방치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만 하나, 마을에 오롯이 남은 슬픈 역사의 자취가 생뚱맞은 놀이시설로 인해 가려지고 시나브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는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이곳에 와 술을 따르고 간 누군가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찾는 이 없어 잊힐지언정 사적지로서 그럭저럭 보존은 되고 있으니 그나마 나은 신세일지도 모른다. 궁촌리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남 마을의 '해신당 공원'은 그야말로 마을 공동체의 삶과는 완전히 괴리된 채 오로지 외지인들을 유혹하는 관광지로 전락해버린 느낌이다.

처녀로 죽은 '애랑'은 소외되고, 남근목만이 넘쳐 

남근을 깎아세운 예술작품(?) 공원 곳곳이 남근으로 덮여있는데, 그 수가 워낙 많다보니 민망함마저 상쇄되는 것 같다. 곳곳에 깎아세운 작품은 물론, 난간도, 계단도, 심지어 잠깐 쉬어가라는 벤치모양조차도 모두 남근이다.
▲ 남근을 깎아세운 예술작품(?) 공원 곳곳이 남근으로 덮여있는데, 그 수가 워낙 많다보니 민망함마저 상쇄되는 것 같다. 곳곳에 깎아세운 작품은 물론, 난간도, 계단도, 심지어 잠깐 쉬어가라는 벤치모양조차도 모두 남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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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해신당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한 신남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바다를 경외하며 의지해 공동체를 일궈낸 동해안 어촌 문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곳이다. 당집 안에 모셔진 '애랑'은 신남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며 신앙의 대상이지만, 지금은 그림 속 곱상한 자태로 뭇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

공원이 조성되면서 심지어 당집의 '애랑'조차 철저히 소외되고 처녀로 죽은 그녀의 한을 달래기 위해 깎았던 남근이 곳곳에 세워져 주인공을 자처하고 있다. 아무리 성(性)을 주제로 한 공원이라지만, 어린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남근목과 남근석이 예술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공원 전체를 뒤덮고 있다.

비싼 입장료에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끊이지 않는다. 숫제 산을 허물어 조성한 공원이 정작 주민이 사는 마을보다 더 넓고, 고기잡이배가 닿던 선착장은 아예 대형버스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역설적이게도 마을 공동체 문화의 원형이 속물적인 성 상품이 되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셈이다.

공원 좌판에서 잡화 팔아 생계 유지하는 마을 주민들

당집을 세운 마을 주민들 역시 경제적 여건은 조금 나아졌을지는 몰라도 그들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와 격리되어 갔다. 그들은 시나브로 어구 대신 공원 입구 매표소 주변 좌판에서 관광객들에게 잡화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이 되었다. 진열된 상품 중에는 남근 모양의 병에 담긴 '벌떡주(酒)'처럼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도경계를 넘어 만나는 첫 마을인 경북 울진군 죽변면에 자리한 국보 제242호 봉평 신라비 역시 '호사'를 누리고 있다. 본디 있던 자리에서 옮겨져 인근 새로 조성한 공원 내 수십 억짜리 신축 건물 안으로 이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마을보다 더 크게 터를 닦아 만든 곳으로, 이름 하여 '봉평 신라비 사적 공원'이다.

도로변 마을 한 가운데 단출한 기와지붕 아래 서 있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다가가기 쉽고 정겨웠던 비석이 세련된 건물 전시관 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뽐내며 군림할 태세다. 몇 겹으로 에워싼 살벌한 경호원들을 거쳐야만 비로소 비석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감이 느껴진다.

콘크리트 벽에 갇힌 봉평 신라비

격리되고 고립된 신라비로는 먼 옛날 이곳 봉평 마을에 살던 신라인들의 체취를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것들도 원래 있던 그 자리를 벗어나면 아무리 안전하게 관리되고 손때 하나 묻지 않을 정도로 무결하게 보존된다고 해도 본연의 생명력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조만간 공원 조성 공사가 마무리되어 외지 관광객들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콘크리트 벽에 갇힌 봉평 신라비는 과연 그의 새 보금자리를 기꺼워할까. 또, 과연 신라비를 보기 위해 애써 찾아온 관광객들 역시 외부와 차단된 채 전시관 내에 고이 모셔진 그 모습을 좋아라할까.

언제부턴가 사적지든 문화재든 본연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되레 지엽적인 부분으로 치부됐다. 외지인 유치를 위한 경제적 효과에만 매몰된 채,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마다 엄청난 예산을 투자해 문화재 주변을 널찍한 주차장이 딸린 공원으로, 또 놀이시설 등을 갖춘 유원지로 조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문화재를 더 잘 홍보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과 유원지라지만, 정작 주인공인 문화재는 그곳의 '삐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문화재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가면 번잡함만 떠올릴 뿐 대체 뭘 보고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재정자립도가 열악한 지방자치단체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다만, 문화재든 뭐든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손을 대 관광 상품화시키고, 주변에 상가를 조성해 수익을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입장료와 주차료를 징수해 재정을 벌충하는 것이 전국 공통의 개발 공식이 됐다는 점이 문제다. 문화재 고유의 가치는 고사하고 특유의 지방색조차 획일화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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