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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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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인권위에서 제정한 '2010년 10대 인권 보도상' 뉴미디어 부문에 지난 9월 <오마이뉴스>가 기획기사로 보도했던 '제복 입은 시민, 군인 인권을 말하다'가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느꼈던, 군대 내 소수자로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동성애자와 소수 종교인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에 얼떨떨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쓴 기사가 인권위로부터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앞섰죠. 요즘 인권위가 겪고 있는 '수상 거부' 상황을 지켜보면 마냥 기쁜 마음으로 이 상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기자로서 제가 속해 있는 <오마이뉴스>의 입장도 있으니 선배들의 조언도 필요한 터였습니다.

수상자들로부터 봉변을 당할까봐 우려한 탓인지 전화를 주신 분께선 따로 시상식을 열지는 않지만, 수상 의사를 알려주면 상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사와 상의해 수상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전화를 끊고 뉴스게릴라본부장께 이런 내용을 보고 드렸지요. 그리고 그때부터 저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008년 '인권친화적 보도·방송물 발굴 사업'을 시작한 인권위는 1년 동안 공모·추천과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후보작을 발굴, 10건의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을 선정해 시상해오고 있습니다. 인권위는 ▲ 조명 받지 못했던 인권문제를 발굴한 보도 ▲ 기존의 사회·경제·문화적 현상을 인권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거나 이면의 인권문제 등을 추적한 보도 ▲ 인권 관련 보도를 꾸준히 기획하고 생산하는 등 인권 신장에 기여한 보도 등이 선정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죠.

기사가 인정받는 일보다 더 큰 영광은 없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위촉한 전문·자문·상담위원들이 11월 15일 오전 국가인권위 사무실에서 '61인 동반사퇴 기자회견'을 열고 현병철 위원장 사퇴와 청문회 등 인사시스템 도입 등을 촉구한 뒤 사퇴서를 제출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위촉한 전문·자문·상담위원들이 11월 15일 오전 국가인권위 사무실에서 '61인 동반사퇴 기자회견'을 열고 현병철 위원장 사퇴와 청문회 등 인사시스템 도입 등을 촉구한 뒤 사퇴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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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이 자리에서 고백해야겠네요.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꼭 10년째지만 그동안 변변한 상을 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꺼림칙하긴 하지만 내심 한편으론 선배들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얄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날은 취재거리도 많은 날이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의 전역지원 소식에 6자회담 전제조건을 언급한 외교부 장관의 브리핑, 한반도 평화포럼의 월례토론회 취재까지 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고백하건대 취재를 하면서도 상에 대한 생각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자에게 자신이 쓴 기사를 인정받는 일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갔더니 마침 인권위를 다룬 MBC <PD수첩>이 방영되고 있었죠.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7월 현병철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벌어진 상임위원·전문위원의 동반 사퇴, 인권위에서 수여하는 각종 상을 거부한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길 잃은 인권위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TV화면에는 몇 년 전 취재 중에 만났던 버마 출신의 인권활동가 '소모뚜'씨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주노동자방송 'MWTV'의 대표로 인권위가 수여하는 인권표창장 수상을 거부한 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상이 아니라 인권입니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인권위가 주관한 인권에세이 공모전에서 고등부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은총양이 수상을 거부하면서 '인권위원장으로 자격이 없는 현 위원장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성명서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김양의 글에는 왜 현 위원장의 인권위에서 주는 상을 받지 않기로 했는지에 대해 솔직하면서도 논리적인 생각이 잘 담겨 있더군요.

국가인권위 파행 책임은 현병철 위원장에 있다

강재경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이 지난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62주년 기념식'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위원장 표창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
 강재경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이 지난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62주년 기념식'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위원장 표창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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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끄러웠습니다. 지금 인권위가 보여주고 있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면서도 상을 받는다면 제 기사에서 다루었던 분들에게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권위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미력하지만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다음날 상에 대한 마음을 접은 뒤에 뉴스게릴라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본부장은 우선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이기 때문에 저의 의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전 정리된 생각을 말했고, 본부장께서도 아쉽지만 '너는 이미 상을 받았다'면서 다른 선배들의 의견도 저와 비슷하다고 전했습니다. 그 뒤 많은 후배들로부터 '현병철 인권위'가 수여한 보도상보다 값진 과분한 축하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기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는 것이 정말 조심스럽습니다만 수상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 말씀만 드리고자 합니다.

인권위는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한 민간단체가 정부에 국가인권기구 설치를 요청한 뒤 각계각층의 끈질긴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1년 11월 정식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 인권위는 그동안 '인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기구'로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 위상은 현 정부 들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7월 인권분야 경험이 전무한 현 위원장 취임 후부터는 이 정부에 부담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권고안이 줄줄이 보류되거나 부결되기 일쑤였죠. 특히 지난 3일 '현 위원장의 사퇴'와 '장애인 활동지원 대상제한 폐지'를 요구하면서 인권위 사무실을 점거해 농성 중이던 장애인 단체 회원들을 강제 해산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한 일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인권위가 어디까지 추락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인권위가 겪고 있는 파행의 궁극적인 책임이 현병철 위원장에게 있다는 인권단체들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위원장께서는 왜 전국의 인권단체들이,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위를 외면하고 '인권위 정상화'를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겸허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저도 이번 일을 기자로서 자신을 반성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삼겠습니다.

언젠가 인권위가 제자리를 찾아 혹시라도 수상의 영광이 허락된다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이 상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게 되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인권시민단체 대책회의'의 성명서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 수많은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현 위원장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 공로는 현 위원장의 공로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공로로 보는 것이 맞다. 이명박 정권 덕분에 인권침해가 늘었고, 인권침해가 늘어난 덕분에 국가인권위에 진정 건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점점 늘어나는 인권침해 진정 건수들을 보며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을 가져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자신이 위원장 역할을 잘 해왔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당하고 차별을 당하며 온갖 모욕을 당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태그:#인권보도상, #현병철, #인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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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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