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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터의 아침 평지에 있는 절과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좁은 골짜기에 이만한 절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

평생 서울조차 가보지 않은 시골 사람의 첫 해외여행을 앞둔 설렘이 이런 걸까. 이른 아침, 동해 바다를 벗어나 눈 덮인 설악산을 비껴보며 잠이 덜 깬 겨울산에 들었다. 태백산맥 고봉준령의 산허리에 해당하는 양양군 서면, 그야말로 심산유곡에 자리한 선림원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폐사지인 이곳을 그리게 된 건 책 한 권이 계기가 됐다.


누구에게나 가장 기억에 남는 책 한 권은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삶의 길잡이가 돼 준 나침반 같은 책도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된 친구 같은 것도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뀌게 한, 마치 '벼락' 같은 책도 있다. 내겐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의 명저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권)가 바로 그렇다.


군 입대를 코앞에 둔 대학 시절,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로서, 이 책은 여행이래봐야 수학여행과 관광유람이 전부라고 여겼던 기존의 여행 패러다임을 일거에 허물어버렸다. 이 책을 통해 땅굴 등 안보관광지나 불국사, 석굴암, 경복궁이 아니어도 우리 땅에는 찾아볼 만한 유적이 지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나를 오랜 미몽에서 깨어나게 했다고나 할까.


여행을 좋아하고 우리 문화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자신의 좌우명처럼 외고 있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글귀도 기실 이 책의 선림원터를 소개하는 꼭지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선림원터 삼층석탑 오전 10시가 다 돼서야 산 너머로 올라오는 아침해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남도답사 1번지', 전남 강진과 해남, 그리고 담양과 고창은 이곳 광주와 이웃한 곳이라 주말 등을 이용해 수도 없이 다녔고, 경북 경주와 충남 예산도 족히 대여섯 번은 찾았다. 물론 그곳들 모두 찾아갈 때마다 새롭고 낯선 느낌을 받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선림원터처럼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기실 국토를 가로질러 가야하는 강원도, 그것도 낙산사처럼 고속화도로가 시원하게 뻗은 곳이 아닌, 구절양장 깊은 산속으로 순례하듯 찾아가야 하는 폐사지 선림원터는 마음만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책에서조차 선림원터를 '하늘 아래 끝동네'의 폐사지로 소개하고 있다. 어쨌든 그곳을 가기 위해 무려 15년을 기다린 셈이다.


연어가 회귀하는 깨끗한 하천으로 정평이 난 남대천을 바라보며 양양읍내를 갓 벗어나면 도로가 두 갈래로 나뉜다. 굳이 도로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어디로 가는 길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눈을 인 채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두 산이 두 갈래 길 뒤로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의 대표격인 설악산과 오대산이 그것이다.


오른쪽은 오색약수를 지나 한계령을 넘어 인제에 닿는 길이고, 왼쪽 길로 접어들면 구룡령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겨울이 가장 길다는 홍천군 내면에 이르게 된다. 선림원터는 구룡령 조금 못 미친 곳, 마을 이름조차 토속적 내음이 물씬 풍기는 황이리 미천골의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를 잇는 고속국도가 곳곳에 뚫리고 강원도의 대표적 관광지인 설악산을 끼고 한계령과 미시령 고갯길이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존재감마저 잃어버렸지만, 과거 구룡령은 관동지방에서 한양을 잇는, 대관령 못지않은 중요한 고갯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때 묻지 않은 경관을 간직한 탓에 구룡령 주변에 몇몇 자연휴양림이 세워지면서 여름 휴가철에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등 아주 '오지'는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을 통해 태백산맥을 넘기는 여전히 쉽지는 않다. 매끈하게 포장은 되었으되,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꼬부랑길이 여전한 탓이다.


설레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양양에서 선림원터까지 불과 오십 리길이지만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건, 굽이진 도로와 나란히 흐르는 공수전 계곡과 용소골 계곡 등 원시적인 풍광이 적어도 덜 상처 받았다는 점이다. 운전자를 배려하고 시간 조금 단축시킨답시고 산자락 깎고, 뚫고, 밀었다면 사라졌을 비경이 그래도 이곳에서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찾아가기 가장 어려운 절터로 선림원터가 꼽혔다는데 지금도 그럴까. 여름철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미천골 자연휴양림이 절터 뒤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록 차량이 교행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지만 시멘트 포장도로가 자연휴양림까지 나 있다. 선림원터를 대문 삼고 흡사 절터를 에워싸듯 산중턱에 휴양림의 새뜻한 건물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사적지 바로 곁에, 그것도 등 뒤에 휴양시설을 만든다는 게 언뜻 보면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선림원터의 입지가 빼어나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꽁꽁 얼어붙은 계곡의 얼음장 아래 숨어 흐르는 물소리조차 들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부딪치는 겨울바람 소리가 동해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크게 느껴지는 심심산골에 천여 년을 사이에 두고 절터와 휴양시설이 마주하고 있다.


선림원터는 계곡 비탈진 곳에 성곽처럼 잔돌로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다. 평지의 여느 절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변에 이만한 공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계단을 오르면 천 년의 세월과 매서운 겨울바람을 버틴 채 석물들이 절터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석 마냥 무심하게 서 있다. 비록 완전하게 보존된 것은 하나 없지만, 보면 볼수록 위엄 있고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홍각선사 부도비 원래 거북모양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고 비의 몸돌은 파손된 채였는데, 최근 복원해 세워놓았다.

 

지붕돌 모서리에 상처가 나고 몸돌에 새겨놓은 부조가 마모되었을지언정 정돈된 기품이 느껴지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몸돌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화려한 조각의 기단만 남은 부도와 최근 빗돌을 끼워 넣은 힘찬 기상의 부도비가 자못 당당하다. 살아남은 석물들을 통해 머릿속에 복원한 창건 당시의 선림원터는 결코 초라하거나 비굴하지 않다.


천여 년 전 이 터를 찾아 절을 세우고 수도를 위해 찾아든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기실 선림원터는 남아있는 유물의 아름다움보다 창건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 훨씬 더 유명하다. 이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불교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손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은 802년 화엄종의 종찰, 해인사를 세운 순응법사가 2년 뒤인 804년에 수도처로 창건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신라 왕실로부터 후원을 받아온 화엄종, 곧 교종 계열의 절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것이 현재 남아있는 부도비의 주인이기도 한 그의 제자 홍각선사가 주석할 당시에는 신라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탈바꿈되었고, 신라 천 년 왕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사상의 본거지로 거듭났다.


불과 50여 년 만에 제자는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이후 수많은 승려들이 이 심산유곡에 들어와 부패한 왕실과 혼란한 사회를 피해 수도처로 삼은 것이다. 곧, 신라 하대의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 불교에 대한 반성이 비로소 이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기득권층의 일원이었지만 새 시대를 갈구하고 예비한 승려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곳에 몰려든 수도승들이 밥 지으며 흘려보낸 쌀뜨물이 계곡물을 온통 하얗게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절터가 자리한 미천(米川)골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들의 변혁 사상은 전국에 퍼져갔고, 채 100년도 못 돼 신라를 무너뜨리고 고려라는 새 왕조를 개창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삼국이 정립될 시기,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불교가 되레 국가를 전복하고 전제적 왕권에 도전하는 혁신적 사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서라벌 경주에는 부패한 권력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호의호식하는 승려들이 많았지만, 동요하는 민심을 외면하고 불교계 일부의 들끓는 개혁 요구를 외려 묵살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일거에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진리를 간과했고, 끝내 그들은 사상의 주류를 이어가지 못하고 몰락했다.


선림원터 석등 곳곳이 깨져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혀있고 조각 또한 화려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석등, 석탑을 비롯해 선림원터에 남은 모든 석물들은 각각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선림원은 절이 도성 한복판 너른 평지에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 초창기의 사례에 해당한다. 흔히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으로 인해 절이 도망하듯 산에 숨어들게 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으나, 물론 그때의 사례가 없진 않았겠지만, 그 시초를 따져본다면 선림원이 세워진 신라 말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석물들의 위치가 중구난방이다. 하나 같이 멋들어진 작품들이지만 서 있는 위치는 연관성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널브러져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발굴 당시 널브러져 있던 것들을 수습해 새로 세운 것도 있고, 원래 자리에서 아예 옮겨온 것도 있다고 하니 그럴 밖에.


듣자니까 선림원이 폐사된 이유 또한 드라마틱하다. 혁명의 기운이 서린 태자리가 '임무'를 완수한 이후 예기치 못한 산사태로 일거에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역사와 신비를 감춘 채 숨어있었던 것이다.


광복 후 어렵사리 발굴된 뒤에는 '한 많은 사연'이 얹혀졌다. 묻혀있던 신라시대 범종을 찾아내 국보급 문화재로서 잘 간수하려고 인근의 대찰 월정사로 옮겨 보관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6·25 전쟁 때 우리 국군이 퇴각하면서 지른 불에 녹아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편, 발굴 이후 관심이 사그라든 틈을 타 방치된 석물들을 다른 곳으로 반출하려는 움직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나라로부터 선진 사상을 배워 신라 땅에 돌아와 도성 한복판에서 개혁을 울부짖었지만 철저하게 배척당한 채 쫓겨나듯 변방을 떠돌아야만 했던 당대의 선각자들의 체취만큼은 고스란히 남았다. 여느 폐사지와는 달리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석물들이 어떻게든 수습돼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단부만 남은 홍각선사 부도 산사태로 폐사된 후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어 제 짝과 제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조각만큼은 화려한 걸작이다. 부도는 선종의 등장과 함께 조성된 석물로 이것이 초창기의 작품인 셈이다.

 

돌아가기 전 우리나라 초기의 부도 작품격인 홍각선사 부도 곁에 걸터앉아 선림원터 전체를 조망해본다. 지붕돌과 몸돌이 모두 잘려나간 채 받침돌 부분만 남은 그 부도가 선림원터의 현재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땅에 튼실하게 뿌리박고 선 받침돌을 통해 잃어버린, 어쩌면 숨겨진 윗부분을 그려보라며 말하는 듯하다.


선림원터에는 유난히 '사연'이 많다. 역사기록 언저리에 간신히 살아남은 이야기도 있고, 어렵사리 수습된 석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있으며,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당시의 시대상황과 버무려진 이야기도 있다. 터만 덩그러니 휑한 채 주춧돌 몇 개, 석물 조각 몇 개 나뒹굴 뿐인 폐사지를 설레며 굳이 찾아가려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한참을 머물렀는데 이제야 산 위로 해가 떠올랐다. 설악산과 오대산, 두 명산이 만든 골짜기에 기댄 선림원터에 짧은 낮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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