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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나름의 야심작이라고 내놓은 시에 문학동아리 선배는 상투적이며 진부하다는 평을 내어놓았다.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때때로 새로운 신작영화 별점에서 만날 수 있는 이 표현은 식상하다와 더불어 무언가를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은 사람에게 그리 달가운 평가는 아니다. 나 역시 그러하였고 어린 마음에 그 시를 쫙쫙 찢어 쓰레기통에 쑤어 넣은 치기 어린 기억이 있다.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어떤 면에서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중년의 시인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며 적은 시 몇 편은 여전히 고생하는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며 1년에 서너 번 얼굴이나 삐쭉하고 비추는 아들의 죄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다. 많은 시나 소설에서 만나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은 가슴 깊은 곳을 울린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직접 전해지는 것이다.

 

아들의 죄스러움이 전해지고 고생하는 어머니에게서 나의 어머니를 쉽게 떠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어느새 나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니 시는 늘 아는 이야기를 하되 상투적이고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중년의 사모곡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비오기 전/ 어머니 뼈가 쑤신 건/ 풀 나무 뿌렝이가 어머니 몸에 들어/ 싹 틔워내려고/ 꽃 피워내려고" -<비 몸살> 전문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 어머니 속을 절인 것 아닌가" -<젓갈>전문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그리고 혹자들은 말한다. 시가 어려워졌노라고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시류들 속에서 너무나도 어려워져 버린 시가 사람들에게 잘 와 닿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어떤 시는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겨우 아, 시구나 하고 와 닿을 정도로 너무나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은 노래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그 점에서 다행이다. 아직은 쉽게 읽을 수 있는 말로 이루어져 있고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가 곳곳에 배어있어 입 밖으로 꺼내어 읽었을 때 운율이 살고 리듬이 춤추어 시라는 것이 퍽하고 가슴에 와 닿으니 말이다.

 

상투적이며 진부한 중년의 사모곡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고 여전히 일반 독자들에게 와 닿는 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말이면 유독 가족이나 고향 생각이 난다. 고향이 지척에 있어도 발길 한 번 옮기기 어려운 사람이나 혹은 고향이 없어진 사람이나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 역시 공통적으로 가족과 고향을 떠올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시집은 잔잔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수정후 중복게제 될겁니다.


귀가 서럽다

이대흠 지음, 창비(2010)


태그:#이대흠, #귀가 서럽다, #시집,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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