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선발투수가 단 한 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은 채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노히트노런(No hit - No ru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점수와 안타 외에 4사구나 실책으로라도 한 명의 주자도 살려 내보내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한다면 퍼펙트게임(perfect game)이라는, 한 층 더 명예로운 기록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노히트노런이란 대개 아홉 이닝동안 4사구나 야수들의 실책으로 한두 명을 내보내는 것만으로 상대타선을 봉쇄하는 경우에 완성된다. 하지만 갑작스레 굵어진 빗방울 때문에 강우콜드게임으로 경기가 끝나버리는 경우 5회만 던지고도 노히트노런 기록을 수립하는가 하면(1993. 5. 13. 사직. 박동희), 팀 타선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 단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하는 통에 10회를 무안타무실점으로 틀어막고도 연장선 투수교체로, 아무 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배영수).

물론 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고 해서 투수에게 2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당한다고 해서 상대 팀이 2패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나오는 기록이 아니다보니 삼십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도 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언급되고 되새겨진다. 그래서 그 영광도 보통의 1승보다는 많이 길어지고 그 치욕도 보통의 1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기게 이어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도 역시 야구의 생명은 '기억'이고, '이야기'다.

유일한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

1988년에는 두 번의 노히트노런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순간에 튀어나온 의외의 기록이었고, 또 노히트노런 치고도 자주 보기 어려운 희귀한 기록들이었다. 그 두 번의 노히트노런은 야구가 각자 나름의 강함만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상대적'이고 '유연한' 경기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기도 했다.

그 희귀한 이변이 시작된 것은 시즌의 출발점인 4월 2일이었다. 그날 사직 개막전의 OB 베어스 선발로 내정되어있던 김진욱이 경기 당일 오전 연습 때 동료 타자 김광림의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

장호연 구속은 느렸지만 기술과 제구력, 그리고 배짱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통산 100승-100패 이상을 기록한 단 9명의 투수 중 한 명이다.

▲ 장호연 구속은 느렸지만 기술과 제구력, 그리고 배짱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통산 100승-100패 이상을 기록한 단 9명의 투수 중 한 명이다. ⓒ 두산 베어스



그 무렵 OB 베어스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데뷔 첫 해 시즌 17패로 넙치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도 이듬해 곧장 1.58의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을 따내는 배짱을 과시하기도 했고, 86년과 87년에는 13승과 15승을 올리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1988년 시즌을 앞두고 늘 그랬듯 길고 지루한 연봉싸움을 벌였던 그는 동계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컨디션은 아직 실전에 투입되기에 너무 이른 상태였다. 급작스레 뚫려버린 구멍에 그가 배치된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었다. 개막전이라고 하지만, 그 한 경기 때문에 시즌 첫 주의 선발로테이션을 한꺼번에 허물 수 없었던 김성근 감독으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노는 말'이 장호연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별명은 '짱꼴라'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말의 뜻과는 무관하게 장호연과 잘 어울리는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단단한 것 같으면서도 말랑말랑하고,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꼬여있는. 그래서 '짱돌'과 '꽈배기'와 '짜증' 같은 단어들을 한꺼번에 연상하게 만드는 스타일. 그래서 타자들은 늘 그의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하면서도 '다음에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너는 끝장이다'라는 자신감으로 불끈거렸다. 그러다가 정말 한 번 제대로 잡고 두들겨댄 날도 왠지 깔끔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속 120키로미터 후반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들이 딱 배팅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 그 날 갑자기 등판하느라 제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라는 약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롯데 타자들이 '다음 타석에는 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며 세 번씩 타석과 더그아웃을 오가고 나자 거짓말처럼 경기는 끝이 나버렸고, 전광판의 아랫 줄에는 무수한 '0'이 새겨져있었다. 볼 넷이 두 개, 몸에 맞는 공이 한 개 있었지만 병살타 역시 두 개 기록되며 타석 수는 28이었고, 투구수도 딱 99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점수 0, 안타 0. 삼진도 실책도 0. 노히트노런, 그것도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기록이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기록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

그로부터 불과 보름이 지난 뒤, 이번에도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7일, 광주 무등야구장.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던 자타공인의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와 그 해 역시 탈꼴찌 싸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창단 3년차의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더구나 해태의 선발은 '천하의' 선동열이었고, 그 선동열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이 선동열의 맞상대로서 미련 없이 버린 카드는 2년차 신인투수 이동석이었다.

전 시즌이었던 1987년, 선동열은 14승과 0.89라는 신화적인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더 단단히 하고 있었다. 반면 군산상고 출신임에도 고향팀 해태의 1차 지명자 3명 안에 들지 못해 타향팀으로 밀려났던 이동석이 거둔 성적은 고작 1승과 6.37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 두 투수의 맞대결에서 관전포인트라면, 이동석이 과연 몇 회까지 버티면서 다른 투수들의 어깨를 아껴주느냐 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그날 그는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에 이정훈과 장종훈이 가세하며 힘이 붙기 시작하던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무려 11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9이닝을 완투했고, 점수는 단 한 점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시즌 2패째를 당하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맞상대했던 이동석이 덜컥, 또 한 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동석이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장호연의 것보다도 더 놀라운 면이 있었다. 바로 '무4사구 노히트노런', 즉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개의 볼 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내주지 않는 기적적인 투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와 4사구 없이도 '퍼펙트게임'이 되지 못한 이유는 두 개의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7회 말과 8회 말, 유격수 장종훈이 1루수 강정길에게 던진 공이 뒤로 빠지면서 두 번 출루를 허용했던 것인데, 그 중 한 번은 장종훈, 한 번은 강정길의 실책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동석이 장종훈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날 두 팀을 통틀어 유일했던 점수를 만들어냄으로써 대기록의 전제인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7회 초 우월 3루타를 치고 출루한 뒤 선동열의 견제구가 뒤로 빠진 틈을 타 홈을 밟은 장종훈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 이동석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7승을 올리며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기존의 한희민, 이상군에 더해 이동석, 김홍명, 김대중, 김용남 등의 투수들이 전반기에만 54경기중 20경기를 완투한 대활약을 토대로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이후 이동석은 다시는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성적이나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7년만에 프로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그 뒤 그는 화순고를 거쳐 모교인 군산상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군산상고 훈련장에서 만난 이동석 감독에게 그날 노히트노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살짝 얼굴까지 붉혀가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그날 상대선발로 내가 나온다고 그러니까 해태 타자들이 전날 술을 엄청 먹어서 그런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이동석 선동열과의 완투맞대결 끝에 한국프로야구 제 4호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이동석. 지금은 군산상고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 이동석 선동열과의 완투맞대결 끝에 한국프로야구 제 4호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이동석. 지금은 군산상고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 군산상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빛나는 승리와 민망한 패배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날의 영광을 자세히 떠올려 자랑하기에는, 그날의 빛나는 승리를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남겨둔 채 프로선수로서의 삶을 마감했다는 자책과 후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철순이 아닌 방수원, 최동원과 선동열이 아닌 장호연과 이동석

대개 상대 타선을 세 차례 이상 상대하면서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구위가 필요하다. 머리싸움만으로 최소한 27번의 승부를 번번이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 타자가 '알고도 못 치는' 압도적인 직구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 위해 투수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무려 10개의 4사구를 내주고도 노히트노런에 성공한 A.J.버넷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강하고 빠른 공'을 가진 투수들이 대개 가지는 약점인 '제구력 불안' 때문에 허용하곤 하는 4사구는, 점수를 내주지만 않는다면 몇 개가 나오더라도 무방한 것이 노히트노런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박철순이 아닌 방수원, 그리고 최동원과 선동열이 아닌 장호연과 이동석이 노히트노런이라는 역사를 개척했다는 것은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그들을 통해 자신의 힘을 믿고 전진하는 정면승부 못지않게,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영리하게 유인하는 전략 역시 중요함을 한국야구가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호연 이동석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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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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