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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다. 당시 나는 배드민턴 선수로 미래의 국가대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여섯 살에 처음 배드민턴 라켓을 잡은 후, 초등학교 4학년 재학 당시 175cm의 신장에 58kg정도의 체중을 유지했을 정도로 신체조건이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했다. 그 탓에 감독님과 코치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교 선배들과의 경기에서도 상당한 기량을 선보이는 등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로 성장했으나 훈련 중 파트너가 실수로 무릎을 밟아 무릎 연골과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수차례의 수술을 통해 무릎 연골과 십자인대를 재건했지만 부상 정도가 매우 심해 선수활동 재개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수술을 집도 했던 의사 선생님은 '향후 1년에서 2년 정도 재활 치료를 열심히 잘 하면 걷는 등의 일상생활에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은 가능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나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해서 꼭 코트에 다시 서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재활치료를 거듭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엉엉 울면서 재활치료를 감당 해 냈다. 꼭 코트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그 시간을 견뎌내게 했으리라.

그러나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심하게 움직이면 무릎이 심하게 부어 오르면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난 스스로 비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일. 남는 시간을 책을 읽는데 투자했다.

하루에도 수십 권의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답답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독서에 흥미를 가지게 된 후 부터는 학교 공부에도 제법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성적인 나날이 향상돼 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와 러시아어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매일 영어공부와 러시아어 공부에 매달렸다.

기회가 되는대로 각종 행사에 통역 자원봉사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했다. 오랜시간 노력하면 결실을 얻게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언어학습 덕에 나는 지금 프리랜서 통·번역사로 활동하면서 자유기고가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시 배드민턴 라켓을 잡다

부상을 당한 뒤 십여년여를 코트에 서지 않았다. 코트에서 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전처럼 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서서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구슬땀을 흘리며 코트를 뛰어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어느 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공원을 걷고 있었는데 공원 한쪽에서 배드민턴 라켓을 빌려주는 행상을 하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공원에는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여자친구는 재밌겠다며 "오빠, 우리도 라켓 빌려서 배드민턴 치자" 하면서 라켓을 빌렸다. 빌린 라켓으로 배드민턴을 치다 셔틀콕이 바람에 방향이 바뀌자 나는 순간적으로 라켓을 몸 뒤로 돌려서 셔틀콕을 받아냈다.

여자친구는 "우와~ 선수같다. 예전에 어디서 좀 쳐 봤나봐?"라며 칭찬을 했다. 배드민턴을 다 치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렸을 때 배드민턴 선수로 활동했고, 운동을 그만둔 뒤로는 배드민턴을 처음 쳐 본다는 말을 해 주었다. 여자친구는 다친 무릎을 연신 손으로 쓰다듬으며 안타까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문, 하태권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최강호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여자친구가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선배와의 만남을 주선 한 것이었다. 선배는 선수로서가 아니라 동호인으로 운동을 다시 시작해 보라고 권유했다. 한 달여를 고민한 끝에 선배가 맡고 있는 팀의 체육관으로 찾아갔다. 그날부터 선배의 도움을 받으며 훈련을 하나 하나 진행했다. 기본적인 자세 연습부터 체력운동, 약해진 무릎과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트레이닝을 병행했다.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통해 약해져 있던 무릎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재활치료의 일환으로 가벼운 산행을 하기 시작했다. 순전히 여자친구의 고집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주말마다, 쉬는 날 마다 동네 뒷산부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재활치료를 담당하던 의사선생님도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산행을 하는 것은 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주말이면 산에 올랐다. 자발적인 의지라기 보다는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산행은 재활치료로서의 큰 몫을 했다.
▲ 주말이면 산에 올랐다. 자발적인 의지라기 보다는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산행은 재활치료로서의 큰 몫을 했다.
ⓒ 안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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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회복되면서 체중도 차츰 정상 체중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선수들과의 연습 경기도 어느정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기량이 향상됐다. 실력이 회복되었을 무렵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에서 장애인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단이 훈련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선배는 장애인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단과의 합동훈련을 계획하셨고 참가자 명단에 내 이름도 포함시키셨다. 광저우 장애인 아시아 경기대회를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기량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몸으로 그렇게 월등한 기량을 선보이는 선수들 앞에서 '내 몸의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금빛 스매시를  나는 또 하나의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 다시 한번 금빛 스매시를 나는 또 하나의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 안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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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에서 제 12회 이천시 생활체육회장배 동호인 배드민턴 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이천 지역의 20개 동호회 1,000여 명의 회원이 선수로 참석하여 그동안 각자의 소속 동호회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겨뤘다.

대회 일주일 전 연락이 왔다. 대회에 꼭 참석하라는 전화였다. 대회 당일 경기장에 도착하자 후배 한 명이 운동복으로 갈아 입으라며 반바지와 티셔츠를 건넸다. 또 다른 후배는 "형 오늘 이기고 싶어요? 아니면 져도 괜찮아요?"라며 물어왔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고 후배는 "오늘 친선경기 잡혀 있으니까 열심히 뛰셔야해요!" 라고 했다.

이날 배드민턴 선수로 활동하다 지역의 초·중·고등학교 코치와 각 동호회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선,후배 코치들이 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시범경기 겸 친선경기를 계획했다고 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코트에 들어섰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기 결과는 31대 21로 승. 선배는 "복귀전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라며 축하했고, 부상으로 인해 배드민턴 선수생활을 그만둔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코트에 선 것이라는 후배들의 말에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많은 분들이 "오랜만에 좋은 경기를 보게 되어 좋았다"는 말과 "힘내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 꿈은 바로 다가오는 2011년에 개최되는 '문화체육부 장관배 생활체육 동호인 배드민턴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는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내일도 나는 코트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릴 것이다.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해 준, 잊고 있었던 나의 꿈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준 선,후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를 똥돌이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똥순이 옥진이에게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와 결혼해 주면 평생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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