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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7일, KBS 임원진에 부분적인 개편이 있었다. 편성본부장과 기술본부장이 바뀌게 되었다. 이 인사가 있기 얼마 전, 참으로 괴이한 일을 겪었다.

 

2명의 후보 이름이 적힌 쪽지

 

인사가 있기 며칠 전 일이다. 황인덕 경영본부장이 내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회사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고, 특히 회사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고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내 방에 들러 이런저런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날 내 방에 들어서는 그의 표정은 좀 어정쩡해 보였다. 당시에는 KBS 드라마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이어서, 광고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때였는데, 행여 또 무슨 사고가 터진 게 아닌가, 걱정부터 앞섰다.

 

황인덕 본부장은 내 앞에 앉더니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끄집어 내면서 입을 열었다. 

 

"진종철 노조위원장이 조금 전 만나자고 해서 노조 사무실에 갔더니 이걸 사장님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족 하나. 나의 '증언43'에 나오는 전종철 기자와 진종철 노조위원장은 다른 인물임. 진종철 노조위원장은 기술직종임).

"그게 뭐지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기술본부장 후보 두 사람 명단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그냥 버리세요. 없던 걸로 합시다."

 

임원 인사 개입 거부하자 "노조 무시한다"고 항의

 

얼마 뒤 기술본부장 인사가 있었다. 그 인사 내용이 알려지자 진종철 노조위원장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가 들이밀었던 두 명의 후보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진종철 노조위원장이 들이밀었던 후보 명단을 보지 않았으니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쪽지에 적힌 2명 후보의 정체는 해임된 뒤 알게 되었다. 나의 '배임혐의' 재판 과정에서 이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는데, 그 때 내가 황인덕 본부장에게 물어보았다. 황 본부장은 자신은 쪽지를 봐서 누군지 안다는 것이었다. 2명의 후보 이름을 듣고 보니, 참 어이없는 인물들이었다).

 

그 해 연말, 노사간 임금 협상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가 심해 중앙노동위원회까지 가는 힘든 협상이 있었고 해를 넘겨 겨우 타결할 수 있었다. 노사간 임금 협상이 타결된 뒤 나는 노조사무실로 찾아갔다. 기술본부장 건은 아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워낙 터무니 없는 일이었던 터였다. 그런데 진종철 위원장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노조위원장 사무실에서 노조 간부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는 도중 진종철 위원장이 다른 사람들 보고 자리를 좀 비켜 달라고 했다. 둘만 남게 되자, 진종철 위원장은 정색을 하면서 지난번 황인덕 본부장 편에 보낸 쪽지를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쪽지를 보지 않고 황인덕 본부장더러 버리라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진 위원장은 화난 표정으로 노조를 그렇게 무시하면 되느냐고 했다. 나는 노조가 회사의 인사에, 특히 임원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진씨는 인사 개입이 아니라 후보를 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반 직원이나 다른 사람이 어떤 인물을 천거하는 것과, 노조위원장이 특정 임원 자리에 두 명의 후보 이름을 적어서 보내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전임 노조 때는 후보를 천거한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임 노조는 팀장 등 인사 대상자 전체를 상대로 조합원들이 상향 평가를 한 결과를 참고자료로 건넸을 뿐, 구체적으로 후보 명단을 적어서 보내는 등 그런 식의 '개입'은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술직종의 노조위원장이 자기 입맛에 맞는 기술본부장을 앉혀서 인사 등을 마음껏 주무르고 싶었는데 그게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세상을 바라 보는 눈, 가치관, 살아가는 자세 등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요인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일이 있은 뒤 노사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하긴, 출발 때부터 진종철 노조는 나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2004년 말 노조위원장 선거 때 진종철 후보가 내건 구호가 정연주와의 '진검 승부'였으며, 그 구호로 당선된 뒤 그는 사사건건 나와 부딪혔다. 내 눈에는 그가 그러한 '싸움'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키워나가고 있고,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노사관계는 진종철 노조의 대를 이은 박승규 노조(11대)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 노조의 집행부들이 지금 김인규 체제에서 핵심 기둥 역할을 하고 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본관 신관 커피숍 운영권도 넘기시오

 

진종철 노조 때 노사관계를 악화 시킨 요인은 또 있었다. 노사협의회에서 노조 쪽에서 KBS 본관과 신관에 있는 커피숍 운영권을 노조 쪽에 넘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노조가 인사와 이권에 개입하면 부패하게 되어 있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런 나의 태도는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가장 많이 들은 비판은 '정치력 부족'이었다. 그런 비판을 들을 때마다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정치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걸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그런데 결론은 늘 같았다. 원칙을 휘게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말의 표현이나 접근 방식을 너무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하는 게 필요한데 그런 것이 내게 부족하구나 하는 반성을 하곤 했다. 

 

진종철 노조위원장은 내가 해임된 뒤 이병순 사장이 들어서자, 시청자센터의 KBS홀팀 팀장이 되더니 그 뒤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시청자본부의 수석국장인 시청자권익보호국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노조위원장 시절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최철호 사무처장(피디) 역시 이병순, 김인규 체제에서 핵심 간부를 맡았다.

 

KBS가 직제 개편을 하기 전, 그는 정책기획센터의 기획팀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정책기획본부의 기획예산국장을 맡고 있다. 기획예산국장 산하 관장 업무가 기획부, 예산부, 대외정책부, 지역정책부, 성과관리부, 계열사 정책부 등인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중요한 부서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재벌회사의 기획조정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10대 노조 집행부가 화려하게 승승장구의 길을 걷고 있는데 대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은 지난 '증언 44'에서 인용한 인사 논평에서 그렇게 지적을 했다. 

 

여기에 노동조합 출신인사들로 김인규 당시 KBS 이사와의 유착 혐의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일부 10대 노조 집행부 인물들의 등용이 눈부시다. 3년 전 노조 위원장, 사무처장, 노사국장이 이병순 체제에서 주요간부로 변신하더니 이번에는 부위원장도 팀장으로 등용되었다. 노조가 자기희생과 헌신의 자리가 아니라 출세의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우려치 않을 수 없다.

 

김인규 체제의 기둥 역할하는 전 노조 간부들의 행태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구설과 시비가 잇따르고 있다. 진종철 전 노조위원장은 자신이 국장으로 있는 부서의 한 팀장(자기보다 선배)을 폭행한 사건이 터졌고, 최철호 전 사무처장이 국장으로 있는 부서에서는 일부 간부가 보직 사퇴를 하는 등 조직이 파열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본 두 사람이어서 그들의 성품이 어떠하며 사람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 두 사람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는 그다지 놀랍거나 새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진종철 폭행사건은 폭행 이후 전개되는 과정에서 '괴이한 측면'이 있어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난 8월 23일, 인터넷 언론인 <미디어스>가 첫 보도를 하면서 밖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은 그 보도의 내용이다.

 

김인규 체제의 실세로 분류되는 진종철 KBS 시청자권익보호국장이 회식자리에서 부하 직원을 폭행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팀장이었던 해당 직원은 폭행 사건 이후 팀원으로 강등돼 '보복인사'라는 의혹도 받고 있다.…

 

복수의 목격자들에 따르면, 6월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본사 인근 식당에서 열린 회식 자리에서 진종철 KBS 시청자권익보호국장은 부하 직원인 조모씨(당시 팀장)를 폭행했다. 공채 14기인 진종철 국장(엔지니어 출신)이 입사 선배이자 나이도 더 많은 조모씨(공채 11기)에게 반말을 해 시비가 붙었고, 이후 식당 화장실에서 진 국장이 조모씨를 일방적으로 폭행했다는 것이다. 조모씨는 진 국장에게 주로 눈 주변을 맞아 피까지 흘렸으며, 폭행 사건 이후 피멍을 가리기 위해 한동안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 것으로 전해졌다. 조모씨도 <미디어스>와 전화통화에서 "술 먹고 옥신각신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20일 <미디어스>는 폭행 사건에 대한 입장을 듣고자 진종철 국장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폭행 사건이 일어난 지 2달 가까이 되었으나 진 국장이 김인규 체제의 실세라는 점 때문에 회사가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 한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부하 직원을 폭행한 진 국장은 '멀쩡한' 반면, 피해자인 조모씨는 오히려 지난 13일자 인사발령으로 팀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됐기 때문이다. 

 

10대 KBS노조위원장이었던 진 국장은 당시 '정연주 사장 퇴진투쟁'을 주도했으며, 이병순 사장이 취임한 이후에는 KBS홀팀장, 시청자사업팀장 등을 거치며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해 왔다.…

 

KBS의 한 관계자는 "시청자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도 더 많은 입사 선배를 폭행했는데 지난 2달간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 국장이 김인규 쪽 실세이기 때문에 (회사가) 봐주려 한다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이 정도 사건이면 진작 인사위원회에 회부됐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내가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이 '괴이하다'고 보는 이유는 입사가 3기나 빠른 선배를 주먹으로 때려 피를 흘릴 정도의 '큰 사건'이 두 달 이상 알려지지 않고 쉬쉬 됐던 점, <미디어스>에 보도가 되자, 진종철 노조(10대) - 박승규 노조(11대)와 성격, 노선, 정체성 등을 그대로 이어받은 강동구 노조(12대, 강동구 위원장은 박승규 노조 때 부위원장을 역임)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폭력사태 진상 조사와 징계'를 요구했던 점, 그리고 진종철 국장에 대해 회사에서 '경고'라는 경미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별다른 대응 없이 다시 잠잠해졌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들은 이 뿐이 아니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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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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