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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에 관한 정치권의 관심이 뜨겁다. 반가운 마음에 신문 등을 열심히 뒤적거린다. 최근 복지국가 논쟁은 복지국가의 상(象)과 정책, 소요재정 추계와 재원마련 방안, 복지동맹 구축의 필요성과 방안 이상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모두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지만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배경"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점은 아쉽다. 배경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성찰과 국민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사회가 구축해야할 복지국가의 상을 잡아가기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며 민주적 원칙을 고려할 때도 중요하다.

 

최근 복지국가 논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갑자기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배경으로 대부분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무상급식, 박근혜 효과를 꼽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상급식 논쟁이 6.2지방선거에서의 진보 측 승리로 귀결된 점, 이후 대선후보들이 정치적 이슈로 복지를 띄워낸 실질적 힘은 인간다운 삶을 그리는 대중의 복지욕구였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고단한 삶이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평등하고 억압 없는 세상을 꿈꾸기 마련이다.

 

나는 마이클 셀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급기야는 복지국가가 정치적 의제로 떠오른 이면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신자유주의의 광풍, 국민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성장과 개발을 밀어붙이는 이명박정부에서의 우리네 삶은 힘들고 불안하다. 최근 우리 국민 열에 여덟은 주거, 노후, 교육, 일자리, 평화에 대한 불안을 격고 있고 이 같은 불안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시장규제완화, 노동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경쟁은 가속화되고, 빈부격차는 커지며, 중산층은 사라져간다.

 

이런 현실에서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대학생활을 즐길 여유를 찾기도 전에 취업준비와 이를 위한 학점 취득에 열을 올린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행하고 급기야 2004년 이후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사망률 1위 국가가 되었다. 자고로 평화롭고 배부른 시기에 백성들은 나라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복지국가 논쟁은 이를 간과하고 있다.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불안하고 불행한 삶에 지친 그들이 국가를 상대로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지를 묻고 듣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권의 복지담론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을까?

 

최근의 복지국가 논쟁은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왠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보쪽 담론은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 대중은 다가서기 어렵다. 역동적 복지국가, 삼차원 복지국가 등 왜 그렇게 어려운 표현으로 복지국가 모형과 정책을 표현해야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서구의 복지정책과 개념, 용어를 끌어다 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정책의 주체인 국민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과정을 생략한 채 전문가들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정책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정권 창출을 위한 전술로 수단화된 복지공약은 또다시 실현되지 않고 선거가 끝나면 공약집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인가? 예컨대 민주당 측의 증세 없는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반값등록금 공약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될 수만 있다면 또 응당 구현되어야 할 정책이라 생각되지만 어떻게 증세 없이 이 같은 정책적 변화를 이뤄낸다는 것인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증세논쟁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세로 인해 집권에 실패할 것이란 정치적 계산이 앞선 결과라 생각된다.

 

보수진영의 복지국가 내용은 한 술 더 뜬다. 박근혜 측 내용은 선별적이고 노동연계를 강화하는 기존 패러다임을 살짝 담론만 바꿔 포장하고 있다. 박근혜의원이 제안한 '한국형 맞춤형 복지'를 제대로 구축하려면 공적 사회복지서비스전달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누가 어떤 내용을 필요로 하는지 개인의 욕구를 확인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하려면 일단 국가가 그 개인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절차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사회복지사업법에 이같은 절차에 관한 규정이 있지만 7년째 법전 속에서 잠자고 있다. 2003년 7월 사회복지사업법에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이 규정되었지만 7년 동안 사문화되어 있는 현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근사하게 들리지만 기존의 개인과 가족의 책임, 노동능력에 따른 열등처우의 원칙을 세련되게 표현한 것일 뿐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다.

 

새로운 한국, 복지국가의 상은 어디서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가?

 

사정이 이렇고 보니 복지에 대한 대중의 바람과 복지국가 논쟁이 밀착되지 못한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복지를 자신의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한 경험이 극히 적다. 심지어는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사회복지학도들도 자신이 복지서비스 수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지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복지=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것, 우리나라 경제 상황에서는 때 이른 서구 부자나라의 꿈같은 이야기' 등으로 치부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랫동안 경제우선의 성장담론 속에서 개인과 가족의 책임을 강요받아 온 탓이다. 복지가 실은 우리네 삶의 문제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는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지만 대부분 잘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일상의 주제로 이야기될 때면 누구나 명확한 의견을 내놓곤 한다. 무상급식의 경우가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러므로 우리사회에서 복지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존 개념과 정책을 벗어나 우리네 삶의 현장으로 들어와 발바닥으로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우리 현실에 맞는 복지정책들을 마련해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시설을 벗어나 지역에서 자립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물론, 평범한 학부모들, 회사원들, 노인들, 불안에 쫒기는 20대 초반의 청년들과 청소년,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국가의 역할'에 대한 바람을 모아내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시급하게 해결할 과제와 정책목표와 내용을 마련해 나갔으면 한다. 우리네 현실에서 우리 국민들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논의해 나갔으면 한다. 문제와 욕구를 제대로 확인하고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용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최근 사회복지에서 가장 강조하는 원칙이다.

 

우리 국민의 복지욕구에 대한 확인을 통해 새로운 복지국가 한국을 창조하길

 

그러나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전문가의 눈높이에서 정책목표를 수립하고, 이에 따른 소요재정을 추계하는 기존의 방식은 대다수 국민을 논의의 과정에서 배제한 체 피폐하고 불안한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국민적 욕구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재미없고 지루한 소요재원 논쟁으로 귀결시키기 쉽다. 복지에 맞서는 보수의 담론인 '세금폭탄론'(나는 이러한 정치적 표현을 우리가 사용하질 않길 바란다)을 두려워해서는 모처럼 불어온 복지에 대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다.

 

재원조달방안은 정책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지만 재원조달방안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가치를 놓치게 되기 쉽다. 최근 서울시 무상급식을 둘러싼 싸움에서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권력과 돈에 집착한 나머지 젊고 합리적 보수의 이미지를 가졌던 정치인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최근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시민'이 아닌 '계산기'를 본다.

 

우리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진지한 논의과정을 거칠 때 선별적 복지와 선성장 후분배 담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번영과 특권이 확산된다는 '공리주의적 견해'에 대해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언해왔다. 우리는 부자와 권력자가 그들의 곳간이 차고 넘칠 때 부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나누기 보다 더 큰 곳간을 더 좋은 자재로 지으려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케인즈와 루즈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1945년 이후 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과 무료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이상은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던 역사학자 토니주트가 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인용한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재집권을 위한 위로부터의 동맹과 탁상에서의 정책이 아니다. 저잣거리로 나와 발바닥으로 누비고 귀를 열고 아래로부터의 동맹을 확산시켜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복지국가 한국을 창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덧붙이는 글 | 박숙경 님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사회복지학 박사입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복지, #인권, #세금폭탄론, #무상급식,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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