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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좌상 뒤편으로 생가터가 보인다.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이다.
▲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좌상 뒤편으로 생가터가 보인다.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이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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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도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바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끓는 피눈물에 목에 매인다.

대문채 솟을대문 좌우로 길에 핫간과 곳간을 마련한 대문채
▲ 대문채 솟을대문 좌우로 길에 핫간과 곳간을 마련한 대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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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 대문채 안편. 앞에는 사랑채가 있고, 넓은 사랑마당이 있다
▲ 대문채 대문채 안편. 앞에는 사랑채가 있고, 넓은 사랑마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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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허초희이며, 자는 경빈이다. 난설헌은 호이다. 명종 18년인 1563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시의 석학이던 초당 허엽의 셋째 달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허난설헌은, 8세 때에 광한루 백옥루 상량문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결혼 후에 딸과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인가, 선조 22년인 1589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여인이다.

위에 적은 시는 '아들과 딸을 여의고서' 지은 <哭子>라는 글을, 11대손이 번역을 한 시이다. 허난설헌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난설헌의 시를 보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었다. 선조 39년인 1606년에는 중국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아픔을 간직한 여인 허난설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는 허난설헌이 태어난 생가 터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사랑채 네 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사랑채. 뒤편으로는 안채와 연결이 된다
▲ 사랑채 네 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사랑채. 뒤편으로는 안채와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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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마루 사랑채와 중문을 잇는 곳에는 족마루와 족문이 있다
▲ 쪽마루 사랑채와 중문을 잇는 곳에는 족마루와 족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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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속에 비운의 여인이 앉아있다

신묘년 명절을 앞둔 1월 30일. 날씨는 금방 손끝을 얼얼하게 만든다.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 터를 찾았다. 면 년 전인가 이곳에 찾아왔을 때는, 폐허가 되다시피 변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이번 답사에는 앞쪽에 넓은 주차장이 생기고,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날이 찬데도 차 몇 대가 앞에 서 있고, 집 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주차장 안쪽에는 건물이 한 동 들어서 있고, 나뭇길이 집 쪽으로 나 있다. 그곳을 걸어 가다보니 비운의 여인이 앉아있다. 바로 허난설헌의 좌상이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찬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다소곳 앉아있다.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아픔을 속 깊이 감추고 그것을 글로써 표현을 한 여인. 그 여인의 아픔을 잠시 나누어본다.

중문채 판자벽으로 마감을 해 집안의 닥딱함을 없애준 중문
▲ 중문채 판자벽으로 마감을 해 집안의 닥딱함을 없애준 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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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채는 5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ㄱ 자부분에서 사랑채와 연결을 하였다
▲ 안채 안채는 5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ㄱ 자부분에서 사랑채와 연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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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담으로 나누어 놓은 허난설헌 생가 터

현재 허난설헌의 생가 터에 자리한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대문간채가 ㅁ 자형으로 자리를 하고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고 모두 7칸으로 되어있다. 중앙에 출입문과 좌우에 세 칸씩은 광채와 곳간채 등으로 꾸며졌다. 대문간채를 들어가 정면에 바라다 보이는 사랑채의 앞에는, 넓은 사랑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마련했으며 앞에는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팔작지붕인 사랑채는, 현재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한다. 사랑채의 우측 끝에는 쪽마루를 두었으며, 그 끝에는 작은 쪽문이 나 있다. 굳이 담을 돌지 않고도, 그 문을 통해 중문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중문은 사랑채의 끝과 맞물려 있으며, 중문채는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여,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랑채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두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아래채 등이 ㅁ 자로 형성돼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두 칸으로 한편을 ㄱ 자로 꺾어 사랑채와 연결을 하고 있다. 겹집으로 지어진 안채는 ㄱ 자로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두어, 양편의 방에 불을 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안광채 안채와 연결이 된 안 광채
▲ 안광채 안채와 연결이 된 안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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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이 되는 부분에 혐로가 나 있다
▲ 안채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이 되는 부분에 혐로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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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이동 공간인 협문과 협도

허난설헌 생가 터의 집은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여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협도'를 두었다는 점이다. 협도는 담 밖에 있는 우물과 방앗간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우물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 여인네들이 남정네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 협도는 일각문을 통해 높은 담장을 둘러놓았다. 이 협도를 거닐면서 괜히 마음이 짠하다. 어찌 보면 먼저 자식들을 앞장세운 난설헌이, 남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대문채 앞에 서 있는 글귀들을 본다. 괜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세월은 그렇게 허초희라는 여인을 유명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으로 기억을 하겠지만, 정작 그 마음은 숯검정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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