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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시대를 주도하는 시장 경제적 성취주의 열풍에 대학도 몸살을 앓고 있다. 표준화·계량화·상대화의 잣대로 강의·연구·봉사업적을 평가함으로써 교수들을 '점수의 노예'로 내모는 작금의 대학개혁을 자조적으로 꼬집는 비명들(예를 들면, 박홍규 "'낙제교수'의 항변", <경향신문> 2011. 2.10.)이 넘친다. '대학교수'라는 명함을 소지한 소위 제도권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이 땅에서 향유했던 분에 넘치는 명예와 권력을 생각하면, 그들의 엄살스러운 시련(?)은 마땅하거나 고소한 쌤통이리라.

아내마저 '10년 뒤에 사라질 직종'의 우선순위에 교수직이 포함된다는 뉴스기사를 들이대며 나를 윽박지른다.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기구가 홍수처럼 토해내는 지식의 무게가 내가 소유한 좁고도 얕은 밑천을 압도한다. 정말/만약 지식인의 사망 혹은 소멸이 시대적 운명이라면(<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후마니타스, 2008 참조), 이 땅에서의 삶과 앎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립될 것인가? 새로운 지식의 배움과 나눔은 가능할까?

일찍이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역설했다. 자연과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운행방식에 대한 경험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의 습득은 종교적 관습과 정치적 권위의 사슬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 철학자들이 '백과사전' 편찬에 열중한 이유도 지식의 보급과 확산은 진보와 해방을 약속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지식(습득)이 보장하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플러스) 혜택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 억압적(마이너스) 속성을 고발한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 명이 미셸 푸코(1926-1984)이다.

그의 주장은 "아는 것은 너의 힘이며 동시에 나(타인)를 훈육하고 속박하는 권력의 원천이다"라고 요약된다. 쉽게 말하자면, 학교 선생님들이 교단 높은 곳에서 관찰하여 기록하는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는 '품행 방자한 학생'을 단속하는 회초리이며, 병원이나 공공기관에 분류, 보관된 건강진단서와 신용등급표는 나의 육체와 일상생활을 옥조이는 미세권력의 눈이라는 뜻이다.

푸코의 주장처럼, "지식이 나의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의 무기로 작동한다면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기본인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강행되는 국가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담론(지식권력)에 침을 뱉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전문지식과 실무경험을 겸비한 소위 '내부 고발자'의 출현과 대항지식의 생산을 기다린다.

예를 들면, 판검사-변호사-브로커의 먹이사슬을 내부자적 시각으로 비판한 <불멸의 신성가족: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창비, 2009)과 같은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되어 어떻게 전문지식의 독점과 오남용이 사회적 정의를 좀먹는 병균으로 작동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언론인들의 직업관행과 취재원사용법(?)을 기록한 기자의 매뉴얼, 비정상적인 교육열에 편승해 부패한 교육-사업가의 치부일지 등과 같은 전문업계의 축적된 노하우를 자기 성찰적으로 고발, 폭로하는 책들이 계속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논쟁되지 않고 관습적으로 독점되는 전문지식은 그 소유자(집단)의 힘과 이익으로 순전히 환원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면, 그들이 움켜지고 공유하는 권력지식의 이기주의를 문제시함으로써 착한 고객이나 하인 같은 유권자로 남기를 거부해야 한다. 전관예우, 학벌공화국, 국가전능주의, 도제식 전문교육 등등 다양하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진행되고 용인되어 왔던 '지식=권력=부와 명예'의 등식을 깨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익성이 결여된 전문지식은 파괴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시각으로 곰곰이 따져보면, 공공 이익과 공적 자유의 확장을 위해 자기희생이라는 좁은 문을 선택한 용기 있는 이들에게 '내부 고발자'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들이야말로 '나를 따르라'고 호령했던 전통적인 (죽은) 지식인을 대체해야 할 포스터모던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이다. 죽은 지식인의 무덤 위에 피어야 할 새싹은 내부 고발적인 실천하는 양심인 것이다. 누가 '위키리크스(WikiLeaks)'를 두려워하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육영수 씨는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불멸의 신성가족,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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