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산의 현대 의료사를 얘기하면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쌍천 이영춘(1903-1980) 박사를 빼놓을 수 없었다. 쌍천은 33세 때 옥구군 개정면에 있는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態本) 농장의 '자혜진료소'로 초빙되어 일생을 농촌 보건사업에 헌신했다.

쌍천은 해방 후 자혜진료소를 모체로 개정중앙병원, 개정농촌위생연구소, 개정간호전문대학, 개정뇌병원, 시그레이브 기념병원 등 수많은 학교와 의료시설을 설립하여 후배 의사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친구들 만류에도 시골행 결심

호남 일대 농지개발의 유망성을 일찍이 간파한 구마모토는 1903년 10월 전북 옥구 개정에 농장을 개장한다. 옥구, 김제, 정읍에 경작지 3천 정보와 소작농 3천 가구, 2만여 명의 일꾼을 거느리게 된 구마모토는 소작인 가족의 건강관리와 질병 치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마모토 농장에 있던 '자혜진료소'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마모토 농장에 있던 '자혜진료소'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1934년 9월. 쌍천은 최소한 5년 이상 진료해달라는 당부, 월급 150원(당시 일인 고등관 의사 대우), 10년이 지나면 농민의 보건 위생을 위한 학술조사 및 연구할 연구소를 설립해주겠다는 구마모토의 약속을 받고 세브란스 의전(1925-1929)에서 배운 인술을 농촌에 심기로 결심한다. 

쌍천은 첫 대면에서 '월급은 얼마를 원하느냐?'라고 묻는 구마모토에게 "나는 월급을 목적으로 귀하의 요청을 수락하는 것이 아니고, 무료진료의사로서 수락한 것이니 귀하는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30년 여름 황해도 평산 주재 공의(公醫)와 그곳에서 3년을 개업의로 있는 동안 빈곤과 무지, 질병에서 신음하는 농촌 주민의 실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며 동정해온 쌍천에게 농촌 무료진료 사업은 잠시 동요되었던 마음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쌍천의 주변 친구들은 농촌진출을 적극적으로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은사인 윤일선 박사와 선배 김명선 박사는 농촌 보건문제는 미개척 분야이니 뜻있는 청년으로 도전해볼 만한 사업이라며 찬성해주었다고.

역사는 변천하는 것. 피압박민족인 우리에게도 광명의 날은 있을 것이다. 농자가 천하지 대본이면 농민은 민족의 원천이다. 쌍천은 평소 농민의 심신(心身)이 건전할 때 희망과 광명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농장에 도착하는 날부터 진료 시작

일제강점기(1935년) 개정 간이역
 일제강점기(1935년) 개정 간이역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1935년 4월 1일 새벽. 기차를 밤새도록 타고 온 쌍천은 군산에서 약 4km 떨어진 개정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농장 종업원이 건네주는 작은 전단지를 받아든다. 작인(作人)들에게 세브란스 의전 이영춘 교수를 초빙하여 진료를 시작한다고 알리는 안내장이었다.

구마모토의 초대를 받아 지난 10월에 다녀가서 초행은 아니지만, 드넓은 평야와 논 사이로 흐르는 수로까지 고향 마을과 흡사해서 정겨움을 느낀다. 더욱 친근한 것은 두 고장에 사는 조선 농민들의 비슷한 삶의 모습이었다고. 가난까지도 비슷했다 한다.

구루마에 실려 온 환자를 돌보는 쌍천 이영춘 박사
 구루마에 실려 온 환자를 돌보는 쌍천 이영춘 박사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공동묘지가 있는 마을을 끼고 돌아 구마모토 농장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지게 위에 이부자리를 깔고 걸터앉은 노인, 소달구지에 이불을 깔고 누운 환자 등 많은 사람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몰려 있었다. 종업원은 며칠 전부터 진료권을 발부했다고 귀띔했다.

쌍천이 개정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환자는 옥구 지경 하리에 산다는 소작농 최종국씨. 쌍천은 회고록에서 최씨는 수년 후 작고하였으나 그 가문과는 해방 후까지 친교가 지속하였고, 후손 중에는 언론인, 은행가도 배출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쌍천의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해 8월에는 농장 사무실을 빌려 쓰던 진료소 건물(39평)이 완공되어 진찰실, 도서실, 약국, 수술실, 실험실 등을 구비함으로써 진료소 면모를 갖추었다. 경성(서울)에서 내려온 최신은 간호부(간호사)도 합류했고, 쌍천이 거주할 사택(20평)도 신축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결핵, 매독, 기생충은 '3대 민족 독(三大民族毒)'

소장으로 부임하던 1935년 진료환자는 연인원 3만 명. 소작인 가족당 1.5회 진료 받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소작인을 가장하여 진찰권을 빌려서 가지고 오는 환자도 많았는데, 시비를 가릴 시간이 없어 그대로 진료해주었다고 한다.

 옥구 지경진료소 모습
 옥구 지경진료소 모습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농가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보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농가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보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쌍천은 지역 농장의 작인에게도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개정의 본장과 정읍 화호, 완주 상관, 옥구 지경, 대야 등 4개소 지장에도 최소한의 약품과 의료 기구를 비치하고 조수(채규병)와 함께 정기적으로 진료를 나갔다.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인간의 다리였던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은 십리 길도, 백리 길도 예사로 걸어 다녔다. 쌍천에게는 자전거가 한 대 주어졌으나 매일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처지에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가 발생하면 험한 시골 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당시 환자들 질병 종류는 신경병, 피부병, 안이질, 외상, 소화불량, 호흡기질환, 등 농촌 생활의 비위생 환경, 본인의 부주의 또는 노동 등으로 인한 질환이 많았다고, 특히 기생충, 결핵, 매독이 의외로 많아 쌍천의 관심을 끌었다.  

쌍천은 훗날 "체력을 소모하고, 체질을 저하시키는 결핵과 매독, 유아(幼兒)의 발육과 성장을 억제하는 기생충의 만연은 농촌이 그만큼 피폐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 독(三大民族毒)'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아동 위생과 보건에 특별한 관심 둬

1936년에는 최악의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농촌의 기근은 심화되었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따라서 1937년 춘궁기에는 보리죽 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최악의 가뭄피해는 쌍천이 거주하는 개정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한국 최초 20평 규모로 만들어진 개정초등학교 양호실
 한국 최초 20평 규모로 만들어진 개정초등학교 양호실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개정초등학교에서 이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개정초등학교에서 이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발육기에 있는 개정보통학교(초등학교) 아동들이 점심을 굶는 광경을 애처롭게 지켜보던 쌍천은 학교 창고에 취사장을 만들어 주먹밥 한 개와 소금을 결식아동 340명에게 3개월간 급식하여 학교 급식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1938년 봄에는 개정보통학교 전교생 5백 명을 대상으로 결핵반응 검사 및 질병에 관한 연구조사를 하였고, 1939년에는 농장주 구마모토를 설득하여 한국 최초로 20평 규모의 위생실(양호실)을 지어주는 등 아동 보건에 힘썼다.

쌍천은 1938년 8월 3일부터 13일까지 '자바'(인도네시아 부속 섬)에서 열리는 '동양농촌위생회의'(국제연맹 주최)에 참석했다. 일본정부 대표들과 부산에서 합류하여 20일 만에 자가르타 항에 도착하여 친족과 자국 영사관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하선하고, 혼자 선실(船室)에 남아 나라 없는 국민의 비애를 처음으로 통절히 느꼈다고 한다.  

194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야 보통학교에 양호교사를 두었으며 그해 4월에는 세브란스 출신 김성환을 정읍 화호 진료소로, 1942년 10월에는 김경식을 지경 진료소로 초빙하였다. 정읍 화호 등 농장소재 3개 학교에 위생실을 건축하고 양호교사를 둔 것도 1942년이었다.

인술과 의사 정신을 농촌에 심은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 이영춘 박사(좌)와 구마모토(우)
 쌍천 이영춘 박사(좌)와 구마모토(우)
ⓒ 군산의료원

관련사진보기


쌍천은 1940년 10월 '조선 농촌위생연구소' 설치안을 구마모토에게 제출하고, 본격적인 치료와 예방사업, 그리고 1개소의 결핵요양소 설립을 촉구하면서 개정에 부임하는 조건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연구소 설치안은 구마모토의 언약이기도 했다.

구마모토는 "李박사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지금 전쟁(태평양전쟁)이 격화되고 있어 사업가들은 수익의 8할이 세금으로 납부되기 때문에 요청을 수락하면 농장은 연구소의 부속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서류를 반려했다.

가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때 구마모토는 쌍천에게 일본인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민중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도 농장 직원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국에서 강요당한 적도 없었다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구마모토는 쌍천에게 '조국의 해방을 축하한다'면서 진료소 시설(재고 15만 원)을 가지고 적당한 장소에 개업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자신의 영리보다 이웃을 더 생각했던 쌍천은 농촌의료사업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거절하였다.

쌍천 이영춘 박사는 빈곤에 시달리는 농가(農家)의 위생과 보건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일인 대지주가 세운 진료소에 내려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대학에서 배운 인술과 의사 정신을 농촌에 심은 '한국의 슈바이처'였다.

덧붙이는 글 | *자료 출처
‘나의 교우록’ 이영춘 저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홍성원 지음
군산의료원 김성겸 홍보팀장(사진)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쌍천 이영춘, #개정 자혜진료소, #구마모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