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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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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풍' 사건을 계기로 곽노현 서울교육감이 체벌 금지를 선언한 이후, 체벌 논란은 2011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교과부(장관 이주호)가 간접 체벌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발표했고, 임혜경 부산교육감은 12일 자율적 체벌 허용을 전격 발표했다. 교총과 같은 보수적 단체들과 조중동 등 보수 언론도 교실 붕괴니 교권 침해니 하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체벌 금지를 비판하고 있다.

학생 인권 보장이라는 대원칙은 찬성하면서도 '시기상조', '준비부족', '교육적 효율성' 등 현실적인 이유로 체벌 허용을 주장하는 현 상황은 마치 미국의 흑백 분리학교(흑인과 백인이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게 하던 것) 폐지를 둘러싼 대립과 비슷해 보인다.

미국의 흑백분리 학교가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리틀록 나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 교훈을 한번 생각해 보자.

노예제 폐지 후에도 흑백 분리 학교 정당화한 플레시 판결

링컨 대통령의 노예제 폐지 선언 이후 1865년 미국 수정헌법 제13조에 노예제 폐지가 명시된다. 이후 1868년과 1870년 각각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 흑백 평등조항과 흑인의 투표권 보장이 명문화되면서 외견상 미국의 인종차별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현실에서 흑인 차별은 계속됐으며 '흑백 분리 학교'가 일반적인 학교 형태였다.

그러던 중 1896년 구두 수선공인 호머 플레시(Homer Plessy)라는 흑인 혼혈인이 기차의 백인 전용칸에 올라타는 사건으로부터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Plessy Vs. Ferguson)'이 시작된다. 철도 안내원의 유색인종 칸으로 옮겨 타라는 요구를 거부한 플레시는 '인종 격리 차량법(The Separate Car Act)'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그는 이 법이 흑백 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4조에 반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지방판사 퍼거슨(Ferguson)과 대립했다. 결국 연방대법원은 "인종의 피부 색깔로 기차 좌석을 나눈 것은 잘못이지만, 나눠놓은 시설이 양쪽 모두 같으면 괜찮다"는 이유로 위헌이 아니(합헌)라고 판결했다.

1954년 브라운(Brown) 판결로 바뀔 때까지 유지된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원칙은 흑백 분리의 대전제가 됐다. 이 원칙에 의해 흑인들은 버스를 탈 때에도 백인 전용석에 앉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가 따로 있는 것이 합법이었고, 흑인의 출입을 금하는 식당도 있었다.

브라운 판결 '흑백 분리 학교는 태생부터 불평등하다' 선언

당시 대부분의 주에서 흑백 분리 학교가 허용되는 가운데 보수적인 남부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미주리 등에서는 흑인과 백인 어린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주정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이 합헌이라고 했던 흑백 분리 학교도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성(父性)에 의해 60년도 못 가 뒤집어졌다.

1951년 캔자스 주 토피카(Topeka)에 살던 흑인 올리버 브라운(Oliver Brown)은 8살 딸 린다(Linda)가 가까이 있는 백인학교를 두고 다섯 블록이나 떨어진 흑인학교를 다니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철도를 건너야 해서 딸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한 아버지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게 해 달라고 재판을 청구했다. 그 유명한 브라운 판결(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이 시작된 것이다.

담당 변호사는 아이의 안전과 건강뿐 아니라 흑백 분리 학교가 흑인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충격을 주며 그 정신적 충격은 법의 제재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다. 1951년 첫 청원이 거절 당했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을 계속했다. 드디어 1954년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판결을 뒤엎고 만장일치로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논리는 공교육 분야에서 설 자리가 없다. 분리한 교육 시설은 태생부터 불평등하다"라는 판결을 했다. 위대한 부모의 자식 사랑이 가져온 역사적 판결이었다.

이 브라운 판결로 미국에서 흑백 분리 학교는 없어졌을까? "모든 학교에서 흑백분리를 철폐하라. 즉, 흑백 분리 학교를 폐지하라"는 대법원의 명령에 남부의 대부분 주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3000개가 넘는 교육구 중에서 700개도 안 되는 곳만 분리 학교를 없애고 통합 학교 정책을 추진했다. 학교뿐 아니라 남부의 전문직과 기업인들은 백인시민위원회를 조직해 대법원의 판결을 거부하고, 흑인의 은행 대출을 금지하고 직장에서 쫒아내기까지 했다.

학교에 공수부대 출동... 분리학교 없앤 영웅 '리틀록 나인'

역사의 현장이 된 리틀록 하이스쿨의 현재 모습
 역사의 현장이 된 리틀록 하이스쿨의 현재 모습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판결 이후에도 많은 주정부가 이를 무시한 채 흑백 분리 교육을 존속 시켰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Littlerock)의 백인학교 센트럴 하이스쿨(Central High school)에 흑인학생 17명이 최초로 원서를 내고 등교를 시도했다. 온갖 협박에 8명은 포기했지만, 나머지 9명은 물러서지 않았다. 백인들은 이 흑인 학생들의 등교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심지어 아칸소 주지사 오발 포버스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혼란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수비대(주 방위군)을 동원해 이들의 등교를 막았다.

군인에 막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스 정거장으로 돌아가는 흑인 학생들에게 많은 백인 학생들과 보수단체 회원들이 따라 다니면서 "죽여라! 죽여라!"를 외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침을 뱉기도 했다. 흑인 학생의 백인학교 등교를 놓고 학교는 혼란에 빠졌고 도시는 분열됐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자 우드로 만 리틀록 시장은 통합학교를 지지하며 등교하는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방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초강수 결정을 한다. 포버스 주지사를 소환하여 흑백 분리학교 철폐 결정을 따르도록 경고하고, 연방군인 101 공수부대를 센트럴 고등학교로 보내 배치했다. 주 방위군은 흑인 학생의 등교를 막고, 연방군은 흑인 학생들을 호위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군인들은 교문에서 학생을 등교 시키는 것뿐 아니라 학교 안으로 들어갔으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학교 내에 배치되어 있었다.

입학 이후에도 계속된 온갖 협박과 모욕에도 이들 9명의 작은 영웅들은 끝까지 학교를 다녀 백인 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흑인들이 되었다. 어떤 이는 최초의 흑인 은행직원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인권 운동가가 되는 등 당시 대통령의 결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것이 미국 역사에서 인종 분리 학교를 실질적으로 폐지한 그 유명한 '리틀록 나인' 사건이다.

이들은 이제 미국 역사에서 인종 차별 폐지의 상징적 인물들이 되었고, 이 학교는 '국가 역사 유적지'로 지정됐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들 영웅들을 상징하는 9개의 별이 그려진 은화폐가 만들어졌고, 2008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의 취임식에 초대받아 참석하기도 했다.

교육에서 행정적 효율성은 인권에 우선할 수 없다

당시 미국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은 15%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흑백분리 학교의 폐지에 찬성하는 비율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히 백인들과 보수 단체들은 격렬하게 이에 반대했다.

만약 백인 전용 차량을 인정한 인종분리 차량법에 저항한 플레시가 없었다면, 학교를 가기 위해 철도를 건너야 하는 딸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한 아버지 브라운이 없었다면, 리틀록의 흑인 학생들이 힘들다고 백인학교 등교를 포기했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인들의 반대를 이유로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미국에서는 흑인은 흑인학교에, 백인은 백인학교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모두가 흑백분리 학교를 없앤 영웅들이지만 가장 극적인 장면은 흑인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위해 학교에 군인들을 동원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강수일 것이다. 물론 학교에 군인들이, 그것도 공수부대가 총을 들고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브라운과 리틀록 나인,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이 흑인의 인권과 평등권 보장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백 분리학교를 없앨 수 있었다. 지금 미국에서 다시 흑백 분리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행정적 효율성을 이유로 인간의 천부적 권리인 인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에서 학생지도라는 효율성, 준비부족과 시기상조 등의 현실적인 이유로 체벌 금지를 반대하는 것도 정당화되기도 어렵다. 현실이 완벽하게 준비된 때에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반대로 제도가 먼저 바뀌고 현실이 이를 반영하여 바뀌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리틀록 나인 사건을 겪으면서 미국에서 흑백 분리 학교가 없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흑백분리 학교를 없애기 위해 학교에 군대까지 파견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비하면 곽노현 교육감의 체벌 금지 선언과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양반이라는 표현이 딱 맞아 보인다.

군인과 제소자들에게도 금지된 체벌, 왜 학생에겐 허용?

서울 한울중학교 복도 게시판 한쪽에 '사랑의 매, 무서워요'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울중은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서울 한울중학교 복도 게시판 한쪽에 '사랑의 매, 무서워요'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울중은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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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양천경찰서에서 피의자들을 고문한 형사들이 실형을 받는 것에서 보듯 효율성을 앞세워 제소자들을 고문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또한 급성 백혈병으로 죽은 한 의무경찰을 구타하고 괴롭힌 선임병들이 입건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군인에게도 상명하복을 근거로 구타가 허용될 수 없다. 서울 K고 역도부에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구타한 선배들이 형사입건된 사태에서 보듯 학교에서 학생들간의 폭행이나 괴롭힘 역시 용인될 수 없다.

여전히 체벌 금지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이 모두 바뀌기를 기다려서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면 노예제나 신분제도도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최근의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결혼 허용도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특히 인권 문제가 이런 경향성이 있다. 현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4(학생의 인권보장)는 "정부와 학교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곽노현 등 진보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와 체벌금지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지금 교육계가 해야 할 것은 현실 준비가 안 되었으니 체벌 허용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학생인권 보장이라는 대원칙이 옳다면 그것을 어떻게 학교에서 실천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흑백 분리학교가 백인 등 주류세력의 반대에도 브라운과 9명의 리틀록 학생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폐지됐듯이 학교에서의 체벌도 진보교육감들의 학생인권조례에 의해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을 것이다. 물론 체벌을 폐지한다고 군대를 학교에 동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대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체벌이 폐지되는 것이 역사의 진보일 것이다. 훗날 역사는 체벌 폐지에 대해 곽노현 서울교육감과 김혜경 부산교육감 중 누구를 리틀록 나인의 영웅으로, 누구를 흑인학생들에게 침을 뱉던 백인들로 기록할까?


태그:#체벌 금지, #곽노현, #리틀록 나인,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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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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