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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세계 13위 대한민국. 하지만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이웃은 매년 평균 3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진은 서울역 광장에 쓰러진 한 노숙인.
 GDP 세계 13위 대한민국. 하지만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이웃은 매년 평균 3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진은 서울역 광장에 쓰러진 한 노숙인.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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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2010년 1월 어느 날 새벽 서울역 대합실.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 노숙자 A씨가 만취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서울역 직원 B씨는 동행했던 공익근무요원에게 "노숙자를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공익근무요원의 손에 이끌린 A씨는 20미터 떨어진 대합실 출구 앞 대리석 바닥에 던져져 방치되었다.

잠시 후 현장에는 또 다른 공익근무요원 C씨가 '수습하라'는 무전을 받고 나타난다. 그는 A씨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에 바지가 벗겨져도 모를 정도로 의식을 잃고 있는데도 휠체어에 태운 후 서울역사 구름다리(과선교) 아래로 옮겨놓았다. A씨는 낮 12시경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흉부의 고도손상이었는데 결국 A씨는 제때 부상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언이 있다. 달리 말하면, 법은 도덕의 범주 안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입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도덕의 영역으로 두고 어디부터 법의 영역으로 보는 게 정의인지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노숙자 A씨를 역사 밖으로 끌어낸 B씨와 C씨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일 병원으로 후송했더라면 A씨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하지만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검찰은 두 사람을 유기죄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지난 15일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왜 그랬을까. (자세한 얘기는 기사 뒷부분에서 더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역 노숙자 방치 사망... 무죄 선고된 까닭

[사례 2]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술을 거나하게 걸치고 집으로 가던 주태백(가명)씨는 역시 만취 상태인 한병만(가명)씨를 우연히 만났다. 초면인 두 사람은 마침 집이 같은 방면이라 함께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로 2미터 아래 개울로 미끄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술기운을 못 이긴 두 사람은 잠이 들고 말았다.

몇 시간이 지나서 밤이 되니 추워서 잠이 깬 두 사람은 도로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한동안 길을 찾지 못했다. 주씨는 그나마 정신이 돌아와서 겨우 기어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씨는 머리에 충격까지 입은 상태라 결국 길을 찾지 못하여 추운 날씨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례 3] 추운 겨울날 밤, 친구들과 함께 술을 잔뜩 마셔 이미 취한 노인장(가명, 60대)씨는 홀로 주점을 찾았다. 마담인 양주로(가명)씨는 노씨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매상을 올리기 위해 여종업원을 통해 술을 계속 권했다. 노씨는 새벽까지 양주 2병을 포함하여 상당량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새벽 3시 노씨가 인사불성이 되자 양씨는 노씨의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술값으로 챙겼다. 그런 다음엔 가게를 나서는 노씨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노씨는 곧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하고 말았다.

겨울에 취하도록 마시는 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니, 술을 많이 마셨더라도 주위에서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주씨와 양씨는 충분히 취객을 살릴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방치한 셈이다. 그렇다면 법대로 따져보자. 두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할까.

"우연히 동행한 사람에겐 법률상, 계약상 보호 의무 없다"

결론에 앞서 적용 법조부터 따져본다. 두 사람을 피고인석에 세운 죄명은 형법의 유기치사죄로, 사람을 유기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형법의 유기죄는 다음과 같다.

'노유(老幼), 질병 기타 사정으로 인하여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를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주의 깊게 볼 대목은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이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보호할 책임만으로는 죄가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노부모를 모시는 자식,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사고 운전자를 발견한 경찰 등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례 2]의 주씨는 무죄이다. 법원은 "유기죄의 죄책을 인정하려면 보호책임이 있게 된 경위, 사정 등을 따져야 할 것"이라며 "주씨와 한씨가 특정지점까지 가기 위하여 길을 같이 걸어간 사실만으로는 법률상, 계약상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물론 주씨의 행동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쨌거나 법으로 따져보니 일정 기간을 같이 걸어간 사실만으로는 유기죄나 유기치사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례 3]의 양씨도 마찬가지 아닐까. 술집 주인이 손님 귀갓길까지 챙길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 들만도 하다. 법원은 법조문에서 '기타 사정으로 인하여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술집 주인은 손님이 술에 만취하여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안전하게 귀가하도록 조치하거나 술이 깰 때까지 술집에 있도록 할 주의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만취 손님 귀갓길 방치한 술집 주인은 징역형

법원은 "이미 상당량의 술을 마신 손님을 다음날 새벽까지 마시게 한 후 노상에 방치할 경우 동사의 위험이 있음은 경험칙상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며 "노씨를 길거리에 그냥 내려놓고 방치한 이상 유기치사죄 인정은 정당하다"고 결론지었다. 양씨와 종업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례 1]의 무죄 판결을 살펴보자. "서울역 직원이나 공익요원은 노숙자를 보호할 법률상 의무가 있다"는 검찰의 주장을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한국철도공사법 등에는 직원의 부조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이 없다"며 "민법상의 사무관리나 관습, 조리 등에 의해서 유기죄의 부조의무를 확장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고 법관의 자의적 판단을 초래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을 고치지 않는 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 말미에 '판결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소회를 털어놓고 있다. 법원은 "노숙자였던 망인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 참으로 고달픈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며 "피고인들에게 유기죄의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망인의 죽음 앞에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은 이어 "이 사회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면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인 노숙자의 문제는 우리 구성원 모두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며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남긴 채로 먼 길을 가는 고인을 명복을 빈다"고 끝을 맺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 고민해 볼 때

냉정하게 말하자면, 거리에서 응급환자나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더라도 현행법상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대로 법률상, 계약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거나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는데도 구조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국회에서도 관련법을 제정하거나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은 없는 상황이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을 도덕에만 맡겨도 될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거리에서 응급환자나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더라도 현행법상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거리에서 응급환자나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더라도 현행법상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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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없어도 의인을 위한 법은 있다
'의사상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란...
현행 형법 중에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없다. 대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다가 다치거나 사망하면 보상을 해주는 법은 있다. '의사상자(義死傷者)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직무 외의 행위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의사자) 또는 부상을 당한 사람(의상자)과 유족에게 국가가 그에 걸맞은 예우와 지원을 하게 된다. 즉 법률상, 계약상 의무가 없는데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게 되면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게 되는 제도이다.

의사상자와 유족은 보상금은 물론 의료급여·교육보호·취업보호·장제비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법에서 인정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강도·절도·폭행·납치 등의 범죄행위를 제지하거나 그 범인을 체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구조행위를 한 때
- 자동차·열차, 그 밖의 운송수단의 사고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구조행위를 한 때
- 천재지변, 수난(水難), 화재, 건물·축대·제방의 붕괴 등으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구조행위를 한 때

법원은 구원요청을 받고 강도를 체포하려던 의인이 오히려 범인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경찰에게 강도 공범으로 오인되어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경우에도 의사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강 상류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이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휘말리는 바람에 익사한 용감한 청년을 의사자로 인정했다. 

가끔씩 지하철이나 기차 선로에 떨어진 시민을 구했다는 의로운 소식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전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법이 정비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태그:#착한사마리아인법, #유기, #노숙자, #아는만큼보이는법,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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